여불위

 



'''여불위
呂不韋
'''

'''작위'''
장신후(長信侯)
''''''
(呂)
''''''
불위(不韋)
'''최종직위'''
상방(相邦)
''' 고향'''
양적(陽翟)[1], 복양(濮陽)[2]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235년[3]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왕을 만들다
2.3. 상방에 오르다
2.4. 몰락과 최후
3. 평가
4. 그 외에
5. 대중문화 속의 여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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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전국시대상인이자, 정치가.
한(韓)나라거상이자, 진(秦)나라상방이었다. 조나라에 볼모로 가있던 진나라 떨거지 왕족인 영이인을 끌어내 끝내 진나라 왕으로 만들었으며, 진시황에게 권력을 빼앗기기 전까지 진나라의 실세로 군림했던 권신이었다. 중국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킹메이커.

2. 생애



2.1. 초기 생애


여불위의 출생지는 기록에 따라 다른데,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한나라 양적(陽翟) 출신이라고 하였고, 유향의 전국책에서는 위나라 복양 출생으로 전한다. 그는 상인으로서의 수완이 뛰어나 막대한 부를 쌓았는데, 사기에서는 "여러 곳을 오가며 물건을 싸게 사들이고는 비싸게 팔아 집에 천금을 쌓아 두었다"고 전한다. 아마도 원거리 무역을 통해 한 지방의 특산품을 다른 곳으로 팔며 돈을 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후에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에 들어가 장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뒤바꿀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당시 한단에는 중원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진나라 소양왕의 태자였던 안국군(安國君)[4]의 아들 영이인(異人)[5]이 인질로 와있던 중이었는데, 여불위는 우연히 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인은 비록 태자 안국군의 아들이었다고는 하나, 한낱 서자 출생인 데다가 서열이 높은 형제들이 워낙 많았으며 무엇보다 이인의 어머니인 하씨가 안국군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므로 그저 눈 밖에 난 처지였다.[6]
그러나, 이인을 한 번 만나본 여불위는 그의 잠재성을 꿰뚫어 보아 가히 왕재라 여겨 그에게 대뜸 오백금(五百金)이라는 막대한 재물을 나누어 주면서 이인의 후원자를 자청하고 나섰다. [7] 이인 역시 여불위의 뜻에 응하여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주거든 막대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8] 이후로부터 여불위는 이인을 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엄청난 자산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한편, 자신의 이었던 미인 조희를 이인에게 바치는 등 갖은 정성으로 모셨다.[9]

2.2. 왕을 만들다


안국군의 정처 화양부인이 자식을 낳지 못해, 안국군의 아들들은 모두 첩들에게서 얻은 서자였기 때문에, 안국군은 자신이 왕위에 오른 후 차기 태자가 될 이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불위는 안국군의 정실부인이었던 화양부인(華陽夫人)을 지지자로 끌어들이라고 이인에게 조언하였다. 이인은 화양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5백금에[10] 달하는 많은 재물을 그녀의 언니에게 보내어 비위를 맞추고, 그녀의 고향인 초나라를 위하는 것처럼 연극까지 하였다.[11]
화양부인은 비록 슬하에 자식은 없었으나, 태자인 안국군의 정실부인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강력한 발언권을 가졌다. 화양부인은 자신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언젠가 안국군의 서자가 왕이 되면 모든 권력을 잃고 말 것을 두려워 하였다. 그 와중에 자신을 지극히 위해주는 이인은 화양부인에게 유일한 희망과 같았다. 화양부인은 곧 이인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 보호해주었고, '''초나라의 자식'''이라는 뜻의 자초(子楚)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기원전 257년, 진나라 장수 왕흘이 조나라 수도 한단을 공격해 오자 장평대전때도 참아줬던 조왕은 인내심이 바닥났던지 자초를 해하고자 병졸들을 보냈다. 여불위는 이 병사들에게 무려 황금 6백 근을[12][13] 뇌물로 뿌려 자초를 조나라에서 탈출시키고 그의 아내 조희와 아들 은 잠적시켰다. 조왕은 자초의 처자식이라도 죽이려고 열심히 찾았지만 여불위가 잘 숨겨줘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후에도 조희와 정은 조나라에서 지냈는데, 기원전 251년 소왕이 죽고 효문왕이 즉위하면서 자초가 태자의 지위에 오르자 진나라로 왔다. 여담으로 왕흘의 군대는 염파가 격파했다.
자초의 할아버지인 소양왕은 무려 50년이나 왕위에 있던 중에 죽었다. 그 뒤를 이어 태자 안국군이 즉위하여 효문왕이 되었으나, 그 역시 이미 상당히 고령이었던 까닭에 왕위에 오른지 1년도 안 되어 급사하였다. 결국 효문왕의 태자였던 자초가 그 뒤를 이어 즉위하여 장양왕이 되었다.[14] 이리하여 여불위는 서자 출신인 데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의하여 조나라에 볼모로 보내졌던 떨거지 왕족[15]을 당시 중원 제일의 강국이었던 진의 왕으로 만드는 가히 기적적인 활약을 하였다.
장양왕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여불위에게 하남과 남양 땅의 10만 호를 하사하여 문신후로 봉했을 뿐 아니라, 진나라 승상으로 임명함으로써 보답하였다. 승상의 직위에 오른 여불위는 덕분에 진나라 정계의 실세로 떠오르게 되었으며, 한 순간에 중원의 정세를 좌지우지할만한 위치의 고관대작으로 거듭났다. 요약하면 당시 약소국이었던 위나라 상인으로 태어나서 왕이 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던 왕족의 일원을 진왕으로 옹립하였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재상이 되어 막대한 명예와 부를 거머쥐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여불위는 비록 상인 출신이었으나 비범한 통찰력과 수완을 지닌 인물이었다.

2.3. 상방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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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에서 발굴된 꺾창으로 상방 여불위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장양왕은 즉위한 지 약 3년 만에 죽었고, 여불위가 바쳤던 여인 조씨와 장양왕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그 뒤를 이었는데, 이 아이가 바로 훗날 중원 천하를 통일하여 전국시대를 종식시킨 '''진시황''' 정이다.
이를 두고 여불위가 나이가 어린 정을 빨리 왕으로 세워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두 왕을 독살했다는 설도 나돌았다. 야사에서는 영정이 실제로는 여불위의 아이라서 그랬다는 설이 있다.
아직 정이 어렸기에 여불위는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승상보다도 높은 상방(相邦)의 자리에 올라 진나라의 실세를 거머쥐었으며, 왕의 아버지와 다름없다는 의미로 그 칭호를 중보(仲父)라 하였다. 이렇게 엄청난 위세를 떨치게 된 여불위는 어린 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며 국정전반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나갔다.
한편, 남편인 장양왕을 잃은 진시황의 어머니인 조 태후는 본래 여불위의 첩이었기에 홀몸이 된 이후 자주 여불위를 찾았다. 여불위는 조태후와 자주 만나다가는 선왕의 태후와 간통했다는 혐의를 받을까 두려워서 자기 대신에 조태후를 만나줄 사람을 구했는데, 마침내 노애환관으로 위장시켜 조희에게 보냈다.[16] 노애는 양물이 컸고 정력이 대단하였기 때문에 조태후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후 조희와 노애는 사실상 연인 관계가 되었다.
한편 진나라의 실권을 손에 쥔 여불위는 많은 신하들을 포섭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한편, 여러 학자들과 도인들을 아낌없이 후원해주었다. 덕분에 여불위는 당대의 석학들과 대신들로부터 높은 평판을 얻어 그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다질 수 있었다.

2.4. 몰락과 최후


노애는 조태후와의 간통 끝에 아이를 둘이나 얻었는데, 그는 자신이 낳은 자식들을 진나라의 왕으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진시황에게 이러한 사실이 곧 발각되었는데, 노애는 사병들을 동원하여 수도 한복판에서 난을 일으켜 항거하였다. 그러나 진시황은 이에 침착히 대응하여 곧 반란은 어렵지 않게 진압되었다. 진시황은 노애를 비롯한 그의 삼족을 죽였으며, 노애의 가신들 또한 가산을 몰수당하고 촉땅으로 쫓겨났다. 조태후가 노애와 간통하여 낳았던 아이들도 모두 살해당했다. 분노가 극에 달한 진시황은 자신의 친어머니였던 조태후마저 옹에 유폐시켜버렸다.[17]
여불위는 이 반란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진 않았지만[18] 애초에 노애를 조태후에게 소개해준게 자신이었으며 여불위의 권력 자체를 불편하게 여긴 영정은 이 명분을 절대 헛되게 버릴 생각이 없었다. 결국 가짜 환관을 궁 안에 넣었다는 빌미로 영정은 그를 파면 - 사형 순으로 집행하고자 했으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 또한 많았기에 그들의 항소를 버티지 못하고 여불위를 상국에서 파면시키고 문신후 당시 하사받은 봉국 하남으로 쫓겨나는 것으로 사실상 중앙 정부와 단절시키는데서 처벌을 끝낸다.
다만 중앙정부에서 축출되었다곤 해도 이때까지 여불위의 명성과 인맥이 어디간 건 아닌지라 그 후 약 1년 정도는 각국의 제후들이 빈객과 사신을 보내 여불위에게 인사를 하러 왔고 이 소식은 당연하게도 영정의 귀에도 들어간다. 그 당시엔 여불위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힘을 무시할 정도로 강력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여불위를 하남으로 보내는 데서 그쳐야 했으나 그동안 중앙 정부를 사실상 장악하는데 성공한 영정은 이 건을 다시 책잡아 그와 그의 가솔들에게 촉 지방으로 파견가라고 명하고 여불위는 영정이 보낸 이 편지[19][21]를 받고 재기가 불가능하다는걸 깨달으며 독약을 마셔 자살한다.
여불위가 자살하기 전 평소 그를 충직하게 따르던 이사가 와서 그에게 여러 번 조정으로 돌아와 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했다고 하며, 그는 자신은 죽어서 왕이 되고 싶으니 땅을 왕관 삼아 머리가 아래로 향하도록 수직으로 몸을 세워 몸의 반만 묻어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훗날 한무제는 지금의 윈난 성 지역(운남성)을 정복하면서, 여불위가 추방된 이후에 촉 지역에 모여살던 여씨들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아예 현 이름에 여불위 이름까지 붙여주기도 하였다.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운남 태수였던 여개도 이런 여씨 일족 중의 한 명이다.

3. 평가


그저 맨 손에 아무것도 없었던 떨거지 왕족을 일국의 왕으로 만들고, 자신도 일개 상인에서 한 나라의 실세를 거머쥔 정치 거물로 성장했다는 점을 보면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군주를 농락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하루아침에 모든 권력과 명성을 잃고 추락한 끝에 자결로써 비참한 최후를 맞았기 때문에 인격적으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예컨데 사마천사기 열전에 여불위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사마천은 그의 허무한 몰락을 논하며 "소위 이름만 알려진 자(所謂聞者)"라 평하였다. 이는 그 대단한 명성과 지위와는 대조적으로 그 행동은 올바르지 못한 간사한 자라는 말 정도로 해석된다.
다만, 이렇게 사후의 평이 박했던 것에 비해 생전의 평판은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불위 자신이 권력을 손에 쥔 이후로도 학자나 선비, 도인 등을 후원해주며 투자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당시의 지식인들에게는 꽤나 존경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여불위가 왕을 능멸하는 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석학들과 선비들이 목숨을 걸고 여불위를 변호한 덕분에 일단은 관직에서 물러나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여불위가 당대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던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다.[22][23]
사실 여불위가 장양왕을 만든 킹메이커이긴 했지만 그 뒤로는 눈에 띄는 업적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진시황은 어찌되었든 간에 영걸이라 할 만한 인물이라 중원의 통일을 노렸지만, 여불위는 태생이 상인 출신이라 현상 유지를 원했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노애의 반란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진시황과 여불위는 대립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양왕의 즉위에 크게 기여한 일이나 여씨춘추 편찬 등에 관련된 일화를 볼 때에 정치적인 수완이나 안목은 분명 뛰어난 편이었으나, 결국 한 나라의 재상으로는 얼마나 탁월한 인물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여불위 개인의 능력이 평이 어땠든, 황태후노애와 멋대로 놀아나도록 둔 시점에서는 무조건 죽어야만 했다. 점괘를 조작한 것을 통해 기군망상죄를 저지른 것도 모자라, 왕실에 잡된 피가 흐르게 하고 족보가 꼬이게 하였으니,[24] 부계혈통승계를 중시하고, 행여 시정잡배의 씨가 왕이 될까 두려워 고자들을 환관으로 삼던 당대의 기준으로는 대역죄 중의 대역죄를 저지른 것이다. 하물며 그런 비행이 노애의 반란이라는 최악의 형태로 발각되었으니 아무리 부왕을 잘 모셨다 해도 죽어 마땅한 것이었다.
황태후의 치정사건은 진왕 영정의 혈통을 뒤흔드는 중요한 문제였다. '조희가 시집온 후 12개월이 지나 영정을 낳았기에, 생물학적으로 영정은 여불위의 자식이 될 수 없다.'라는 의견이 있으나, 사실 12개월 이상 임신하다 애를 낳은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며,[25] 사실 임신 기간은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왕실에서 이것이 문제가 안 되는 것은 구중궁궐 안에서 고자인 환관들과 궁녀들의 철통감시 속에 있기 때문에 궁에 있는 여성들이 바람을 피우는 것이 차단되기 때문인데, 황태후가 노애와 통정하여 아이까지 있고 그 과정에 최고위 신하인 여불위가 적극 개입한 것은 그 믿음을 뿌리채 흔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간략하게 표현하면 '구중궁궐 안에서도 애 낳을 정도로 놀아날 정도로 음탕한데, 심지어 다른 나라에 살던 때라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 아닌가?'라는 의심을 할 수 있게 된다.

4. 그 외에


사마천사기에 의하면 여불위는 애첩을 자초에게 주었는데, 그녀는 훗날 진시황의 생모인 조희다. 이 때문에 진시황의 친아버지가 여불위라는 설이 있다. 자신의 자식을 임신한 여성을 남에게 주는 일이 전국시대에 종종 있었기 때문에[26][27] 사마천 시기까지만 해도 정설로 받아들여진 듯 하지만, 확실한 역사적 증거는 없으니 어디까지나 카더라일 뿐이다. 많은 창작물에서도 십중팔구 이 가설을 채용하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여기기 쉬운데,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다만, 중국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 거리가 된 것은 사실이며, 현대에 이르어서는 대체로 정통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일부러 만든 이야기로 추정한다고 한다. 그럴만도 한게 열전의 기록도 '조희가 영자초과 혼인한 뒤 12개월 뒤에 자식 영정을 낳았다.'는 기록으로 되어있는데 혼인 후에 사통한 것이라면 몰라도 의학적으로 진시황이 여불위의 자식이 되는건 불가능하다. 거기에다가 사마천은 같은 사기 안에서도 공식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본기의 시황제편에서는 시황제는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현재로 비유하자면 백과사전인 여씨춘추라는 책을 편찬했다. 막대한 자금을 들여 수많은 석학들을 동원하여 지었는데, 무려 20여 만 개의 단어를 수록하였다고 한다. 여불위는 이 여씨춘추에 큰 자부심을 가졌는지 책이 완성된 후 그 책에서 한자라도 더하거나 빼면 천금을 주겠다고 하였다고 전한다. 오늘날 '일자천금(一字千金)'이란 사자성어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조나라 한단에서 이인을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인 '기화가거(奇貨可居)'라는 사자성어도 유명하다. 진귀한 보물은 제 때 잡아야 한다는 뜻.
성산, 함양, 성주 여씨 족보에서는 여불위를 자신의 선조로 취급한다. 자세한 것은 여(성씨) 항목 참조.

5. 대중문화 속의 여불위



5.1. 만화킹덤



5.2.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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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13
삼국지 12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 능력치는 72/42/88/89 전법은 진시황과 같은 '''전공격강화'''
삼국지 13에서는 통솔만 조금 높은 문관A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능력치는 전작과 같고. 전법은 정보교란 특기는 상업9 / 농업5 / 문화8 / 교섭8 / 언변8 로. 내정 혹은 사신용으로 자주 활용하게 된다.

5.3.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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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무장으로 등장. 병종은 책사계고 성우는 홍후백이다. 성능면에서 평가는 좋지 않은 편.

5.4. 만화 《달인전 ~9만리를 바람에 타고~》


진의 재상이 되기전 젊은 시절의 상인모습으로 등장한다. 조선시대 선비를 연상하게 하는 특이한 복장에 망건을 착용하고 조선식 흑립을쓰고 있다. 주인공 일행과 조우하여 짧지만 강한 인상을 보여주며 위기에 처한 주인공 일행을 구명 해주고 헤어지며 그를 목격한 점술가 그를 보고 차갑고 푸른뱀이 늑대항문으로 파고들어 뱃속에 들어가 입으로 뚫고 나오며 을 태어나게 하는 환상을 보게 된다.

5.5. 대진제국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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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제국 시리즈 4편 대진부에서 진시황 영정과 더불어 또 다른 주인공으로 봐도 될 정도로 가장 비중이 큰 인물로 등장한다. 진장양왕 영이인을 데리고 탈출시키는 모습으로 첫등장. 이후 효문왕의 왕비인 화양태후와 담판을 지어 영이인을 진나라 태자로 만드는 데 성공하고, 이후 영정조희 모자가 조나라에서 돌아와서 영성교를 지지했던 화양태후와 진나라 종친들로부터 굴러들어온 돌 취급을 받을 때 이들 모자의 든든한 후원군이 되어주어 사실상 영정의 실질적인 아버지 역할까지 해줬을 정도. 이 때문에 초중반까지 영정은 이러한 여불위를 자기 친아버지보다 더 아버지처럼 따랐다. 또한 영정의 어머니 조희와도 노애가 장신후로 봉해지기 전까진 거의 부부급 케미를 선보이며 정치적 동맹도 구축한다. 하지만 주변의 제후국들을 싸그리 멸망시켜 어떻게해서든 천하통일을 이룩하고 싶어하는 영정과 달리, 여불위는 장사꾼 출신이다보니 비교적 체제의 안정을 추구했던지라 천하통일 사업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면서[28] 점점 이 둘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생겨나게 되며, 극 중 여불위가 본인의 권력유지를 위해 영정과 영성교 사이를 이간질해서 영성교를 제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다, 영정의 관례의식과 친정선포날도 멋대로 연기해버리는 등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면서 주변의 적들이 늘어나자 결국 영정은 이러한 여불위를 견제하고자하는 차원에서 본래 본인의 적과도 같았던 영씨 종친들과 손을 잡게 되고 역으로 어그로를 끄는 노애를 이용해서 여불위도 세트로 제거할 기회를 옅보게 된다.
게다가 본인이 꽂았던 노애가 점차 본인못지 않은 권력을 갖게 되면서 자신의 충고도 듣지않고 어그로를 끌게 되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껴 독단적으로 노애를 죽이려고 했지만[29] 자신의 애인이었던 조희는 역정을 내면서 노골적으로 노애를 비호하고 심지어 같이 노애를 싫어하던 영정마저 싸늘한 반응을 보이자 눈물을 흘리면서 본인이 사실상 이들 모자에게 토사구팽당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나중에 노애가 함양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 관례의식을 치루기 위해 옹성에 가있던 영정이 파발을 보내 지금 당장 노애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을 내려 군대를 이끌고 반란 진압에 기여한다. 하지만 노애조희에게 꽂았다는 사실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피하지 못하고 결국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떠난다. 이 소식을 들은 조나라 진영에서 몰래 여불위를 포섭하는 데 시도하지만, 이러한 조나라의 포섭시도를 보면서 조나라와 내통했다는 오해를 사게 되고 자신이 살아있으면 영정과 진나라의 앞날에 방해만 될 거라고 깨달으면서 결국 자살하는 걸로 생을 마감한다.
기본적으로 노련한 장사치출신답게 주변 인물들을 다루는 솜씨가 능하며 정적들에게도 품위를 유지하며 필요에 따라 손을 잡는 인물로 묘사된다. 주로 능글맞은 표정을 지을 때가 많고 필요에 따라서는 은근히 애교(...)도 부릴 정도. 게다가 거물 정치인답게 멘탈도 강하고 임기응변에도 능한 편인데, 자신을 위해 큰 공을 세운 감라가 영정에게 개죽음을 당하자 그 시신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는 당황한 눈치를 보였으나 곧바로 멘탈을 다잡고 “감라는 오만방자하여 대왕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죽음으로 그 죄를 다스리는 것은 옳은 줄로 압니다”라고 말하여 영정의 불편한 심기를 겨우 갈아앉힌다. 사실 영정이 감라를 제멋대로 죽인 건 단순히 꼴리는대로 행동한 게 아니라 자신과 상의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벌리지 말라고 여불위에게 보내는 '''경고'''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자기보다 훨씬 어린 영정을 너무 애취급한 게 나중에 본인의 발목을 잡게 되는 요소로 작용하는데, 생각보다 영정은 여불위의 생각 이상으로 야심과 권력욕이 장난 아닌 인물이었기 때문. 하지만 영정도 여불위와 미운 정 고운 정 다 주고받은 사이라 헤어질 때도 최대한 예를 갖추면서 헤어지고[30], 나중에 여불위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역정을 내면서 진심으로 슬퍼하기는 했다.
연기한 배우는 초한전기한신으로 유명한 단혁굉(段奕宏).
[1] 사기의 기록[2] 전국책의 기록[3] 혹은 기원전 292년 ~ 기원전 235년까지 살았다고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4] 참고로 이름은 영주고, 안국군은 군호다.[5] 훗날에 이름을 자초(子楚)로 바꾼다.[6] 사실, 당시 초강대국인 진나라가 조나라에 인질을 보낸 것도 그저 조나라를 안심시켰다가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렇게 조나라를 기만한 것이 밝혀지면 조나라에 인질로 간 영이인이 보복처형을 당했을 것이다. 이는 이인이 죽든 말든 소양왕이나 안국군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당시 영이인은 그 정도로 존재감도 영향력도 없는 처지였다.[7] 이 때 이인과 여불위가 남긴 대화가 의미심장하다. 이인을 만난 여불위가 "제가 공의 집을 성대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라 말하자 이인은 “그대의 집이나 성대하게 만드시오.”라 일갈했다. 그러자 여불위가 "저의 집은 공의 집이 성대해진 뒤에야 비로소 성대해질 수 있습니다"라 말하자 그의 말에 흥미가 생긴 이인은 비로소 여불위와 뜻을 함께 하기로 했다고 한다. [8] 여불위는 이인에게 투자를 하기 전 역시 뛰어난 상인이었던 아버지를 찾아가 물었다. '농사를 지으면 몇 배를 남길 수 있습니까?' '열 배를 남길 수 있다' '보석상을 하면 몇 배를 남길 수 있습니까?' '백 배는 남길 수 있다' '그럼 한 나라의 왕을 만들면 몇 배를 남길 수 있습니까?' 그러자 여불위의 아버지는 '그건 계산이 안 되는구나' 라고 답했다. 이 말은 너무 이익이 커서 계산할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자 여불위는 '제가 그 일을 하려고 합니다. 저는 천하를 수확할 씨를 뿌리겠습니다'라고 답하고 전 재산을 이인에게 투자했는 일화도 있다.[9] 다만 조희가 실제로 무희였고, 여불위의 첩이었을 것이라는 내용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 여불위열전에서는 조희가 조나라 부잣집의 딸이었으며 그 덕분에 자초가 진나라로 달아났을 때에도 숨어서 살 수 있었다고 전하는데, 아마도 제법 부유하고 세력있는 집안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본다 이를 조합해보면 '여불위가 자신의 첩을 자초에게 심기위해 일개 무희로 속였다'가 된다.[10] 사기 여불위 열전에 기록된 바로는 五百金[11] 여불위의 사람 보는 비범한 능력을 알 수 있는 부분으로, 보통 사람이 사람을 판단할 때에는 그 사람 개인의 자질만을 보고 판단하지만, 여불위는 그 사람의 자질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이 어떤 이득을 창출해낼지 간파하여 이인을 지목한 것이었다. 즉, 이인이 아닌 다른 안국군의 다른 아들을 골라서 만들어도 상관이 없었던 것인데 저런 볼모로 잡힌 상황까지 이용해서 이인을 왕으로 만든 뒤 벌어질 자신의 입지까지 도모한 것이다.[12] 한나라 때의 1근은 233g인데, 전국시대에도 같았다면 황금 오백 근은 오늘날의 kg단위로 환산하면 황금 139.8kg에 달한다. 참고로 지금처럼 1근이 6백 그램이 된 건 송나라 때다.[13] 2011년 4월의 금 시세로 환산해서 약 '''29,585,203,200원(!!)'''에 달하는 가치가 있는 양이었다. (<전쟁의 역사 3>, 남문희 저, 휴머니스트)[14] 나중에 장양왕의 아들인 진시황은 장양왕을 태상황제로 추증했는데, 그의 휘인 자초가 초나라의 초와 같다는 이유로 피휘하기 위해서 초나라를 뜻이 같은 한자로 형(荊)나라로 바꿔 부르게 했다. 그래서 사기에는 초나라가 형나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초나라의 별칭으로 형나라로 부르기도 한다.[15] 오죽했으면 장평대전에서 조괄이 큰 실수를 저질러 백기한테 크게 당하고 수많은 병사가 생매장 당했을 때도 조왕은 그를 화풀이로 삼아 죽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죽이지 않았다.[16] 이렇게 환관으로 위장한채 궁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험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후로 환관이 승진을 하려면 자신이 고자가 되기 전에 달고 있었던 양물을 방부처리해서 보관하다가 상관에게 보여줘야 했다.[17] 그러나 후에 신하들이 뜯어말린 덕분에 어머니에게 더 이상 해를 가하지는 않았고, 다시 함양의 궁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18] 여불위는 그냥 색에 빠져버린 조태후가 자신한테 엉겨붙는 게 귀찮아서 적당히 밤일이나 즐기며 살라고 노애를 소개시켜줬을 뿐이지 '''반란 일으키라고 소개해준건 '절대' 아니었다.'''[19] 이 때 편지내용이 그 당시 시대상으론 매우 모욕적이었는데, 영정 본인의 아버지를 왕위에 올리는 것 빼곤 아무것도 못한 주제에 니가 뭔데 나에게 '상보'라 불리냐며 비난했다. 말그대로 왕을 세운것 만으로도 큰 공이고 영정의 킹메이커가 되어준 것까지 고려하면 노애 건 하나때문에 책잡혀 이렇게 밀려버린 여불위 입장에선 울화가 터질 수준.[20] 단순히 정을 통한 정도가 아니라 다른 남자를 소개해주고 애까지 낳은 데다가 반란사건까지 일어났다. 이미 1단계에서 목숨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없었다.[21] 하지만 원래 킹메이커라는게 이런 자리긴 하다. 더구나 태후와 정을 통한 건 여불위도 마찬가지고 거기다 노애 건은 고작이라는 말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대형 사고[20]였고. 원래는 죽지 않은게 더 신기한 수준이었다.[22] 이는 그가 전국사군자를 따라하면서 많은 식객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식객들과 자신의 부를 통해 만든 것이 바로 여씨춘추라는 책으로 여불위가 이 책을 만든 뒤 이 책에서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빼는 자에게는 만금을 주겠다고 한 것으로 유명하다.[23] 사실 여불위 본인의 능력과 별개로 이렇게 많은 이들의 변호를 받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데, 당장 영이인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화양부인을 구워삶고 이인에게 조의 명사들을 섭외하라고 조언한게 여불위이다. 즉,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방법과 인맥의 힘에 대해 잘 아는 인물이었던 것. 당연히 재상 시절에도 이런 인맥관리를 철저히 했을테니 그에게 신세를 진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변호했을 것이다. 사실 말이 상인이지 저 정도 규모의 상인이면 오늘날로 따지면 거물 사업가인데, 사업가에게 인맥은 어떤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24] 노애가 영정의 새아버지가 된 꼴이다.[25] 'Beulah Hunter'라는 사람이 '''375일''' 임신한 공식 기록이 있다 무려 12개월 10일. 타임지.[26] 대표적으로 춘신군의 몰락. 춘신군은 이원의 여동생을 임신시킨 후 그녀를 초나라 고열왕에게 바쳤다. 후사가 없던 고열왕은 이원의 여동생을 왕후로 세웠는데, 그녀가 쌍둥이 형제를 낳자 매우 기뻐했다. 이 형제는 초나라 고열왕이 죽자 유왕애왕으로 각각 즉위했는데, 유왕은 요절했고 그의 동생 애왕은 그의 이복형인 부추(초나라 마지막 왕)에게 피살되었다. 근데 갑자기 이복형이 등장하는 걸 보면 고열왕에게 다른 친자식이 있었던 듯하다.[27] 당연하지만 왕의 아들이라도 어미의 출신이 미천하면 왕이 되는 데는 애로사항이 꽃피는 경우가 많고 당연히 적통과 서얼이 있으면 적통을 우선순위로 두게 마련이다. 이원의 여동생이 낳은 아들들은 혈통 문제는 있지만 그걸 아는 놈은 없고 엄연히 왕후에게서 나온 아들이므로 부추보다 적통으로서는 훨씬 낫다.[28] 극 중 영정은 들뜬 목소리로 여불위에게 '''“저는 천하통일을 어떻게 해서든 이뤄내고 싶어요! 중보(仲父)께서도 저랑 같이 통일에 힘써주실꺼죠?”'''라고 물어볼 때 여불위는 미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정치는 신에게 맡기시고 대왕께선 공부에 힘쓰십시오”'''라고 돌려서 사실상 거절한다. 하지만 정작 영정은 이러한 여불위의 말을 자신의 의견을 동의했단 식으로 자기멋대로 해석한다(...)[29] 원래 최대한 중립을 지키며 관망만 하는 입장을 고수했으나 노애가 영씨 왕족들을 상대로 어그로를 끌어버리다 영씨 종친들의 수장인 관내후까지 죽어버리는 대형사고가 일어나 영씨 종친들이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들고 일어서게 되자 나서게 된 것[30] 다만 정작 함양을 떠날 때 배웅나가지는 않고 대신에 자신의 갓난아기 아들 부소을 보내 마지막으로 인사를 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