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 스타젤

 

'''윌리 스타젤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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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 헌액자'''
[image]
'''윌리 스타젤'''
헌액 연도
1988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82.4% (1회)

'''1979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데이브 파커
(피츠버그 파이리츠)

'''윌리 스타젤'''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키스 에르난데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마이크 슈미트
(필라델피아 필리스)

'''1979년 월드 시리즈 MVP'''
버키 덴트
(뉴욕 양키스)

'''윌리 스타젤
(피츠버그 파이리츠)'''

마이크 슈미트
(필라델피아 필리스)

'''1979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
스티브 가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윌리 스타젤
(피츠버그 파이리츠)'''

매니 트렐로
(필라델피아 필리스)

'''1974년 메이저 리그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
알 칼라인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윌리 스타젤
(피츠버그 파이리츠)'''

루 브록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79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들'''
[image]
잭 니클라우스

'''윌리 스타젤 & 테리 브래드쇼'''

미국 아이스하키 대표팀


<colbgcolor=#000000> '''피츠버그 파이리츠 No.8'''
'''윌버 도넬 "윌리" 스타젤
(Wilver Dornell "Willie" Stargell)
'''
'''출생'''
1940년 3월 6일
'''사망'''
2001년 4월 9일
'''국적'''
[image] 미국
'''출신지'''
오클라호마주 얼스보로
'''신체'''
190cm, 102kg
'''포지션'''
좌익수, 1루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 입단'''
1959년 피츠버그 파이리츠 자유계약
'''소속 구단'''
'''피츠버그 파이리츠(1962~1982)'''
'''수상'''
'''7회 올스타 선정 (1964~66, 1971~1973, 1978)
NL MVP (1979)
2회 월드시리즈 우승 (1971, 1979)
월드시리즈 MVP (1979)
NL 챔피언십 시리즈 MVP (1979)
2회 NL 홈런왕 (1971, 1973)
NL 타점왕 (1973)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 (1974)'''
1. 소개
2. 생애
3. 플레이 스타일
4. 명예의 전당 입성과 사망
4.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5. 이모저모


1. 소개


'''Pops'''[1]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1970년대를 호령한 거포이자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만 21시즌을 보낸 프랜차이즈 스타로 파이리츠 역사상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이다.[2]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통산 성적은 21시즌 동안 타율 .282, 출루율 .360, 장타율 .529, 475홈런, 2232안타, BB/K 0.48, wRC+ 145, 1540타점을 기록했다.

2. 생애


윌리 스타젤은 1940년 오클라호마주 얼스보로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적 부모가 이혼하면서 고모를 따라 플로리다주로 이주했다. 그러다 성장 후 모친과 같이 살기 위해 캘리포니아주 앨러미다로 이사했다. 엔시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59년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계약하고 마이너리그에 입성했다.
마이너리그 시절 인종차별로 인해 백인 선수들과 같은 숙소에 머무르지 못하고 흑인들만 머무르는 열악한 숙소를 사용해야 했고 텍사스주에서 경기할 때는 경기를 뛰면 사살하겠다는 협박까지 받은 적이 있었다. 물론 경기를 강행했고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인종차별 경험들로 인해 야구를 그만둘까 고민까지 했었지만 친구들과 야구 스카우터였던 밥 저크의 편지로 인해 용기를 얻어 선수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22세였던 1962년에 데뷔해 10경기를 소화하고 본격적인 풀타임 시즌으로서 1963년을 맞이했지만 .243 .290 .428 11홈런 47타점을 기록했으며 만족스럽지 못한 시즌을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4년부터 1970년까지 투수 친화적인 홈구장을 사용하면서도 20홈런 이상을 기록하고 올스타에도 선정되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다.
1971년 새로운 구장에서 뛰게 된 스타젤은 .295 .398 .628 48홈런 125타점을 기록하며 내셔널리그 홈런왕이 되었지만 MVP 투표에서는 조 토레[3]에게 밀려 2위에 그쳤다. 포스트시즌에는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팀은 월드 시리즈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꺾고 우승했다. 1972년에는 .293 .373 .558 33홈런 112타점을 기록했고 1973년에는 .299 .392 .646 44홈런 119타점을 기록하며 다시 내셔널리그 홈런왕에 오르고 타점왕까지 되었지만 1972년에는 자니 벤치빌리 윌리엄스에게 밀려 3위에 그쳤고 1973년은 에게 밀려 2위를 기록했다.
이후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조금씩 하락세가 오던 중이었지만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뒤를 이어 팀의 리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던 그는 1979년 팀을 이끌고 다시 한 번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하게 된다. 이 시즌 피츠버그 파이리츠는 Sister Sledge의 명곡 "We Are Family"에서 얻은 별칭 "The Family"로 통했고 39세의 노장이었던 스타젤은 가족의 가장같은 존재였다. 이 시즌 그는 .281 .352 .552 32홈런 82타점을 기록하며 팀을 이끌어 나갔고 키스 에르난데스와 공동으로 내셔널리그 MVP에 올랐다.[4] 포스트시즌에서도 맹활약하며 내셔널리그 챔피언쉽 시리즈 MVP에 올랐고 월드 시리즈에서도 4차전까지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1승 3패로 몰려있던 상황에서 당대 최고의 잠수함 투수이자 불펜 에이스 켄트 테쿨브의 3세이브 맹활약과 함께 스타젤도 최종 7차전에서 팀의 우승을 결정짓는 결승 홈런을 포함해 12타수 4안타 3홈런 7타점을 기록하는 수훈으로 월드시리즈 MVP에도 올랐다. 키스 에르난데스와 함께 정규 시즌 MVP를 공동수상했던 스타젤은 챔피언십 시리즈 MVP와 월드 시리즈 MVP까지 한 시즌에 모두 휩쓴 최초의 메이저리그 선수라는 진기록을 남겼다.
이후 3시즌을 더 보낸 그는 1982년을 끝으로 은퇴하게 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당대 메이저리그 최고의 파워 히터로 190cm에 가까운 큰 키와 100kg이 넘는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500ft 이상의 초대형 홈런(tape messuring home run)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공과 함께 투수의 존엄까지 날려버린다'''라는 극찬이 나올만큼 그의 홈런은 다른 선수들의 홈런과 격이 다르다는 평가를 받았다. 스타젤이 전성기를 보낸 1960~70년대는 투고타저가 가장 극심한 시기였으며 당시 중앙 펜스까지의 거리가 130m을 훌쩍 넘어가는 대형 구장들이 여러개였을만큼 현대의 구장들에 비해 평균적인 크기가 더 커서 홈런 생산에 매우 불리했다. 그럼에도 스타젤은 당시 내셔널 리그 구장의 최장거리 홈런 기록을 절반 이상 가지고 있을 정도로 까마득히 날아가는 초대형 타구를 전매특허처럼 보여주곤 했다.[5] 특히 파이어리츠의 과거 홈 구장인 포브스 필드#는 내셔널리그에서도 외야가 가장 넓었으며, 중앙 펜스까지 거리가 무려 135m에 달하고 좌/우측 펜스가 각각 110m, 114m인 매머드급 구장이었다.[6] 스타젤은 여기서만 장외 홈런을 7개나 때려내며 파워와 비거리에 있어서는 바로 앞세대였던 미키 맨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포였다. 따라서 통산 홈런왕 2회와 475홈런 기록만 보고, 거포로서 스타젤을 평가절하할 수 없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스타젤이 당대 평균적인 크기의 구장에서 선수 생활을 했더라면 통산 600홈런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으로 평한다. 또한 극심한 투고타저 시대와 대형구장 크기로 인한 불이익 등 여러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1970년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홈런[7]을 날린 선수가 스타젤이라는 점이 위의 평가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4. 명예의 전당 입성과 사망


은퇴 후 1988년 82.4%를 기록하며 명예의 전당에 첫 턴으로 들어갔다. 1999년부터 건강에 이상이 왔고 PNC 파크가 개장하던 2001년 4월 9일 향년 61세에 신장병으로 사망했다.

4.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윌리 스타젤
17
125
106
44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Left Field (15th)

career WAR
7yr-peak WAR
JAWS
윌리 스타젤
57.5
38.0
47.7
좌익수 HOF 입성자 평균
65.2
41.5
53.3

5. 이모저모


  • 스타젤은 리더십으로도 유명한 선수였다. 클럽하우스 내에서 스타젤은 실력과 인망 모두 가장 의지가 되는 큰 형같은 존재로서 팀의 구심점을 이루는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때문에 스타젤이 있던 당시의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를 상징하는 단어는 The Family. 1979년도 월드 시리즈 우승 당시 피츠버그 감독을 맡았던 척 태너는 "스타젤과 함께 플레이하는 것은 마치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것과 같다"는 표현으로 그가 팀에 서 차지했던 위상을 설명한 바 있다. 이를 상징하는 사연으로 스타젤의 별(Stargell's Star)이 있는데 스타젤은 그 날 경기에서 활약한 팀의 선수들에게 마치 부모가 아이에게 칭찬 스티커를 주듯 자신이 손수 만들어 온 노란색 별을 나눠 주었다. 선수들은 스타젤이 준 별을 받으려고 치열하게 경쟁했고 자랑스럽게 모자에 붙였다. 가끔 스타젤이 깜빡할 때면 해당 선수가 스타젤을 찾아가 왜 내게 별을 주지 않냐며 애교 섞인 항의를 하는 일도 벌어졌다. 스타젤의 별이 피츠버그 선수들의 모자를 가득 메우자 피츠버그는 아예 별이 달린 모자를 만들었고 이것은 그를 상징하게 되었다.
  • 스타젤은 선행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는 팬들에게 스스럼 없는 동네 아저씨처럼 다가가고 언제나 푸근한 미소와 함께 팬 서비스로 피츠버그 시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존재였다. 그가 홈런을 치거나 팀이 승리할 때마다 본인이 시내에서 운영하는 닭고기 식당에서 팬들에게 아낌없이 무료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가난하고 어려운 아이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해주고 사인을 요청하면 늘 환한 미소로 답해주는 등 친절한 선수였다. 그는 1974년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 2020년 현재 시점으로 피츠버그 최후의 40홈런 타자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때가 1973년...


[1] 동네 아저씨를 뜻하는 단어로 윌리 스타젤은 피츠버그의 어린 선수들에게 자신을 아저씨라고 부르게 했다고 한다.[2] 단, 최고의 타자라고 하기에는 살짝 애매모호 한 것이 피츠버그에서 뛴 역사상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인 '''호너스 와그너'''가 있기에 파이리츠 최고의 타자라는 것이 애매하기는 하다. 다만, 호너스 와그너는 데드볼 시대 선수이므로 라이브볼 시대만 보았을때 파이리츠 최고의 타자는 스타젤이기 충분하다.[3] 뉴욕 양키스의 왕조를 이끈 그 감독님 맞다.[4] 1979년 팬그래프에 따르면 가장 뛰어난 선수는 fWAR 8.8을 기록한 J.R. 리차드였지만 키스 에르난데스는 fWAR 7.4였고 윌리 스타젤은 고작 fWAR 2.7에 불과했다. 그러나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기 때문에 MVP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5] 21세기인 현재 한 시즌에 두 세번 나올까 말까한 150m짜리 홈런이 터질 때 마다 화제가 되곤 하는데 스타젤은 500ft(152.4m) 이상 홈런을 밥먹듯이 때려댔다. 스타젤은 초대형 구장으로 유명한 포브스 필드에서 장외홈런 7개, 베테랑스 스타디움에서는 550ft 홈런을 기록하며 이를 기념하는 깃발이 세웠졌고, 당시 투수 친화적인 구장이었던 다저 스타디움에서 2개의 장외홈런을 기록했는데 하나는 주차장을 직격했다. 또한 몬트리올 올림픽 스타디움 역대 최장 비거리인 535ft 관중석 상단 초대형 홈런, 스리 리버스 스타디움 최상단 홈런 4개 등 초대형 홈런에 관한 전설적인 기록들을 가지고 있다.[6] 현재 KBO, MLB, NPB 홈구장들 중에서 그라운드 크기로 손에 꼽히는 잠실구장의 중앙펜스 거리가 125m, 좌/우측 펜스 거리가 100m다.[7] 296개로 1970년대 홈런 1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