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니 벤치

 

'''자니 벤치의 주요 수훈 /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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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리그 올센추리 팀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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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자니 벤치
Johnny Bench
'''
'''포지션'''
'''포수'''
'''}}}#ffd700 득표수}}}'''
'''}}}#ffd700 1,010,403}}}'''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
'''1975'''
'''1976'''



'''명예의 전당 헌액자'''
[image]
'''자니 벤치'''
헌액 연도
1989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96.42%''' (1회)

'''1970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윌리 맥코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자니 벤치
(신시내티 레즈)'''

조 토레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72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조 토레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자니 벤치
(신시내티 레즈)'''

피트 로즈
(신시내티 레즈)

'''1968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신인왕'''
톰 시버
(뉴욕 메츠)

'''자니 벤치
(신시내티 레즈)'''

테드 사이즈모어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피트 로즈
(신시내티 레즈)

'''자니 벤치
(신시내티 레즈)'''

레지 잭슨
(뉴욕 양키스)

'''1968 ~ 1977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포수 골드 글러브'''
랜디 헌들리
(시카고 컵스)

'''자니 벤치
(신시내티 레즈)'''

밥 분
(필라델피아 필리스)


<colbgcolor=#c6011f> '''신시내티 레즈 No. 5'''
'''자니 리 벤치
(Johnny Lee Bench)
'''
'''생년월일'''
1947년 12월 7일 (76세)
'''국적'''
[image] 미국
'''출신지'''
오클라호마 주 오클라호마 시티
'''포지션'''
포수, 3루수, 1루수[1]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65년 드래프트 2라운드 전체 36번 (CIN)
'''소속팀'''
'''신시내티 레즈 (1967~1983)'''
'''수상'''
'''2× World Series Champion (1975,1976)
World Series MVP (1976)
14x All-Star (1968~1980, 1983)
2x NL MVP (1970, 1972)
10x NL Gold Glove Award (1968~1977)
NL Rookie of the Year (1968)'''
2x NL Home Run Leader (1970, 1972)
3x NL RBI Leader (1970, 1972, 1974)
1. 개요
2. 선수 경력
3.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5. 여담
6. 관련 문서


1. 개요


[image]
미국의 신시내티 레즈 소속 前 야구선수이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포수[2]이자 오로지 신시내티에서만 뛰면서 1970년대 신시내티 최고의 전성기인 빅 레드 머신의 주역으로 활약했던 선수이다. 아직까지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포수 중에서 그보다 더 많은 득표율을 기록하고 입성한 선수는 없으며 그의 등번호 5번은 당연히 신시내티 레즈의 영구결번으로 채택되었다.

2. 선수 경력


어린 시절부터 엄친아의 자질을 타고 났다. 고등학교에서 야구와 농구를 병행했을 뿐 아니라,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것. 공부의 길을 선택하기보다는 야구의 길을 선택해 1965년 신시내티의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문했다.
1967년 맛보기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은 이후 본격적으로 팀의 주역으로 발돋움 하기 위해 준비한 1968년의 스프링캠프에서 대타자 테드 윌리엄스가 방문하게 된다. 윌리엄스는 벤치의 훈련 모습을 보고 재능을 알아보았고 '''"To Johnny Bench, a Hall of Famer for sure." (미래의 명예의전당 입성이 확실한 자니 벤치에게)'''라는 싸인볼을 건낸 일은 유명한 일화. 그리고 테드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1968년 골드글러브 및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70년대 신시내티의 최전성기인 "빅 레드 머신"의 주역으로 활약하면서 두 차례 리그 MVP를 수상했다. 1970년에는 45홈런 148타점을 기록하면서 홈런+타점왕, 내셔널리그 MVP을 획득함과 동시에 팀을 월드시리즈에 올려놓았고, 1972년에는 40홈런에 125타점을 기록하면서 2번째 홈런+타점왕과 내셔널리그 MVP를 수상했으며 팀 역시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다만, 이 때는 각각 볼티모어 오리올스[3]오클랜드 어슬레틱스에게 지면서 월드시리즈 우승은 좌절되었다. 이후 1974년에도 129타점으로 3번째 타점왕에 올랐다.
하지만 그 뒤로 조 모건. 피트 로즈, 데이브 콘셉시온, 토니 페레즈 등과 함께 맹활약하며 마침내 1975년과 1976년 신시내티의 월드시리즈 2연패의 주역이 되었다. 특히 1976년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4]를 만나 0.533 타율과 무수한 도루 저지를 기록하며 양키스를 농락해 0-4 스윕 패배의 치욕을 안겼다. 이런 월드시리즈에서의 맹활약으로 인해 월드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76년은 벤치가 부진한 시즌 중 하나였다. 근데 부진하다는 성적이 '''16홈런 74타점'''에 도루수마저 개인 최다이자 2년연속 두자릿수인 13개를 찍었는데 도루사가 2개뿐이라서 성공률이 무려 86%(...)[5] 게다가 타율은 비록 .234로 부진했을지언정 볼넷을 많이 얻어냈기 때문에 출루율은 무려 1할 넘게 높은 .348이었다. 장타율이 4할을 못 넘겨서 OPS는 .750을 넘진 못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포수로써는 뛰어난 공격력이다. 어느 리그에서나 공격력이 뛰어난 포수는 진귀해서 수비까지 좋으면 곧바로 주전행이고 비록 수비 등에 약점을 보이는 문제가 있어도 지명타자, 1루수 등으로 포지션을 바꾸면서까지 쓰려고 하는데, 이런 성적을 찍고도 부진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면 벤치가 얼마나 뛰어난 선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부상으로 인해 포수 자리에서 점점 밀려나 결국 포지션을 바꾸게 되었다. 특히 무릎 부상이 심했고, 결국 말년에는 다른 포지션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 포수부분에서 딴 골드글러브만 10개이자, 1968년부터 1977년까지 10년 연속 수상을 달성했다. 이 기록은 이반 로드리게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역대 최다 수상 기록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벤치가 포수 자리에서 일찍 물러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너무 일찍부터 포수를 봤기 때문이었다. 포수라는 포지션 자체가 체력적으로 힘들고 무릎, 허리 등 각종 부위에 무리가 많이 오기 때문에 타 선수보다 빨리 찾아온 고질적 부상때문에 포수를 일찍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미 어릴 때부터 포수를 맡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포수로서 성숙한 능력을 보여줬다. 특히 공을 일곱개나 쥘 수 있었다는 무시무시하게 큰 손이 장점. 또한, '''현대야구의 포수 수비 스킬을 집대성한 선수가 자니 벤치이다.''' 야구 역사상 최초로 지금과 같은 형태의 포수 미트를 사용해 한 손으로 투구를 받는 포구자세를 기본기로 완성했다. 벤치 이전까지는 미트가 잘 접히지 않았기 때문에 양손으로 포구를 해야했는데,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악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동양권의 포수들 중 양손으로 포구하는 포수들도 제법 있었다. 자니 벤치 본인은 한 손 포구자세를 처음 시도한 선수는 랜디 헌들리(시카고 컵스 출신의 명 포수이자 공갈포로 유명했던 토드 헌들리의 아버지)라고 밝힌 적이 있다. 단 벤치가 이것을 완성해 메이저리그에서 전파했기에 벤치의 공적도 무시할 수 없다. 이덕에 도루 저지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10년 이상 주전포수로 활동했던 역대 선수들 중 통산 3위에 해당하는 43.5%의 도루저지능력을 보였다.
여기에 포수로서는 전성기 시절 최고의 타격과 타고난 어깨, 수석 졸업의 명석한 두뇌까지 합쳐지면서 일찍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 증거로 흔히 뽑는 사람만 계속 뽑는다는 수비 부분의 평가인 골드글러브에서 신인으로 수상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통산 389홈런 1376타점을 기록했는데, 홈런은 은퇴 시점에서는 포수로서 기록한 것만 세었을 때 역대 1위(326개)였다. 벤치에게는 대선배였던 요기 베라 한명만의 기록으로 남아 있던 포수 300홈런을 처음으로 넘어선 후배이기도 하다[6]. 다만 그 후 칼튼 피스크(포수 시절 : 351개, 통산 376개))와 마이크 피아자(포수 시절 : 396개, 통산 427개)가 차례로 경신하면서 현재는 역대 3위. 무엇보다 수비력과 공격력을 동시에 갖춘 포수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자세한 정보는 김형준의 MLB '가장 완벽했던 포수' 자니 벤치.

3.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자니 벤치
20
93
214
45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Catcher (1st)

career WAR
7yr-peak WAR
JAWS
자니 벤치
75.0
47.1
61.0
포수 HOF 입성자 평균
53.4
34.4
43.9

4. 자니 벤치 상


항목 참조.

5. 여담


  • 총 4번 결혼했다. 3번 이혼한 후 2004년 결혼한 4번째 아내 사이에서 두 아들을 얻었다. 2020년 11월 벤치는 아들들의 대학 진학에 도움을 주기 위해 자신의 선수 기념물품 중 일부를 팔았다고 밝혔다. 1976년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는 12만 5000달러에 낙찰됐고, 1983년 마지막 홈런 타석에서 쓴 배트는 8만달러, 직접 낀 포수 미트는 6만5000달러 등을 기록했다. # 경매로 얻은 전체 금액은 약 200만 달러에 달했다. 그런데 후에 밝혀진 사실은 이 중 100만 달러 가량의 금액은 자니 벤치의 친구가 낙찰을 받아서 지불한 금액이었다. 그 이후 그 친구가 자니 벤치 본인에게 1976년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를 포함 자신이 낙찰받은 물건을 모두 돌려줬다는 훈훈한 결말로 마무리가 되었다고 한다.[7]

6. 관련 문서



[1] 어릴 때부터 상당히 오랫동안 포수를 봤던 탓에 무릎 건강이 크게 나빠져 1981년부터 은퇴할 때까지 3루수와 1루수를 보게 된다. 경기 출장 및 소화 이닝은 3루수가 더 많긴 하나 3루 필딩율만 봐도 .929로 3루수로서는 최악이었다.[2] 물론 칼튼 피스크, 마이크 피아자, 이반 로드리게스 같은 선수들이 나오긴 했지만 벤치의 득표율을 넘지 못했고, 무엇보다 벤치는 16년 밖에 선수 생활을 하지 않았고, 극강의 투고타저 시절에 뛰었기에 높게 평가받는다.[3] 볼티모어의 3루수였던 브룩스 로빈슨이 대활약했던 시리즈로 당시 레즈의 감독이었던 스파키 앤더슨은 '로빈슨이 꿈에 나타나 그라운드의 흘린 자신의 휴지까지 1루로 잽싸게 집어던졌다.'라고 말할 정도로 엄청난 수비를 보여주었다.[4] 당시 요기 베라가 양키스의 코치였다.[5] 참고로 전년도인 1975년의 도루기록은 11도루 '''0도루사''', 즉 '''성공률 100%'''였다(...)[6] 요기 베라 309홈런. 자니 벤치 이전에는 요기 베라에 비견할 포수 후배가 안 나오고 있었다.[7] 사실 벤치는 이번 경매가 있기 얼마 전에 이 경매를 주관하는 경매 소장과 저녁식사를 할 자리가 있었는데, 이 때 소장이 슬쩍 '내놓은 물건 중에 가장 애착이 있는게 무엇이냐'고 물었고, 이를 벤치의 친구에게 알려줬다고 한다. 알고보니 이 경매소는 애초에 그 친구가 주선한 것이었고, 처음부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친구인 벤치에게 소중한 물건을 되돌려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친구는 실제 경매에서 예상가보다 더 높은 금액으로 불러 벤치가 애착을 갖는 물품을 싹쓸이하며 친구에게 소중한 추억을 다시 돌려주는 선택을 했다. 이 중에서는 예상 낙찰가보다 최대 5배 가까이 많은 돈을 지불한 것도 있었는데, 이렇게 지불한 총 금액이 1백만 달러를 넘는다고. 지난 1967년, 푸에르토리코에서 우연히 알게 되어 시작된 인연의 배려에 벤치는 눈물을 흘렸고, 벤치는 이 물품을 명예의 전당 등에 나누어 기증하기로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