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소(유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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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송의 비정통 황제. 송문제 유의륭과 문원황후(文元皇后) 원씨(袁氏)[1] 의 장남이다. 자는 휴원(休远).
2. 행적
원가 3년(429년) 5월, 태자로 봉해졌다. 초기에는 평판이 좋았으나, 점점 평판이 낮아지고 과실이 많아서 유의륭은 원가 30년(453년) 정월, 태자 유소를 폐하고 둘째 아들 시흥왕 유준(劉濬)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게 이들에게 알려지게 됐고, 이에 분노한 유소와 유준은 무당 엄도육 등과 함께 옥으로 유의륭의 모습을 조각하여 함장전 앞에 묻고 저주했다.
그러나 이 행각이 발각되어 땅에 묻었던 옥인형과 저주 편지들이 발견되자 유의륭은 대단히 노했다. 이듬해 정월, 도망친 엄도육이 유준의 집에 숨어있다는걸 알고 유의륭이 그를 내놓으라고 했으나 거절당하자 그들을 처리할 결정을 세웠는데, 태자 후보를 면접보느라고[2] 오랫동안 미루며 매일밤 처남 상서복야 서담지와 의논만 했다. 그 와중에 반숙비[3] 가 이 사실을 그들에게 알렸으며 결국 2월이 되자 유소는 조서를 위조하여 1,000여 명을 이끌고 황궁에 쳐들어갔다.
그날 밤도 유의륭은 서담지와 날이 밝을 때까지 폐립에 관한 일을 의논하느라 잠자리에 들지 않았는데, 유소의 심복 장초지가 칼을 들고 오는 것을 보자 책상을 들고 막았으나 결국 칼에 맞아 다섯 손가락이 모두 절단된 뒤 살해되었다. 이것은 '''중국사 최초로 태자가 황제를 시해한 패륜'''이다.[4] 물론 군주인 아버지를 아들이 죽이는 일은 이미 춘추전국시대 때는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진시황이 황제로 칭하고 나서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그 와중에 반숙비는 반란군에게 살해당하였다.(...)
유소는 스스로 황제에 즉위해 태초(太初)라는 연호를 쓰며 3개월 동안 제위에 있었다. 그는 보병 교위 심경지에게 밀명을 내려 무릉왕 유준(劉駿)을 살해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심경지는 유준과 함께 유소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에 이복 동생이자 유의륭의 6남 경릉왕 유탄[5] , 무제 유유의 6남으로 유준의 숙부인 형주 자사 남군왕 유의선, 옹주 자사 장질, 사주 자사 노상 등도 함께 유소 토벌에 나섰다. 결국 유소는 4월 신정에서 유준에게 격파되었으며, 5월 건강에 입성한 유준에 의해 본인과 시흥왕 유준 모두 목숨을 잃었고 시체는 저잣거리에 그대로 내걸렸다.
동시에 그의 처이자 잠시동안 황후였던 은씨(殷氏)[6] , 왕씨(王氏)[7] 는 물론 아들이었던 태자 유위지(劉偉之), 유적지(劉迪之), 유빈지(劉彬之), 이름 불명의 아들, 딸까지 처자가 모두 멸문지화를 당했다. 황제에 즉위한 효무제 유준은 이들을 채찍으로 때리고 독주를 부어 몰살해버렸다.
3. 평가
유소는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아인 데다가 재위 기간이 짧아 황제의 시호, 묘호 그런 거 없다. 거기다 태자였지만 당연히 태자 시호 역시 받지 못했다. 정통 태자이자 대립 황제였지만 정통성이 없는 반역을 일으켜 비정통으로 평민 또는 그 이하로 강등된 사례이다.
애초에 황제가 되려고 아버지를 시해한 것도 아니고 폐태자가 될 위기에 앙심을 품고 저주하다가 걸려서 결국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어 어쩌다가 황제가 된 경우이다. 이처럼 황제가 되면 뭘 어떻게 할지 가이드 라인이나 마스터 플랜도 전혀 없었고 아버지를 시해하고 즉위해 정통성도 전혀 없었으며 기반도 다져지지 않고 안정이 안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동생을 제거하려다가 역관광을 탄 케이스이다. 그래서 정사 <송서>와 <남사>에서는 본기 대신 열전에 들어갔는데 그것도 '''원흉(元兇)''' 소(劭)로 기록되어 역사적 심판을 받았다.
4. 둘러보기(계보)
[1] 이름은 원제규(袁齊嬀).[2] 4남 유삭, 6남 유탄, 7남 유굉. 이 셋은 모두 제명에 죽지 못했다.[3] 시흥왕 유준의 생모.[4] 이 사건은 유소가 무능한 정치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보여준다. 권모술수에 능하다면 유의륭을 살리고 허수아비로 만든 뒤 합법적으로 양위를 받아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5] 유의륭이 후계로 점찍었던 아들이었지만 유의륭의 죽음으로 인해 태자가 되지 못했다.[6] 이름은 은옥영(殷玉英).[7] 이름은 왕앵무(王鸚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