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익

 

1. 개요
2. 설명
3. 논란


1. 개요


대한민국의 역사학자이며, 제12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국내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이승만 연구의 권위자이다.[1]

2. 설명


4.19 혁명 세대로 원래는 이승만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본래 그도 젊은 날에는 이승만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6.25전쟁을 겪는 중에 장성들이 군수물자를 빼돌리는 바람에 민방위군으로 징집된 국군 사병들이 대거 아사하거나 다치게 되는 국민방위군 사건을 보면서 이승만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서울대를 졸업하고 4.19를 겪으면서 완전히 反이승만의 입장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미국의 하버드대에 유학하면서 동양사를 공부하던 중 우연히 하버드-옌칭 도서관에서 청년기 이승만이 저술한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읽고 그의 개혁사상과 국제정세에 대한 식견에 큰 충격을 받아 이승만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학위논문으로 이승만을 연구하지는 않았다. 이승만이 박사학위를 받은 프린스턴 대학교를 방문해 학적부 등 주요 자료를 살펴보고자 했는데, 당시 한국에 있는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의 동의 서명서를 받아야 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까지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갑오경장, 동학농민운동, 갑신정변 등에 대해서 연구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받았다. 그리고 1993년 말에 이승만의 양자인 이인수로부터 이화장에 있는 10만 여 장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이승만 및 한국근현대사 관련 사료를 기증받고 연구를 시작했는데 열악한 연구 여건과 비용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중 이건희 삼성 회장을 찾아가 50억원의 연구자금을 기부 받고, 최송옥이라는 한 독지가도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소재한 자신의 저택을 이승만 연구를 위해 써달라고 연세대에 기부하게 된다. 그래서 1997년 연세대학교에 현대한국학연구소가 설립되어 이 곳에서 연구를 수행했다. 2011년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이 연세대학교 현대학국학연구소에서 분리, 독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영익 교수의 연구성과를 읽고 싶으면 『젊은 날의 이승만』부터 시작해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건국대통령 이승만』, 『이승만 연구』 등의 저서들을 차례대로 올라가는게 좋다. 유영익의 저작들을 읽고 다시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의 『우남 이승만 연구』와 고정휴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의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를 읽으면 한국 역사학계에서 논의되는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비판적인 평가에 대해 고루 알 수 있다.
고려대학교, 한림대학교, 연세대학교 교수, 한동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하였으며 고려대 강만길 교수가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해임 당했을때(1984년 복직) 그 빈자리를 메운적이 있다.

3. 논란


한동대 석좌교수로 재임 중이던 2012년 2월 9일 당시 서울 정동제일감리교회에서 열린 ‘제12회 이승만 포럼’에서 강의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과 실정을 총체적으로 평한다면 적어도 ‘공7 과3’이고, 이승만의 독재는 불가피했다 혹은 필요악이었다라고 할 때는 그게 ‘공9, 공10’이 될 수도 있어요. 저는 이승만 대통령은 확신을 가지고 자기가 하는 일종의 권위주의적 통치가 불가피하고 오히려 한국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믿고서 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역사에 이승만만 한 인재는 거의 없지 않았는가. 이승만은 그 세종대왕 하고 거의 맞먹는 그런 유전자를 가졌던 인물 같아요", "정치학자들이 정직하게 후진국에서 독재라는 것에 대해 사실상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 하는 논의를 좀 해주기 바랍니다"라는 등의 발언을 한 사실이 보도되어 논란이 되었다.*
종교적으로도 기독교(특히 개신교) 편향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1996년 8월에 한국논단에 기고한 '리승만 : 그는 누구인가 - 세목에 철저하며 거시적판단 구비한 업적자'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한성감옥에 갇혀 있을 때 기독교로 개종하고 동료 정치범 40여 명을 개종시켰다며 이를 "한국 개신교 선교 사상 획기적 사실"이라고 하는가 하면 "짐승과도 같은 저열한 상태에 빠진 한국민을 기독교를 통해 거듭나게 할 목적으로 신학 공부를 곁들여 했다"고 썼다. 2005년 3월 30일에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열린 제9회 '영익 기념강좌'에서는 '이승만과 한국의 기독교'를 주제로 강연을 하면서 "(이 전 대통령이) 6년 동안 감옥 생활 중에 성경을 공부하면서 깨달은 바가 컸다. 그것은 한국이 독립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한국 사람들의 도덕적 수준이 낮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2] 그러나 조선의 개신교 신자가 매우 소수에 불과한 당시에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40여 명에게 기독교를 전파한 일은 한국 개신교의 입장에서 획기적 사실인 것은 맞기 때문에 그냥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한 것이며 이게 논란이 될 일은 아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인들의 의식 수준이 당대 다른 서양 강국들과 비교하여 매우 낮았던 것 또한 (듣는 현대 한국인들의 기분이 나쁜 것과는 별개로) 사실이고 이승만은 이를 계몽시키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크게 틀린 말이라 하기는 어렵다. 당시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민중계몽 운동이 활발했는데 만약 조선인들의 의식이 높았다면 그런 민중계몽 운동이라는게 필요했을 이유가 없다.
2013년 외아들(당시 41세)이 병역기피 목적으로 국적을 포기했으며 한국콘텐츠진흥원 로스엔젤레스 지사 입사에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1] 이승만 연구의 권위자로는 유영익 전 국사편찬위원장을 포함하여 그의 제자 오영섭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연구교수, 그리고 고정휴 포스텍 교수,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 홍선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위원 등이 꼽힌다.[2] 참고로 이 기사는 중국의 쑨원이나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에 비견될 만한 사상가로 한국엔 이승만이 있었다는 의미로 한 유영익의 발언 중 맥락을 무시하고 의도적으로 한국에서 인식이 좋지 않은 이토 히로부미 부분만 강조하여 기사 타이틀로 다는 등 상당히 의도적으로 작성되어 있다는 점에 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