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카 도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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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초대 영부인.
2. 생애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 교외의 Inzersdorf에서 1900년 6월 15일에 태어났다.[4] 빈상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영국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가서 영어통역사와 타자-속기사 자격을 취득했다. 1920년 독일의 자동차경주 선수 헬무트 뵈룅과 결혼하였으나 곧 이혼하였다. 이후 1933년 2월에 스위스 여행 중 제네바에서 이승만을 만나[5] 이듬해인 1934년 10월에 뉴욕에서 이승만과 결혼했다.[6] 이승만 역시 이때는 전처 박승선과 이혼한 이후였으므로, 두 사람 모두 재혼이었다.
이승만과 함께 미국에서 살다가 광복 후 대한민국으로 왔고,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첫 번째 영부인이 되었다. 이때 한국에서는 외국인 영부인이라고 하여 화제를 모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오스트레일리아와 혼동해서[7] 그녀를 '''호주댁'''이라고 불렀다. 그 덕분에 6.25 전쟁 당시 UN군 전투기는 영부인 친정에서 지원 보내줬다면서 F-86 세이버, F-80 슈팅스타, 글로스터 미티어 등을 통틀어 '''호주기'''라고들 불렀다.[8]
영부인이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관련된 자질구레한 일을 직접 하며 수발을 드는 등 매우 헌신적인 아내였다. 하지만 고령인 남편의 신변을 지나치게 염려한 나머지 이승만의 심기를 거스를만한 모든 인물과 정보를 차단하는 '''과잉내조'''로 이승만의 정치적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는 부정적 평가도 받고 있다.[9]
특히 프란체스카는 한국어에 서툴러 남편과도 영어로 대화했다. 늘 통역을 필요로 하여 영어에 능숙했던 박마리아와[10] 의존관계가 형성되다보니, 박마리아의 남편이자 무능했던 이기붕이 이승만의 최측근이 되고 박마리아 부부의 장남 이강석이 이승만의 양자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의사소통이 어려워 가깝게 지낸 한국인이 많지 않았기에, 프란체스카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도 세간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우연히 만난 오스트리아인이 "당신은 오스트리아 사람인가요?"라고 묻자 "난 한국 사람입니다. 우연히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을 뿐"이라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고 하며, 서양인이면서도 한복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11][12]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下野)한 후, 이승만을 따라 하와이로 갔고, 그의 임종을 지켰다. 이승만 사후에는 고향 오스트리아로 잠시 돌아갔다가 1970년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한국에서는 이화장에 있는 그녀의 양자인 이인수 부부의 집에 거주했다. 정동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매주 금요일 李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며 조용히 생활하였고, 노태우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청와대를 방문하기도 하는 등 한국 최초 퍼스트 레이디로 예우 받았다. 한국명은 이부란이며[13] , 한국에 귀화한 뒤에는 정식 이름이 되었다. 1992년 3월 19일 만 91세를 일기로 이화장의 집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고, 3월 23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 국립서울현충원 이승만대통령묘소에 합장되었다.
3. 저서
-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프란체스카가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부터 중공군 참전 이후 UN군이 남쪽으로 철수하는 1951년 2월 15일까지 쓴 일기가 있는데 그 일기를 엮어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라는 제목으로 시중에 책이 나와있다.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6.25 전쟁 발발 당시 이승만의 행적, 카투사 제도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 고위층 자식들의 병역기피, 부유층들의 일본행 등 당시의 사회상도 볼 수 있다.
-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
4. 여담
- 자동차생활 잡지 1984년 10월호[14] 에서는 프란체스카와 그 며느리가 같이 기사에 나왔는데 이승만 대통령 생전 당시 직접 운전하였으며 사후에는 며느리와 같이 장을 보기도 하였다고.
- 그녀의 9촌 조카인 에르빈 프뢸은 1996년부터 2017년까지 총 21년간[15] 니더외스터라이히(Niederösterreich, lower austria) 주지사를 역임했고, 10촌 종손인 요제프 프뢸은 오스트리아의 전 부총리였다.
- 이승만과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1934년 결혼 당시 두 사람 모두 재혼이었고, 이미 이승만은 50대 후반, 프란체스카 도너는 30대 중반으로 임신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힘들어지는 연령대였다. 이강석, 이인수는 모두 양자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강석, 이인수 참조.
[1] 귀화 전 이름은 Franziska Donner이다. 귀화 후에는 남편이 지어준 '이부란(李富蘭)'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2] 대한민국의 역대 영부인 중 두 번째로 장수한 영부인이다. 첫 번째는 향년 96세의 이희호다.[3] 배우자인 이승만 前 대통령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4] Donner는 동유럽 유대인(Ashkenazic Jew)의 성이다. Millett 논문에 따르면 여러 대 위의 집안배경이 유대인이다.[5] 당시 프란체스카와 어머니가 제네바의 한 호텔 카페에 들렸다가, 빈 테이블이 없어서 이승만과 합석하게 되었다. 훗날 프란체스카의 어머니는 "이승만이 점잖아 보이는 노신사라서 합석했는데 내 딸과 결혼하게 될 줄 몰랐다."라고 회고했다.[6] 프란체스카 (한국민족문화대백과)[7] 사실 이는 외국에서도 흔히 하는 실수이다. 오스트리아에서 왔다고 하자 다른 사람이 오스트레일리아로 잘못 알아듣고 "캥거루 있어요?"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는 주로 오스트레일리아를 호주로 더 많이 부른다. 오스트리아의 음차는 오지리다. 여담으로 현재 주한오스트레일리아 대사관과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관 모두 종로 교보빌딩에 있다.[8] 참고로 오스트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독일에 흡수되었다가 패전 후 연합군에 분할되어 군정을 받는 중이었다. 1955년에야 영세중립국이 되는 조건으로 독립을 되찾았기 때문에 6.25전쟁 당시에는 군대 자체가 없었다.[9] 사실 이 당시에는 동서양 가릴 것 없이 전세계적으로 가부장제가 팽배했던 시대다. 게다가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게르만 문화권은 유럽에서도 가부장적이기로 유명했다.[10] 박마리아는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한 경험이 있어 영어를 잘 했다.[11] 한국경제 (2020.03.23) : 프란체스카 한복과 이리자 패션[12] 월간조선 (2001) : 秘話 발굴 프란체스카, 내 남편 李承晩은 이런 사람이었다[13] 이승만 前 대통령이 아내를 위해 지어준 두 가지 이름 중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이금순. 출처 - 연합뉴스 (2015.10.08.) : <역사속 오늘> 25살 연상의 이승만을 사랑한 '호주댁'[14] 정확히는 2013년 10월호에서 30년전 기사와 광고를 다시 보여주던 것.[15] 오스트리아에서 최장기간 주지사를 역임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