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카와 히데키
1. 개요
일본의 물리학자이다. 중간자 이론을 제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2. 경력
1907년 도쿄(현재의 미나토구 롯폰기)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의 직장관계로 얼마 지나지않아 교토로 이사하여 쭉 그곳에서 자랐다. 아버지 오가와 타쿠치(小川琢治)[2] 는 지질학자로, 전쟁통에 전사한 막내를 제외하고 타쿠치의 아들 4형제가 모두 대학 교수를 지냈다.[3] 제3고등학교를 거쳐, 1929년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했고 1938년 오사카제국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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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노벨물리학상 시상식에서)
1939년부터 1970년까지 교토대학의 교수로 재임하였고 재임 중인 1949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이는 일본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 기록이었다. 그렇기에 유카와 히데키는 교토대학에서 자랑하는 유명인사이다.
1942년 일본 해군 주도로 아라카쓰 분사쿠(荒勝文策)가 지휘하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인 F 연구에 참여하였다. F 연구는 육군이 주도한 니고 연구와는 별개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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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아인슈타인(왼쪽)과 함께)
은퇴 후에는 여러편의 에세이를 쓰고 물리학 저널 Progress of Theoretical Physics를 편집하는 일을 했다. 또한 1955년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막스 보른을 비롯한 이들과 함께 공동선언자로 이름을 올리는 등 반(反)핵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기도 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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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발행된 기념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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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대학 기초물리학연구소(일명 유카와 관(館)) 앞에 세워진 흉상 )
3. 에피소드
- 196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도모나가 신이치로(朝永振一郎) 박사와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동창이다. 원래 도모나가가 1년 선배인데 유카와가 중학교 때 월반을 해서 동창이 되었다고. 도모나가는 라이벌 유카와가 먼저 노벨상을 수상하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 1970년대 최고의 게이샤였던 이와사키 미네코가, 마이코(견습 게이샤) 시절[5] 유카와 히데키 박사를 접대한 적이 있다. 이와사키 미네코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배움이 짧은[6] 어린 소녀였던 자신의 유치한 질문에도 차근차근 진지하게 설명해 주는 분이었다고.
[1] 현 도쿄도 미나토구, 1살 때 아버지 오가와 다쿠지가 교토 제국대학의 교수로 취임하자 가족이 교토로 이사했다. 사실상 고향은 교토인 셈.[2] 와카야마현 출신으로 본래 성씨는 아사이(浅井)[3] 장남 요시키(야금학, 도쿄대학 교수), 차남 시게키(중국사학, 교토대학 교수), 3남 히데키(물리학), 4남 타마키(중국문학, 교토대학 교수)[4] 이 선언에 서명한 11명 가운데 유카와와 아인슈타인, 러셀 등 10명이 노벨상 수상자였다.[5] 만 15살에 견습 게이샤인 마이코가 되었고, 만 21살 때 정식 게이샤가 되었다.[6] 교토의 게이샤들은 중학교까지만 졸업한 후 게이샤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