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문난적

 



1. 개요
2. 반박
2.1. 사실 관계의 오류
2.2. 학파간 갈등의 실체


1. 개요


유교(斯文)를 어지럽히는(亂) 적(賊). 정확히 말해서 주자의 해석을 벗어난 학설을 펼치는 사람을 비방할 때 쓰는 말.
구체적 용례는 성리학이 확실하게 자리잡은 이후에 나타난다. 흔히 조선 후기 성리학이 교조화되면서 노론 치하에서 반대 세력의 인물들이 사문난적으로 몰려 매장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사문난적 논란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고, 실제로는 다 정치적인 이유로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용한 것이지만 부작용으로 조선의 학풍을 더욱 보수적으로 만들었다.
숙종조에 송시열의 정적이었던 윤휴는 병자호란 전후로 북벌론으로 의기투합하여 송시열의 오랜 친구가 되었으나, <중용주해(中庸註解)>에서 주자의 해석 노선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송시열과 평소 여러 번 논쟁을 벌였다. 결국 그로 인해 단단히 삐친 송시열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지목되었다.
또한 박세당은 <사변록(思辨錄)>을 통해 기존 성리학을 비판하다 역시 사문난적에 몰렸고, 남인의 거두 미수 허목은 어찌 유학만이 진리라 할 수 있느냐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사후 사문난적으로 몰려 매장되었고, 소론의 대부였던 윤증 등이 주자학을 비판하다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에 몰렸다. 애초에 윤증과 송시열의 갈등이 서인의 노소론 분열의 시작이니 노론이 상대당들을 몰아내기 위해 썼던 스킬이라 볼 수 있다.

2. 반박


일본의 주자학 연구자인 미우라 구니오(三浦國雄, 1941년~)에서 시작된 이 논지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2.1. 사실 관계의 오류


대표적으로 사문난적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이 윤휴는 송시열이 사문난적으로 몰았기 때문에 사약을 받아 죽은 것으로 많이 알려져있지만, 윤휴가 사문난적으로 지목된 것은 '''효종''' 때인 1653(효종 4년)년이고 정작 사약을 받아 죽은 때는 경신환국, 즉 1680년이다. 이때의 죽음은 사문난적과 관계도 없다.(문서 참조.)
오히려 앞서 사문난적으로 몰린 후 관직으로 진출하려고 하자 송시열이 반대했는데, 남인은 물론 같은 서인까지도 능력있는 윤휴를 혼자 싫어한다고 해서 반대하느냐고 항의하여 송시열이 한발짝 물러섰다. 끊어진 관계는 복원되진 않았지만, 최소한 송시열은 이 시점에서 윤휴의 비판을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효종이 죽기 1년 전인 1659년(효종 10년)과 현종이 즉위한 1660년에는 아예 송시열이 그를 다시 천거했다. 이때 이유태는 윤휴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그를 추천하는 일은 중단할 것을 권고했고, 이후원은 그를 등용했다가 후에 화를 불러올 것이라며 반대하는 등 일부 서인의 반대 여론이 일었다. 심지어 이후원은 "공이 옛날에 윤휴가 주자를 공척한 것을 두고 배척하며 이단이라고 하였는데 이제는 세자로 하여금 이단의 학문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오?"[1]라고 말한 적도 있는데, 송시열은 "주자도 육상산을 극력 공박하여 이단이라고 하였지만 상산이 남강(南康)에 이르자 주자는 여러 문하생들로 하여금 상산에게서 강학을 듣게 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진실로 (옛날로부터) 이어받은 것입니다."[2]라는 말로 대답했다. 즉, 같은 당파의 여러 사람들이 말렸는데도 주자를 끌어오면서까지 강행했다는 것.[3]
이런 것을 보면 이 시기까지만 해도 송시열은 (그 속마음이야 어떻든) 윤휴를 인간적으로 비난하거나 적으로 돌린 것 같진 않다. 주자의 행적까지 끌고온 것을 보면 학문적인 이견 정도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태도는 이 직후의 일인 예송논쟁 초기까지도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에 이것이 정치적 이슈로 불어나고 나서야 송시열은 윤휴를 참적(讒賊), 적휴(賊鑴), 흑수(黑水)라고 멸시하기 시작했다. 윤휴와의 관계를 끊지 않았다고 송시열의 미움을 샀던 윤선거의 묘비명으로 불거진 송시열과 윤증과의 갈등도 현종 년간(1669년 이후)이다. 이것이 송시열과 윤휴, 그리고 윤증의 관계의 실체(선후 관계)다.

2.2. 학파간 갈등의 실체


우선, 조선 후기의 학자들 중에는 일본 유학의 경우처럼 성리학 그 자체를 부정하고 본격적으로 비판한 경우는 사실상 없다. 소위 실학자라 불리는 사람들도 성리학적 기반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이 아니다.
실제로 예송 논쟁 이전에는 그렇게 학파간의 갈등이 심각하지 않았다. 예컨데 남인의 거두 허목의 학설은 보다 온건했기에 김수홍이나 원두표, 유계 같은 서인들 일부도 지지하는 사태(?)까지 있었다. 남인들이 서인의 소현세자 일가 복권 주장을 '''효종을 부정하고 소현세자 정통을 부정했다'''고 정치공세를 한 뒤, 연이어 윤선도송시열의 예론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내부단속을 하기 전까지는 이들은 허목의 주장을 대놓고 지지하기까지 했다.
덧붙여, 윤휴와 허목의 학설은 지금 시각에서 보면 퇴보적으로 볼 수 있는 학설이기도 하다. 윤휴의 중용 주해의 논지를 간단히 정리하면 '''유학적 성인이 될 인물은 오직 군주에 국한되며 존비귀천의 사회구조를 실현하는 것이 예법이므로, 예법의 실천이 학문의 핵심이 된다'''라고 볼 수 있다. 옛 시각이든 지금 시각이든 '''까여도 싸다'''. 이는 유학적 성인의 소양이 모두에게 있다고 판단한 송시열에게 이 설은 말도 안되는 학설이었고 급기야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비판하게 된 것이다.
흔히 사문난적은 보수적인 견해를 유지하는 인물들이 신진적인 세력을 견제할 때 사용하던 스킬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조선성리학의 주축인 퇴계율곡의 학설만 봐도 주자의 견해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었다. 퇴계의 주리론은 주자의 기본 전제와 어긋나는 학설이고, 율곡은 "주자라도 틀린 소리를 하면 틀린 거다"라고 말한다. 조선 성리학에 대한 막연한 편견들은 대부분 조선 시대 문집을 읽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만연한 편견들과 달리 송시열이 주자의 '''의심가는 해석'''을 정리한 <주자대전차의>를 지었고 <주자어류소분>을 지어 주자를 독자적으로 '''재해석'''한 적도 있다.[4]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는 그가 갑인환국 이후로 귀양을 가서 윤휴가 전면에 나섰다가 숙종에게 찍혀 사사당하는 바로 그 시기였다. 결론적으로 송시열은 귀양 중이라 윤휴를 사문난적이라고 죽일 수도 없었다.
심지어 그 송시열도 주자의 학문적 한계를 인정한 적이 있었다.[5]
한 마디로, '주자의 해석과 다른 해석을 했다'라는 타이틀 때문에 '''실제 그들의 해석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윤휴, 허목, 박세당 등은 졸지에 개혁자가 되었고 그렇지 않은 송시열, 송준길 등은 졸지에 '수꼴'의 수괴로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덧붙여 흔히 이 시대에 대해 설명할 때 사문난적 문제를 들면서 성리학은 말 그대로 "학"(學)이 아닌 "종교(敎)"로서 변질된다고 설명하는 예도 있는데 역시 오류. 敎라는 글자에 종교성이 두드러지는 건 20세기 이후 용례다. 제국주의시대에 서양의 종교개념이 동양에 소개되며 섞여들여가게 된것. 이단이라고 양놈들 마냥 매달아 불지른게 아니다
[1] 公嘗斥尹之攻斥朱子而曰, 是異端矣. 今乃欲使世子學異端之學耶? - <송자대전습유> 권8, 오재이공유사[2] 朱子力攻陸象山爲異端, 而象山至南康, 朱子乃使諸生聽講於象山. 余今日事, 實有所受也. - <송자대전습유> 권8, 오재이공유사[3] 물론 여기에 대고 이후원은 "당신도 원래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면서 참 포장 쩌시내요."라고 깠다.[4] 이러한 일련의 학술적 활동들은 송시열 개인에게서만 끝난 것이 아니고 그 학맥 내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한원진의 <주자언론동이고> 또한 이러한 계통의 산물.[5] 특히 심성론에 있어서 미발(未發)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 이러한 태도를 보인바 있다.(안은수, 「尤菴 心性論의 특징과 의의 : 未發論을 중심으로」, 『조선의 주자학과 실학』, 혜안, 2009, 190~191쪽.) 관련 기록은 <송자대전> 권113에 있으며, 원문은 "前稟諸說, 多蒙印可, 自幸謏聞之不甚悖理矣, 惟未發之旨, 迄未相契, 豈前所稟者辭不達意, 以致如此耶? 朱先生於此, 亦不免前後異同."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