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슈트라이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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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순수성을 지키지 못하는 민족은 초라해질 것이다!'''
-1934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Julius Streicher(1885년 2월 12일 ~ 1946년 10월 16일)'''
1. 개요
2. 생애
3. 전범 재판
4. 사형 선고
5. 사형 집행
6. 기타


1. 개요


나치 소속의 언론인 겸 정치가.
반유대주의의 선봉자. 그가 창간한 잡지 '''돌격자(Der Stürmer)'''는 나치의 선전수단 중 가장 광범위하고 유대인에 대한 위험한 영향력을 끼치는 신문이 되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인륜에 대한 범죄를 인정받아 사형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2. 생애


그의 일생은 유대인에 대한 뿌리깊은 증오와 반목으로 점철되어있다.
1885년 2월 12일 슈트라이허는 플라인하우센에서 교사의 9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고, 자신의 어머니를 몹시 존경하여 "나의 유년기의 요새"라고 지칭할 정도였다.
1900년, 5살이 되던 때 그의 어머니는 한 유태인 상점에서 옷감을 주문했는데, 물건을 받고 보니 질이 형편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모욕을 당한 것에 크게 슬퍼했다. 그리고 마을 교회에 예배를 갔을 때 마침 신부님으로부터 유태인의 예수님 박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슈트라이허는 이 사건을 시작으로 유태인에 대한 분노와 새디스트적인 가학주의를 가지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1909년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전신이 될 좌익성향의 정당 독일민주당(Deutsche Demokratische Partei)에 입당함으로써 정치인생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 시기 그는 많은 독일 유태인들과 교류를 하면서 결국 유태인들은 근원적인 세균덩어리이자 악이라는 인식만 키우게 되었고, 자기 스스로도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자가 될 운명이었음을 시인하였다. 그는 1차대전에 참전하여 연락병으로서 1급 철십자훈장을 받았다. 종전 후 그는 극우 반유태인조직 <Deutschvölkischer Schutz und Trutzbund>에 적극 투신하여 독일 유태인들은 국가를 전복시키기 위해 볼셰비즘을 신봉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극우 정당을 전전하던 슈트라이허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것은 1921년 뮌헨에서 히틀러의 연설을 들은 뒤였다.

"나는 일찍이 그런 인물을 본 적이 없었다. 자정이 지나기전 세 시간 전부터 그는 땀에 흠뻑 적셔들여 열정을 토했다. 나는 그의 머리 주위에서 광휘를 보았고, 평범한 범인의 수준을 뛰어넘을 자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곧 그는 스스로 당을 해체하고 자신의 조직을 통째로 바치며 나치에 입당하였고 그간 함께했던 반유태조직의 동료들을 전부 나치당으로 이끌면서 히틀러의 신임을 얻었다. 1923년 그는 반유태주의 선동신문 <돌격자>를 발행하기 시작하였고, 그 해 말 뮌헨폭동의 선봉자로써 뮌헨 경찰서에 첫번째 총알을 발사한 나치당원이 되었다. 히틀러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슈트라이허를 신임하기 시작한다.
슈트러이허는 자신의 신문에서 철저하게 유태인들을 비난하고 매도하였고, 실업, 인플레이션 등이 모두 유태인들의 때문이라 했다. 그들은 부의 형평성을 이루지 않고, 그들의 종교는 부끄러운 것들을 가르치며 예수를 미워하지만 모순되게도 큰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성탄절은 좋아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의사나 법률가, 고리 대금업자, 무역상, 연예인과 같이 비교적 안일하고 특권적인 직업만을 가지고 농부, 석공, 공장 노동자 등의 생산적이고 육체적으로 고된 노동의 자리는 갖지 않으려 한다며 유태인들은 사실상 백인 노예 상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이 매춘업계의 90%를 차지하고 선정적인 내용의 영화와 출판물들로 이익을 얻는다고 주장하였다.
슈트라이허는 자신의 출판물인 돌격병에서 유대인들을 세균, 흑사병, 비인간적인 존재, 기생충, 공공의 적, 악마, 질병으로 취급하였고, 유대인들은 모두 절멸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런식의 억지 보도와 선동적인 묘사는 당연히 유태인들에게 비난받으며, 허위사실 유포로 5차례나 소송을 받고, 출간 금지 요청을 받기도 하였다. 슈트라이허의 만행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는데 반유대주의 사상 보급을 위해 <Der Giftpliz (독버섯)> 라는 어린이용 동화책까지 출판하기도 하였다. 동화책 전문 링크를 타면 볼수 있지만,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이 보기에도 잔인한 장면도 있다.''' 마지막 페이지에 자기 얼굴을 그려넣어 미화하는건 보너스.
이러한 구설수들과는 상관없이 <돌격자>의 발행부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고, 마침내 80만 부를 돌파하여 독일뿐만 아니라 2차대전 이후에는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등 점령지에서도 발행되기 시작했다.
언론인으로써의 명성 이외에도 정치적으로서의 입지는 전적으로 히틀러에 신뢰에 의해 유지되었는데 1929년에는 프랑켄 주 대관구장(Gauleiter)에 임명되어 프랑켄에서의 가혹한 통치로 '프랑켄의 지배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933년 나치가 본격적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 그의 행보는 점점 과격해져 유태인 상점들을 공격하거나, 유대교 사원들을 철거하도록 선동하였고, 1935년에는 유태인 탄압의 집결체인 뉘른베르크 법 통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가 프랑켄 주에서 발행했던 반유대주의 잡지 <돌격자>는 60여개 정도의 나치 관련 출판물들 중에서도 저질로 꼽힐 정도로 반유대주의적인 선동적이고 원색적인 내용들만 잔뜩 나와있던 덕택에 악명을 높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듯 히틀러의 전폭적인 지지와 나치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성공의 가도를 달리던 그의 발목을 잡게된 것은 다름아닌 그의 잡지에서 표현하듯 유대인 호색한이 기독교 처녀를 강간하고 다닌다는 선동을 하는 '''본인이 강간 혐의로 여러 번 체포 된 경력이 있으며''' 스스로도 유부녀 킬러임을 자랑(?)하고 다닐정도로 정신나간 인물이었다는 것. 그밖의 다른 기행들로는 가령 속옷 차림으로 나치당사를 활보한다든가, <돌격>에 괴링의 첫째 딸이 인공수정으로 태어났다는 오보를 냄으로써 나치당 내에서도 꺼리는 인물이 되었다. 개인적으로도 강간 이외에 아내와의 불화로 인한 간통, 도벽,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뒤따랐다. 괴링을 비롯한 많은 나치당 인사들은 슈트라이허에게 나치당원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므로 퇴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히틀러는 그의 충성심과 뮌헨 맥주집 폭동 때의 공적 때문에 내치는 걸 바라지 않는 듯 하였다.
그러다 결국 1945년 5월에 연합군이 들이닥치자 그는 자살을 고민하다 결국 그 대신에 자신의 여비서이던 아델레 타페(Adele Tappe)와 결혼한다는 뜬금없는 선택(!)을 하였고, 그렇게 1945년 5월 23일 핸리 피트[1]가 지휘하는 미군에 의해서 체포되었다. 그는 처음 붙잡혔을 땐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라 둘러대었지만 이내 금방 정체가 탄로가나 포로로 붙잡혔고 이후로는 줄곧 연합군 병사들이 자신의 옷을 벗기고 담뱃불로 맨발을 지지는 등 비인도적인 처사를 했다고 주장했다.

3. 전범 재판


슈트라이허는 나치가 행한 대량학살과 군사적 침공을 일으킨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그가 발행한 선동적인 인쇄물들로 인해서 유태인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었음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를 기소한 검사의 요지다.

'''"피고인은 반유대인 범죄의 물리적인 범행에 직접 관여한 정도는 비교적 낮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에서 피고는 직접적인 범죄보다 더 큰 죄를 지은 것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정부도 그들의 정책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없다면 대량학살정책을 시작하고 시행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을 교육하고 살인자들을 만들어내고 증오를 가르치고 증오를 주입하는 것(중략) 그것이 슈트라이허의 일이었다. (중략) 이런 범죄들은 피고나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중략) 그가 없었다면, 헤르만 괴링, 칼텐브룬너, 히틀러 같은 자들의 명령을 따를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전범으로서 체포당한 이후에도 끝까지 반유대주의적 얘기하기만 바빴다는데, 오죽하면 변호 측에서도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고 한다.

4. 사형 선고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슈트라이허는 전쟁 초기에 권좌에서 밀려나면서 홀로코스트나 전쟁 계획에 직접 가담할 수 없었다는 점을 들어 무죄를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그가 반유대주의의 확장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했다는 점을 들어 '인도주의에 대한 죄' 를 인정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원래 이 정도면 사형까지 가기는 무리였고 무기징역(종신형)정도면 적당했지만 연합국 측은 그가 나치 이념의 구성 및 선동의 핵심 역할을 했음을 고려하여 사형을 판결했다. 일종의 시범 케이스.
슈트라이허는 나치의 청소년 단체인 히틀러 유겐트의 창시자 쉬라흐와 더불어서 반인륜죄의 혐의로 유죄가 선고되었고, 사형 선고가 났을때도 과자나 처묵하면서 피식하며 비웃었다고 한다.

5. 사형 집행


슈트라이허는 1946년 10월 16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죽는 순간까지도 독이 바짝 올라있었다고 한다. 교수대에 오르기 직전에 '''하일 히틀러!'''라 외쳤고, 교수대 위에 올라서서는 '''오늘이 1946년 푸림 축일(부림절)이구만[2]'''이라며 썩소를 날렸다. 용수를 씌울 때는 '''언젠간 볼셰비키 놈들이 니들 목을 매달 거다!'''라고 저주했다고 한다. 집행 과정에서 소련 측이 고통스럽게 교수형으로 사형을 집행 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는데 우즈 상사 등 집행자 측에서 이를 받아들였고 줄 길이를 조절해서 다른 사형수들과 마찬가지로 고통스럽게 질식사하였다.[3]

6. 기타


  • 자녀로는 루터(1915년 출생), 알마르(1918년 출생)으로 위키백과에 의하면 2018년 기준으로 아직 생존중이다.
  • 뉘른베르크(영화)에서는 샘 스톤이 연기했는데, 그의 정신나간 모습이 훌륭하게 재현되어있다. 같이 재판받는 다른 전범들도 저놈은 진짜 미친놈이라고 하는 묘사가 종종 나온다. 해군제독 카를 되니츠가 역겹다고 할 정도.

[1] 미국계 유대인이었다.[2] 유대인 학살 계획을 세웠던 페르시아의 관리인 하만이 교수형당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3] 교수형은 대개 떨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즉사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