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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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서막'''
2. 부산진 전투의 전개
1592년 4월 13일, 일본은 조선에 침략을 감행하였으며 고니시 유키나가는 대장으로써 오전 8시경 쓰시마 섬의 이즈하라에서 자신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와 함께 700여척의 전선과 18,700명[3] 의 병력을 이끌고 오후 5시, 부산 절영도(絶影島)[4][5] 에 상륙했다.
왜군 병력 구성은 고니시가 이끄는 7,000 명과 그를 따르는 장수 소 요시토시 5,000 명, 마츠우라 시게노부 3,000 명, 아리마 하루노부 1,000 명, 고토 스미하루 700 명이었다.
부산진[6] 첨절제사 정발은 1592년 3월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길을 빌려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건네는 것을 보고[7]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껴 절영도에서 군사 훈련을 겸한 사냥을 하던 참이었다. 13일 대마도 쪽에서 대규모 선단이 접근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으나 이를 세견선으로 여기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선조실록에서는 사냥나간 정발이 경계에 실패해 적의 입성을 허용한 후 난전을 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기사인데, 원양에서 오는 대규모의 왜군 함대를 부산에서 툭 튀어나온 절영도에서 관측을 못할 이유가 없으며, 적어도 수평선에 왜선이 보이게 되면 세견선단 수준의 규모가 아니라는 것 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절영도에서 부산진으로 향하는 것이 원양에서 왜군이 오는 것(+ 왜군의 이함 및 전투준비시간)보다 빠를 수밖에 없다. 원균 급의 졸장이 아닌 한 성에 도달할 시간적 여유는 충분히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 할 수 있으며, 실제 정발은 원균과 달리 전사했다.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7일 갑오 2번째기사에서도 앞서 인용된 선조실록 26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다. 이러한 모순은 개전 초기 왜군의 쾌진격으로 인해 남부지방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현실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적선(賊船)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 첨사(釜山僉使) 정발(鄭撥)은 마침 절영도(絶影島)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발(撥)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8]
이후 인조, 효종 때에 편집된 선조수정실록에서는 당시 상황을 보다 자세히 묘사하고 있으며, 모순이 해결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튿날 아침 왜군 함대가 육지에 접근하며 조총을 쏘자 왜군의 침략임을 파악한 정발은 부산진 소속 전선 3척(전선(戰船), 방패선(防牌船), 중선(中船) 각 1척)을 자침시키는 한편 왜관에 남아있던 왜인 4명을 구금하고 백성들을 성안으로 소개시켜 농성 준비를 갖춘 다음 남문의 성루에서 날을 지새웠다. 그러나 부산진의 병력은 600여명에 불과했고[10] 피난민들을 합쳐서 겨우 천여명에 불과했다.부산 첨사 정발은 절영도(絶影島)에 사냥하러 갔다가 급히 돌아와 성에 들어갔는데 전선(戰船)은 구멍을 뚫어 가라앉히게 하고 군사와 백성들을 모두 거느리고 성가퀴를 지켰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성을 백겹으로 에워싸고 서쪽 성 밖의 높은 곳에 올라가 포(咆)를 비오듯 쏘아대었다. 정발이 서문(西門)을 지키면서 한참 동안 대항하여 싸웠는데 적의 무리가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나 정발이 화살이 다 떨어져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자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9]
1592년 4월 14일 새벽 절영도에서 밤을 지낸 고니시는 부산진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정발은 서문으로 옮겨가 궁수들을 이끌고 방어했다. 정발의 완강한 저항에 서문을 깨는데에는 실패한 왜군은 서문 밖의 높은 고지로 올라가 아래로 조총 사격을 퍼부었다. 조선군은 활과 각종 총포를 쏘며 맞섰다.[11]
가열차게 전개되던 왜군의 공격은 조선군이 부산진 성벽 밑에 뿌려 둔 뾰족한 마름쇠 때문에 아침 7시에 잠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왜군을 막아주진 못했고 잠시 물러나서 전열을 가다듬은 왜군은 10시에 다시 공세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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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발과 조선군은 힘써 싸웠지만 워낙 전력이 열세인데다가 배후 지원조차 받지 못해 오래 버티기는 힘들었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자 한 비장이 정발에게 성을 버리고 도망치자고 했지만 정발은 '''"성을 버리는 자는 베어버리겠다"'''며 결사 항전했다. 결국 12시쯤, 왜군은 부산진의 취약 지점인 북문을 돌파하여 밀려들었고 정발은 왜군에 맞서다가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이때 근접전으로 정발을 제압할 수가 없어서 조총부대를 불러와 겨우 쓰러뜨렸다는 일본측 기록이 있다. 한국에서의 낮은 인지도와 달리 당시 일본 측에선 굉장히 임팩트있게 기억되었던 모양이다.
왜군이 성내에 진입하자 2차례에 걸쳐 시가전이 벌어졌는데 단병접전에 익숙한 왜군은 큰 피해 없이 소수의 조선군을 무너뜨렸다. 정발과 함께 싸우던 이정녕과 중위장 장희식, 부사맹 이정헌 등은 전사하였으며 정발의 첩 애향은 자살하였고 그녀의 몸종인 용월, 기장 사람 신옥 등도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으며 부산진에서 싸우던 병사인 가은산 등 세 사람은 시체더미에 숨어있다가 고니시가 살육을 중지하자 항복하여 포로로 있다가 4월 17일에 풀려나고 왜군 점령지에서 탈출한 뒤 부산진 전투에 대한 것을 증언했다.
3. 부산진 전투 종료와 평가
반나절도 안되어 급박하게 이루어진 전투로 정확한 전개조차 파악이 안되었다. 광해군때에야 생존자 조사를 통해 비로소 그 전개가 난중잡록에 전하고 있다.
비록 비극적인 패전이긴 했지만, 후에 경상도 위무사[12] 황신에게 왜군 장수 마쓰라 시게노부[13] 는 "우리는 부산진 전투에서 좌절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며 프로이스의 기록에도 "거의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싸웠다",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히 높은 훌륭한 병사들"이라고 적고 있다. 정발과 부산진의 병사들, 그리고 백성[14] 들이 치열하게 맞서 싸웠고 별다른 저항이 없을 것으로 예측했던 왜군의 입장에선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하다.
이는 문화의 차이에서 기인하는데, 일본의 경우는 바로 직전까지만해도 중세 봉건 시대의 유럽과 비슷하게 국가 권력부터가 여러 갈래로 찢어져 있었고, 전투의 성격도 각자 권력을 가진 다이묘나 유력 가문들 간의 세력 다툼에 가까웠다. 따라서 한쪽이 전투에서 패하면 그것으로 전쟁은 종결되고, 패전 측의 영지나 주민들은 승전 측에 예속되는 것으로 보상이 이뤄지며 마무리가 되었다. 게다가 처벌도 패배한 당사자들 및 측근, 가신, 일가 위주로 진행될 뿐, 영지나 주민들은 승전 측의 것이 되기 때문에 완전히 말려죽일 의도가 아닌 이상은 건드리지 않았다. 따라서 말단급 병사나 백성들은 끝까지 항전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조선은 멀리 고려 시절부터 500년 이상 단일 정부의 국가였고, 모든 백성은 국왕에게 예속되어있는 존재였으므로 백성과 병사 하나도 열외없이 국가를 위해 싸워야 하는 생각이 뿌리박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 이전에, 성이 떨어지면 성내의 군민들은 대개 몰살 당하는 것이고 이전의 많은 왜변에서도 실제로 그러하였다. 대대적인 외적의 침공이 들어올 때마다 살육과 약탈을 모두 감내해야 했던 역사 탓에, 부산진성에서 끝까지 저항을 시도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쳐들어온것도 말보단 칼을 앞세우는 왜놈들이니...)
고니시는 정발의 투지에 감복하여 그 시체를 온전히 보존하게 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왜군과 부산진 주변 백성들은 분전한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을 기리는 의미로 정발을 '''흑의장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후 왜군은 신속하게 동래성으로 진군, 부산진성이 떨어진 '''바로 다음날 동래성 전투'''가 시작된다.
정발은 잠시 적전 도주 의혹을 사기도 했으나 이내 누명을 벗었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충신으로 인정받았다. 전쟁 초기에는 보고도 제대로 되지도 않고 루머만 돌아서 정발과 송상현이 왜장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한다. 부산진 전투에서 생존해서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가은산의 증언과 정발의 처 이씨의 탄원으로 전란후 현지에서 조사를 거친 후에 누명을 벗었고, 송상현, 윤홍신과 함께 부산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현재 부산 시내에는 정발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훗날 외교관계가 복원되어 통신사가 갔을 때
"조선에서 누가 가장 기억나오?"
"정발장군이 가장 기억납니다."
"정발이 누구요? 혹시 부산진에서 1일컷 당한 그놈?'
"??? 그 용장을 모른다고?"
이런 대화도 이뤄졌다. 부산진 전투의 조선군이 괴멸당했으니 조선측이 부산진에서 뭔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것도 당연하긴 했다.
4. 대중 매체에서 묘사된 부산진 전투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에는 9회에 다루었다. 병사들과 함께 결사항전의 결의를 다지고 왜군의 압도적인 군세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 성 전체가 전몰되는 모습을 묘사하며 정발과 병사들의 장렬한 최후를 다루기는 했지만, 정작 전투 후의 내레이션에서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을 빼앗겼다고 설명하며 한심한 패배였다고 디스한다. 이 드라마 제작할 때까지만 해도 고증이 엉망이었는지라 조선활보다 몇 배나 사거리가 긴 조총(...)때문에 패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는 조선각궁과 조총은 사거리가 비슷하다. 그렇기에, 실전에서의 일제사거리(50~100m)는 각궁과 조총 사이에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 징비록에서도 임진왜란의 역사적 첫 전투인만큼 디테일하게 다루었다. 두 드라마의 부산진 전투씬을 비교해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임진록과 임진록 2 일본 시나리오의 시작을 담당하며, 당시 상황을 묘사한 부산진순절도가 임진록 1의 일본 시나리오 브리핑 배경으로 나온다. 그런데 좌우 반전이다.
4.1. 불멸의 이순신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57화의 초반부, 6분 ~ 7분에 걸쳐 다루었다. 절영도에 상륙한 왜군 선발대에 의해 생선들을 말리던 백성들과 달려오던 일부 수군들이 거의 몰살당했고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가 사냥 후 회식을 하던 정발에게 보고할 수 있었고, 정발은 전선들을 자침시킨 후 밤새 백성들을 부산진성으로 소개시킨다. 이후 와키자카 야스하루[15] 의 명을 시작으로 왜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정발의 명에 따라 조선 수군은 활로 저항하지만 이내 왜군의 조총 사격에 무너지게 되고, 정발도 다수의 왜군과 싸우다가 조총의 일제사격에 주변에 있던 다른 왜군과 함께 사살당한다.
4.2. 징비록
13화의 초반부, 30여 분에 걸쳐 연출되었다.
역시 정발은 병사들을 데리고 사냥 후 회식을 하였는데, 그동안 왜군은 척후병들을 보내어 조선군의 상태를 확인한 후 봉수대를 무력화 시킨 뒤 상륙을 한다. 정발은 부산진으로 복귀하던 중 다가오는 왜군 전선들을 보고 처음엔 대마도의 무역선으로 파악했으나, 곧 노략질을 하러 온 왜구들로 파악하고 급히 백성들을 소개시키며 전투 태세를 갖추며 박홍과 원균 그리고 동래부사 송상현에게도 이 소식을 알린다. 이후 정발의 연락을 받고 합류한 박홍과 함께 왜군을 맞이하고, 이때쯤에야 정발은 그들이 단순한 왜구 수준이 아닌 정규군임을 알게 된다. 소 요시토시의 명령을 시작으로 왜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조선 수군은 정발의 명령에 따라 총통과 화살 등을 쏘아 왜군을 잠시 저지하지만, 곧 왜군이 방어 태세를 갖춰 조총을 난사하기 시작하자 곧 전열이 무너지게 된다. 결국 왜군이 성내에 돌입해 병사들 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 보이는 즉시 마구잡이로 도륙하기 시작하고, 그 와중에 박홍은 한참 싸우다가 불리하다고 여겨 군량 창고를 불태우고 퇴각하며, 나머지 군사들과 백성들은 모두 처절하게 싸우다가 전사하거나 학살당한다. 정발도 조총에 치명상을 입은 후 왜군의 칼을 맞고 전사한다.
사실 징비록(드라마)은 불멸의 이순신 이후 거의 10년 만에 전반적으로 나온 임진왜란 소재의 사극이라는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탓인지, 여러 모로 좋지 않은 평가를 받기도 한 작품이다. 더구나 전투장면은 이순신의 해상전에 그 역량을 집중한 탓에, 지상전 묘사는 그야말로 빈약하기 짝이 없으며, 특히 탄금대 전투 에피소드는 역사왜곡까지 겹쳐 두고두고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 부산진전투 에피소드만은 '''대단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비록 촬영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과감한 촬영각도와 저속촬영기법 등을 동원하여 부산진사 정발은 물론, 일선의 병사들, 백성들 하나하나까지 세세히 비추는 '''디테일'''을 갖추었고, 덕분에 당시 부산진성의 절망적인 전황과 처절한 저항을 눈물겹게 잘 그려낸 명장면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굳이 부산진에 입성하지 않은 경상좌수사 박홍을 끌여들여 욕먹게 한 부실한 고증은 시리즈 자체의 고증 문제들 중 하나다.
[1] 현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2] 부산진의 민(民)·관(官) 총 인원 중 전투 가능 인원은 600명 ~ 800명으로 추정한다.[3] 이는 모리 가의 문서의 기록이고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는 16,7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4] 지금의 부산광역시 영도구.[5] 후에 러시아 제국이 조차를 시도한 곳이기도 하다.[6]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일대. 현재 부산에는 부산진구가 따로 있지만 부산진성은 동구에 있다.[7] 선조실록 45권, 선조 26년 윤11월 14일 갑오 2번째기사. 여기서의 '평의지(平義智)'가 소 요시토시이다.[8]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13일 임인 1번째기사[9]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14일 계묘 1번째기사[10] 명종실록 12권, 명종 6년 10월 24일 무인 1번째기사에서는 527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삼포왜란 등이 일어났기에 병력이 증강되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당시 조선의 국토방위체제를 고려하면 부산진에 유의미하게 많은 병력이 증원되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병력이 적은 이유는 제승방략상 부산진은 요즘으로 치면 휴전선 GOP개념의 전방 기지고 본격적인 경상도 남부 지역 방어는 동래성에서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 남부지방의 방어 전술은 큰 전투는 거의 없고 해적의 소규모 약탈이 많은 남부지방의 특징을 고려해서 소규모 진지를 많이 깔아놓고 대규모 전쟁이 나면 상급부대에서 주변의 진지들을 규합해 한타를 벌이는 식이었다. 왜군의 진격이 규합 속도보다 더 빨랐고, 정발의 경고장을 받은 장군이 하필 '''원균'''이라는게 문제였지만... 서신을 받은 이후 원균은 판옥선 100여척을 싸워보지도 않고 태워버리고 도주했고 이후 상황은 아시는대로.[11] 프로이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조선군은 구리로 된 포를 사용하고 가죽으로 만든 흉갑과 철투구를 착용했다고 한다.[12] 조선통신사로 흔히 알려져 있는데, 임진왜란 이후 조선통신사 목록에 황신의 이름은 없다. 마쓰라 시게노부와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전간기에 경상도 위무사로 있던 시기의 황신이 유력한 후보이다. 황신이 이 시기 한 대표적인 행동이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순신 낚으려고 했던 책략에 이용당한 것이지만, 역으로 경상도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장수들과 연락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임진왜란 이전 왜에 정사로 파견된 경력'''도 있고.[13] 이것도 이상하게 마쓰우라로 알려져 있다.[14] 물론 직접적으로 싸우기 위해 달려들었다기 보다는 그냥 죽기 전에 저항이라도 해보자는 의미였겠지만, 낫들고 달려들고 지붕 기왓장 들어내서 성벽에서 던져대는 식으로 끝까지 전투에 참여했다.[15] 실제로 와키자카는 부산진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