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규

 

1. 여말선초 인물
1.1. 현대 매체에서
1.2. 관련 문서
2. 조선 중기의 무신
3.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1. 여말선초 인물



趙英珪
? ~ 1395년(태조 4년)
여말선초의 인물. 초명은 평(評).
이성계가 고려의 장수로 활약할 때부터 그를 따라 종군했는데, 1385년 가을 9월에 왜구가 함주, 홍원, 부청, 합란북 등지를 공격해 백성들을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이성계를 따라 종군했고 이지란, 고여 등과 함께 왜구를 유인해 추격해온 적의 선봉 수백을 매복한 군사들로 습격, 적 20여 명을 죽였다. 이 당시 벼슬이 '판위위시사'였는데, 이는 의장에 쓰는 물건과 기구를 관리하는 '위위시'의 책임자이며, 정3품 벼슬로 고위 관료였다.
이후 판전객시사를 지내다가 1392년 여름 4월에 이방원의 지시를 받아 조영무, 고여, 이부 등과 함께 도평의사사에 들어가 정몽주를 죽이려 했지만 변중량으로 인해 이 계획이 누설되었고 정몽주는 변고를 살피기 위해 이성계의 병문안을 갔다.
이방원의 지시로 이성계의 저택에서 칼을 가지고 와 정몽주의 집 근처에 기다리면서 선죽교에서 조영무, 고여, 이부 등 3명, 4명이 뒤따라갔으며, 정몽주가 이르자 달려가서 공격했지만 말을 이끌고 달아나자 다시 쫓아가 말을 넘어뜨렸다. 이 때 조영규가 넘어뜨린 정몽주는 달아났지만 고여 등이 쫓아가서 죽였다.
여담으로 각종 매체에서 항상 사병처럼 묘사되는 조영규지만 정몽주를 암살할 당시에는 앞서도 서술했듯 외빈 접대를 관장하는 관청인 전객시의 책임자인 '판전객시사'라는 벼슬에 있었다. 요컨대 정몽주 암살 사건은 오늘날로 치면 정부 의전 업무를 맡은 부서에 소속한 차관급 인사가 군인들을 몰고 가서 직접 상대 당 대표이자 부총리를 암살해버린 여러 모로 막장스러운 사건이다.
7월 17일에 이성계가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이 건국되고 8월 20일에 예조전서로 있으면서 개국 공신이 되었으며, 1395년 1월 9일에 사망했다. 그가 죽자 참찬문하부사로 올려서 임명되었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조주(趙珠)·조인(趙仁)·조우(趙祐)이다. 벼슬 변천을 보면 의전이나 외빈 접대 같은 예조 쪽의 벼슬을 맡고 있는데, 무사의 이미지로 묘사되는 것과 달리 예조 쪽 업무에 제법 도통했던 모양으로 의외로 문무겸비가 출중한 인물인듯 하다.
조영무와 이름 가운데가 '영(英)'자 돌림이어서 형제같이 보이지만 둘다 본관도 다른 인물이다. 조영규는 신창 조씨, 조영무는 영흥 조씨[1].

1.1. 현대 매체에서


여말 선초가 사극에서 많이 다뤄진 시기이다 보니 사극에서 조연급으로 자주 등장하는 인물 중 한 명. 재미있는 건 조영규는 왜구 토벌에서 활약해 실전 참여 경험이 있는 엄연한 군인이자 정식 관직이 있었던 관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사극에 등장하는 조영규는 항상 암살자나 사병 같은 이미지로 등장하는 게 특징. 아무래도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암살 사건 중 하나인 정몽주 암살의 임팩트가 상당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사실 위에도 있듯이 정몽주를 절명시킨 인물은 조영규가 아니라 고여 등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완전히 맞지 않는 묘사일 수도 있지만.[2]
또한 젊은 시절부터 이성계 막하에서 종군했기에 이지란이나 처명, 조영무 등처럼 이성계의 가신 그룹에 속하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보다는 이방원의 심복처럼 등장하는 것 역시 공통점. 아무튼 한국 사극의 등장 인물 중에서 기록이 많이 남은 인물은 아니긴 하지만 등장 사극마다 이미지가 일관적인 편이다.
개국에서는 장학수가, 용의 눈물에서는 송종원이 배역을 맡았다. 선죽교에서 철퇴를 들고 정몽주의 암살을 수행한 주역 역할을 수행했다. 예조 업무에도 능통했던 기록과는 달리 여기서는 무에만 능한 무식한 인물로 등장하며 새로이 받은 관직 업무가 자신과 맞지 않아 골치를 썩이는 것으로 나온다. 용의 눈물에서는 조영규가 정몽주를 낙마시키고 결정적 타격까지 모두 가하는 모습으로 나오며 정작 역사상으로 정몽주를 죽인 고여는 그냥 옆에서 썩소나 날리는 모습으로 나온다. 또한 조영규가 1395년에 사망했다는 사실이 무시되고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직전까지 생존한 것으로 잘못 나왔다.
정도전에서 등장. 조영규(정도전) 문서 참고. 역시 선죽교에서 철퇴를 들고 있다. 용의 눈물이 조영규의 몰년 오류를 낸것과는 다르게 조선 건국 후에 사망한 모습이 연출되며 조영규가 담당하던 이방원의 심복 역할을 조영무가 이어받는다.
2015년 3월 개봉된 영화 순수의 시대에서도 등장하며 주인공이자 가공 인물인 김민재의 라이벌로 나오며 인간 말종 기믹을 지닌다. 결국 실제 역사와는 달리 마지막에 김민재에게 살해당한다.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민성욱이 배역을 맡았다. 여기서도 예조 업무에 능통한 한 관리 혹은 참전 군인보다는 '칼잡이'의 이미지로 등장. 물론 여기서도 철퇴를 들고 이방원의 지시로 정몽주의 암살을 수행했다.
결국 조선 개국 후, 예조전서에 이르지만 주군인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는 것도 보지 못하고, 척사광의 칼날에 숨이 끊긴다. 병사한 실제 역사와는 다른 부분. 자세한 내용은 여기 참조.

1.2. 관련 문서




2. 조선 중기의 무신


趙英圭
1535년(중종 30년) ~ 1592년(선조 25년)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직산(稷山), 자는 옥첨(玉瞻).
1535년 전라도 장성도호부 북이면 백암리(현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 백암마을)#에서 태어났다. 이후 무과에 급제하여 종4품 용천군수를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 발발 당시에는 종4품 양산 군수로 재직 중이었다. 1592년 동래성 전투 당시, 일 때문에 동래에 갔다 왜군이 쳐들어 와서 송상현과 함께 순절하였다. 왜군의 침공소식을 듣고 송상현이 순국할 결심을 보고 같이 하겠다면서도, 다만 어머님의 피난처만 챙겨드리고 오겠다고 해서 도망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았지만, 약조한 날짜에 되돌아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는 얘기가 류성룡의 문집에 전해진다고 한다.현종실록 16권, 10년 3월 11일 갑진 1번째 기사현종개수실록 권21, 10년 5월 13일 을사 2번째기사
1669년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1713년에는 정발을 비롯한 임진왜란 때 같이 전사한 사람들과 함께 충렬사에 배향되었다.숙종실록 권54, 39년 12월 2일 을해 1번째기사
선조 실록에는 한자가 趙英'''珪'''로 되어있다.#


3.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1] 당시는 영흥이었으나 사후 일가가 본관을 한양으로 바꿨다.[2] 다만 상술되었듯 정몽주의 말을 가격해서 정몽주를 낙마시킨 건 조영규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