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1. 개요
2. 사건의 배경 및 진행
2.1. 당시 경찰의 발표
2.2. 재판 과정
2.3. 사건 결과
3. 미군정의 조작 의혹
4. 사건의 여파
5. 매체
5.1. 북의 시인에서
5.2. 소설 산하에서
5.3. 드라마 새벽에서
5.4. 야인시대에서
5.5. 서울 1945에서
5.6. 웹툰 인천상륙작전에서


1. 개요


1946년 미군정 시기 서울특별시에서 일어난 위폐 범죄 적발 사건으로, 정치적인 파장이 커서 남한의 조선공산당 세력과 미군정의 정면 충돌을 불러오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공산당 당원인 은행 직원이 이관술의 지휘 하에 10만 원의 위조지폐를 만들다가 야간순찰 중이던 군정청 수도경찰에 의해 적발되었다.
사건 당시 재판 절차를 완료한 종결 사건이나, 사건 직후부터 지금까지 미군정에 의한 조작설이 끊임없이 제기 되었다. 이 사건으로 박사 논문을 쓴 임성욱의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에서 미군정의 조작, 한국 경찰과 언론 통제, 재판 과정의 수상한 점 등을 상세히 설명하며 재조명받고 있다.


2. 사건의 배경 및 진행


일본인 건물이던 근택빌딩[1] 1층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근택인쇄소가 입주해 있었다. '적산관리법'에 따라 미군정으로부터 건물과 함께 인쇄소까지 불하받은 공산당은 인쇄소 이름을 '조선정판사'로 고치고 기관지 '해방일보'를 인쇄했다. 이때 인쇄소 직원들은 모두 일제 때부터 일해온 이들을 그대로 재고용했다.
문제는 일제 때부터 지폐 인쇄에 종사해 오던 정판사 직원인 '김창선(金昌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김창선은 1945년 9월 20일경 일본 기술자들이 철수할 때 백원권 징크판 2개 조를 빼돌렸다. 징크판은 지폐 원판을 이용해 아연판을 눌러놓은 인쇄용 원판으로, 흑색 청색 적색의 세 가지 색상으로 구성되니 모두 6장을 빼돌린 것이었다.
김창선은 빼돌린 징크판을 홍사겸(洪思謙)과 같이 10월 자신의 집에서 수정해 두었다가 월말에 낭승구(浪承九)·낭승헌(浪承憲)과 배재룡(裵在龍)이 은행권 위조를 꾀하려는 것을 알고 빼돌린 징크판의 일부를 그들에게 2500원을 받고 팔아넘겼다. #
이후 배재룡과 낭승구, 낭승헌은 1945년 10월경 낭승헌의 집에서 모여 술을 마시면서 인쇄직공인 배재룡은 기술을, 낭승구는 자금을, 낭승헌은 기타 잡무를 각각 맡아 은행권 위조를 공모하였다. 이들은 징크판 3매를 사들인 후 인쇄기 용지와 잉크를 사서 화투를 찍는다는 명목으로 낭승구의 처조카 이원재(李元在)[2]를 통해 곽재봉(郭在奉)의 창고 2층을 빌려 11월경 인쇄기를 설치하고 12월 말부터 1946년 1월까지 몇 차례 위조지폐 인쇄를 시도하였는데, 배재룡이 이때 범죄 발각을 느껴 롤러를 고의로 깨뜨리면서 범행이 중단되었다. 당시 공판청구서
이후 징크판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보려고 상대를 물색하던 중 중부경찰서에 적발되고 말았다. 이때가 1946년 5월로, 조선공산당은 1945년 10-11월 근택빌딩에 입주해 있었고, 인쇄소 직원들도 일정한 교육을 받은 후 공산당에 가입해 있던 무렵이었다. 관련자들을 체포한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징크판이 공산당과 연관 있는 조선정판사 기술과장인 김창선에서 나왔다는 점에 주목했다. 보고를 받은 미군정은 정판사를 수사토록 지시했다.

2.1. 당시 경찰의 발표


'1945년 10월 중순 근택빌딩 2층 조선공산당 사무실에서 이관술[3], 권오직[4]이 김창선에게 위조지폐를 인쇄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김창선은 6차례에 걸쳐 9백만원을 인쇄해 이관술에게 제공했는데 아무 보답이 없자 분하게 여기고 징크판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가 발각되었다'라는 것이 당시 군정경찰의 발표였다.
여기서 이관술을 엮어 넣은 것은 이관술이 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이라는 명분이었지만, 이관술은 사람들 사이에서 부당수로 불릴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남한의 공산화를 도모하던 박헌영에게는 제2인자를 잃은 타격이 되었다. 그런데 이관술은 독립운동으로 수년간 감옥에있다 석방된지 얼마 안된 상황이고, 본인도 울산지역 대지주 집안 출신에, 감옥에서 고향에 교육기관을 지으라고 상당한 재산을 기부한 사람이다. 그런 이관술이 광복 후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대량의 위조지폐를 찍은 주범으로 지목된 것이다.

2.2. 재판 과정


담당 검사는 이후 민주당 국회의원, 법무부 장관 등을 역임한 조재천이었다(친일파 출신 맞다).
연행된 14명의 정판사 직원들은 처음에는 위조지폐를 찍은 일이 절대 없다고 부인했으나 수사 며칠만에 김창선의 진술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당사자들의 진실인지, 격한 심문에 따른 허위 진술이었을련지는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공산당은 이를 고문에 의한 허위 진술이라 주장했고 그 근거로 담당관들의 처사가 일제 시절 못지 않게 잔혹했음을 들기도 한다(담당경찰이 무려 노덕술이다).
아무튼 공산당은 고문으로 조작된 누명이라는 성명을 내고 전면적인 항의 투쟁에 들어갔다. 미군정은 이 사건이 '조선 공산당과는 관계가 없는 경제 사건'이라 발표하기도 하고 '한국인 경찰의 조작일 경우는 크게 엄단하겠다'는 엄포를 놓기도 했다.
이러한 수사 결과, 조선공산당 재정부장인 이관술과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이 주범으로 지목되었고 정판사 사장 박낙종[5], 서무과장 송언필이 이들의 지시 하에 위조 지폐를 인쇄해 유통시킨 것으로 조사되었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자 권오직은 북한으로 도주했지만 국내에 잔류 중인 이관술에 대해서는 지명수배에 들어갔다.

2.3. 사건 결과


이 사건을 기화로 당시 우익 성향 단체들은 '공산당이 위조지폐를 찍었다'는 확신 하에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5월 12일, 서울운동장에서 '독립전취 국민대회'를 마친 우익청년들이 수십 대의 트럭에 나눠 타고 시내를 질주하면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산하 각 단체와 언론부를 공격하기도 했고, 자유신문(해방정국 좌익 계열 신문사)사에 침입해 기계, 의류, 종이를 가져가고 가옥을 파괴하기도 했다. 경성자동차서비스회사에 침입해 도끼로 사람을 상해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런 지경에 이르자 서울 시내는 혼란에 휩싸였다. 다만 이러한 와중에도 경찰은 딱히 치안 회복에 힘을 쓰지 않았다.
재판 이후 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조선판 히틀러 테러'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조선인민보(좌익계열 신문)에 '공산당은 방화라든가 지폐 위조 같은 것은 절대로 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상식입니다. 왜나하면 공산당은 인민 대중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인민 대중에 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며 또 할 수 없는 정당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이주하 등 공산당 필진들도 억울한 누명임을 강조하는 주장 글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했다.
5월 18일. 미합중국 육군 대위의 인솔 아래 수백명의 미 육군 헌병들이 근택빌딩을 포위한 후 공산당 중앙당 사무실과 '해방일보'를 샅샅이 수색해 공산당 관련 서류 일체를 압수해갔다. 미군정 적산관리과는 조선공산당으로부터 근택빌딩을 회수, 공산당은 5월 30일 남대문 앞 일화빌딩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경찰에 의해 위폐 사건 주범으로 지목되어 전국에 수배된 이관술은 두달 만인 7월 6일 충신동에서 체포되었다. 이관술은 변론 과정에서 "체포되기 전부터 자신이 운영하던 책방인 '해방서점'에 주기적으로 나타나 장부를 점검했고 체포되던 날도 낮에 서점에서 몇 권의 책을 들고 집에 돌아갔다며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하게 한 주범이 이처럼 반공개적으로 돌아다녔는데 용의점이 있느냐"며 항변했다. 체포된 그는 한달간 계속된 심문 기간 중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이는 무위로 돌아갔다.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주요 언론들은 사건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렇게 공산당이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는 의혹은 점차 기정사실화에 들어갔고, 이관술은 무기징역을 언도받아 수감된 후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때 처형당했다.

3. 미군정의 조작 의혹


공산당 측은 재판 과정에서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김창선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고 김창선이 낭승구에게 인쇄소를 양도할 당시까지 아직 공산당이 근택빌딩에 입주하기 전이었다고 한다. 당시 건물을 조선공산당 중앙당은 이미 불하받긴 했으나 여러 달이 지난 1946년 1월부터 비어 있던 2층에 입주해 업무를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이관술과는 무관하다. 공산당은 처음 입주 직후 정판사 직원들이 체포되었을 때만 해도 김창선 개인의 부정이라 생각했다고 하며, 사건을 지휘한 경찰청장 장택상이 기자들과의 대담에서 '위폐 사건에 대해 자신은 결정권이 없으며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고 밝힌 것을 들어 간접적으로 이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입증한 것이라 주장했다.
또 해방된 지 불과 2개월밖에 안 된 그 시기에는 공산당의 위세가 대단해서 화신백화점 박흥식 등 여러 재벌들이 돈을 보따리로 싸들고 이관술을 찾아올 때고 정치자금이 조선공산당에 대량으로 유입되던 시기였는데 뭐가 아쉬워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지폐를 찍었겠느냐는 반론도 폈다.
또한 당시 재판부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공산당의 주장을 무시하는 데만 완고했다는 비판이 있다. 그 예로 '사도법관'이라 불리던 검사 김홍섭이 재판 도중 사표를 제출했고 미군정 법무관 중 일부는 이 사건이 근거가 부족하다는 의견서를 제출했으나 무시되었음을 들기도 한다.
'''김규식은 수도경찰서장 장택상의 경질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러치는 장택상을 경질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장택상은 위조지폐 사건에 대한 진실을 폭로할 것이라고 협박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소련군정 문서 자료가 나왔다.
이 조작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이하의 자료들을 참고해보아도 좋다. 다만 직접적인 물증 없이 정황상의 증거만으로 이루어진, 어디까지나 '설'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고 읽을 필요가 있다.

4. 사건의 여파


이 사건은 남한 내에서 매우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 근거로 1946년 7월에 '조선여론협회'가 서울시민 6,671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대통령감으로는 이승만이 29%(1,916명)로 압도했고, 김구(702명), 김규식(694명), 여운형(689명)이 10% 선을 유지한 반면, 박헌영은 1%(84명)밖에 얻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여론조사에 응한 6,671명 가운데 '잘 모르겠다'고 택한 응답자가 2,476명(37%)라는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서로 쉬쉬하고 다녔는지, 아니면 혼잡한 정치 상황에서 누가 더 좋은지를 몰랐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과 달리 당시는 정보가 한정되어 있었고, 자본주의공산주의나 대중에게는 다소 생소한 개념이었다. 이후 박헌영은 "무력이 아니고서는 혁명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렀고 이내 월북하여 수년 후 한국전쟁의 비극을 야기하는 장본인 중 하나가 되었다.
사건 이 후로 '정판사'는 당시에 우파 노선을 걷던 한국 천주교에 불하되어 경향신문을 인쇄하게 되었다. 해방일보는 무기한 정간으로 사실상 폐간 조치되었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인해 미 군정의 태도가 싹 바뀌어 남한에서의 남조선로동당의 모든 활동이 금지되었으며, 1946년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사건이 연달아 발생해 박헌영은 더 이상 남한에서 정치활동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의외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로 위 피고인들 정신감정 및 인쇄판에 대한 기술 자문으로 의학은 백인제가, 인쇄판은 안과 치료를 받으려 온 이극로의 주장에 공감하여 만들게 된 한글 타자기로 유명한 안과의사 공병우 박사가 참여했다. 장기려 평전에서는 이것이 백인제가 괘씸죄에 걸려 납북되는 결정타였다는 목록이 나오는데, 반대로 공병우는 역시 억류되었으나 납북되지 않고 남측으로 도주하는데 성공해 후에 대한민국 해군에 한글타자기를 납품, 정부 문서화가 발달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바로 위 대구 10.1 폭동과 연관한다면, 안창호 계열이 여러모로 꼬이게 되고 비극이 지속되었다.

5. 매체


워낙 불투명하고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는 사건이라서 그렇게 극화되는 편은 아니다. 애초에 해방 전후사가 제대로 극화되기에는 여러 카더라 통신도 난무하고 확실한 사료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5.1. 북의 시인에서


일본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북의 시인"(번역본- 북의 시인 임화)에서는 위에 언급된 말대로 미군정의 공작설을 강하게 암시한다. 작가가 일본의 검은 안개 시리즈를 쓴 경력을 본다면 상상할만한 전개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임화의 에이전트설을 암시하는 주제로 이어령에게 제대로 까였다. 일명 '마쓰모토 정신병자설'.

5.2. 소설 산하에서


이병주의 '산하'에서는 정판사에서 취객이랑 싸움붙은 주인공이 우연찮게 위폐 뭉치를 발견하는 걸로 묘사한다. 이 작품은 MBC에서 이영후 주연으로 방영된 바 있다.

5.3. 드라마 새벽에서


1985년 KBS 대하드라마 새벽에서는 사건 전말을 음험한 처삼촌 공산당들의 모략으로 못 박고 있다. 공산당이었다가 나중에 전향하고 후회하면서 죽는 캐릭터 김기섭이 정판사 위폐를 받아서 흥청망청 쓰는 장면이 버젓히 나온다. 이런 묘사에도 '좌익을 은근히 미화한다'라는 지적을 받으며 드라마가 산으로 가다가 후속작 없이 조기종영되었다.

5.4. 야인시대에서



2003년 SBS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패에게 국군준비대가 개박살나고, 신불출은 다리가 박살, 심영중앙극장에서 습격을 당해 고자가 되어 월북한 영향으로 공산당의 세가 약해지자, 박헌영이 남한의 경제를 붕괴시키고 조선청년전위대의 자금을 확보할 목적으로 위조지폐를 찍어낸 걸로 나온다(67화에서 묘사). 물론 당연히 들통나고 그나마 전위대를 암묵적으로 보호하던 미군정도 위조지폐만은 안된다며, 조선 공산당을 수사하면서 그걸 계기로 박헌영은 월북하고 전위대의 규모가 더욱 더 축소되어 망했어요. 남한에서 심각한 인플레이션도 발생하면서 그들의 계획은 부분적으로 성공했지만, 댓가가 너무 컸기에 삽질이 되고 말았다.
의사양반의 모티브가 이 사건의 감정에 참가한 백인제 박사라는 걸 생각하면 기분이 상당히 묘해진다.


5.5. 서울 1945에서


2006년 KBS 1TV 서울1945에서는 주인공 최운혁의 스승이자 공산주의자인 문동기가 일으킨 사건으로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문동기는 박헌영이 속해 있는 남로당 소속의 가상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5.6. 웹툰 인천상륙작전에서


2013년. 인천상륙작전(웹툰)에선 이 사건에 유죄판결이 근거가 없으며 자백은 고문에 따른 것으로 나와있다. 링크 공산당이 위폐를 만들었다고 자백한 것이 고문 이후라는 점을 다룬 창작 매체 중 영상매체로는 이게 최초이다.

[1] 현재 서울 중구 소공동 남대문로7길 롯데백화점 주차타워 자리[2] 당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뚝섬위원회 조직부장이었다. 뚝섬 조직은 우익 조직임[3]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에 이은 2인자[4]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주필[5] 이 사람이 현 민생당 소속 국회의원인 박지원의 조부라는 소문이 유포되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는 여러 차례 소송 등 어그로를 끈 바 있는 우익 논객 지만원도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한 바 있다.# 박낙종은 경남 사천 출신이고, 박지원 의원의 조부는 전남 진도 출신으로 전혀 다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