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공화국

 



'''조선인민공화국'''
'''朝鮮人民共和國 | People's Republic of Korea'''

미승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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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image] 조선인민공화국의 명목상 영토
'''1945년 9월 6일 ~ 1946년 2월 19일'''
'''성립 이전'''
'''해체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소비에트 민정청'''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표어'''
자주독립국가(自主獨立國家)[1]
'''위치'''
한반도
'''수도'''
경성(서울)
'''국가원수'''
주석
'''정치체제'''
민주공화제
'''언어'''
한국어
'''민족'''
한민족
1. 개요
2. 배경
3. 건국 선포 및 각료
4. 와해와 그 원인
5. 의의
6. 여담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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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은 광복 이후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세웠으나 와해된 공화국(미승인국)이다.
1945년 9월 6일 한반도의 8.15 광복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선포한 공화국. 조선인민공화국의 건국 선포에는 건준위 내의 조선공산당 재건파가 크게 주도하였다. 그러나 내외부적 정세로 인해 어떠한 의미있는 활동도 보여주지 못하고 와해되었다. 국기는 단순화한 태극기. 수도는 경기도 경성부(서울특별시). 약칭은 '조선인공'이다.
인민, 인공이라는 단어가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북한의 존재 때문에 굉장히 부정적인 뉘앙스이겠지만, 광복 직후만해도 '인공'이라는 호칭이 적격했다고 봤던 사람들이 다수였다.#. 1947년 7월 6일자 조선일보를 보면 적격한 국호 후보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이 70%의 지지를 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 배경


당시 막 일제로부터 8.15 광복을 맞이한 직후, 무정부 상태였던 한반도에 소련미국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했다. 38선 북쪽은 이미 소련(소군정)의 지원을 받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들이 집결되고 있었다. 1945년 8월 24일 소련군이 평양을 점령할 때 건준위는 평남에 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조만식이 이를 이끌었다. 그리고 소련은 건준위의 인민위원회를 인정하고 이들과 협조해주었다.[2]
한편 남쪽은 오키나와에서 북상하던 미군이 아직 상륙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직도 조선총독부에는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남고 일본군이 치안을 장악하고 있었다.[3] 지하비밀조직 조선건국동맹으로 광복 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여운형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9월 4일이 되자 미군 진주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고, 이때 조선공산당 재건파의 박헌영은 <미군당국과 절충할 인민총의의 집결체>를 세워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여운형에 대한 지지를 천명한다.[4] 이후 이틀이 지난 9월 6일 저녁 1천여 명의 지방 인민위원회 대표들을 서울 경기여고에 모이게 한 후,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열고 국명과 중앙정부 역할을 하는 중앙인민위원회의 위원과 후보위원, 고문[5]을 선발했다.

3. 건국 선포 및 각료


8일 뒤인 1945년 9월 14일 중앙인민위원회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설립을 결정했다. 중앙인민위원회의 위원들은 당시 건준 주류였던 조선공산당만이 아닌 국내외 독립운동가와 좌우익을 총망라한 형태로 구상되었으나 주로 실권은 조선공산당측에게 있었다... 심지어 여운형계도 손에 꼽을 만큼 적었고, 대리는 거의 대다수가 공산당 계열 및 포섭된 사민주의자였다. 박헌영은 포섭에 아주 능한 사람이었고, 그에게 넘어간 사민주의자나 온건주의자가 많았다.
  • 주석 이승만
  • 부주석 여운형
  • 국무총리 허헌[6]
  • 내무부장 김구(대리 조동호·김계림)
  • 외무부장 김규식(대리 최근우·강진)
  • 재무부장 조만식(대리 박문규·강병도)
  • 군사부장 김원봉(대리 김세용·장기욱)
  • 경제부장 하필원(대리 김형선·정태식)
  • 농림부장 강기덕(대리 유축운·이광)
  • 보건부장 이만규[7](대리 이정윤·김점권)
  • 교통부장 홍남표[8] (대리 이순근·정종근)
  • 보안부장 최용달[9](대리 무정·이기석)
  • 사법부장 김병로(대리 이승엽·정진태)
  • 문교부장 김성수(대리 김태준·김기전)
  • 선전부장 이관술[10](대리 이여성·서중석)
  • 체신부장 신익희(대리 김철수·조두원)
  • 노동부장 이위상( 대리 김상혁·이순금[11])
  • 서기장[12] 리강국[13](대리 최성환)
  • 법제부장 최익한[14](대리 김용암)
  • 기획부장 정백(대리 안기성)
보듯이 고위층을 보면 좌우가 합작한 내각을 구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임시정부 출신은 명목상의 고위직만 얻었고, 실상 주요 요직은 조선공산당 재건파 세력이나 좌익세력이 차지하였다.[15] 당시 이승만, 김구는 아직 해외에서 귀국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김성수, 김병로, 조만식, 신익희 등의 우파인사들도 이름은 올라갔지만 실제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조선인민공화국 설립 이전에 이미 송진우 등 일부 우파 인사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환국환영회 및 국민대회준비회(국준)를 조직하고 9월 8일 경에 조선인민공화국 타도 성명을 발표할 정도로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우파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이승만도 미국에서 귀국한 다음 방송을 통해서 정식으로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주석 취임을 거절했고 김구김규식도 11월 말경 공식적으로 입각을 부인했다.[16] 건준 당시 우파 대표로 부위원장이었던 안재홍은 건준을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 재건파가 장악할려는 움직임을 보고, 건준위를 2차 개편해 김병로, 이인 등 우익 인사들을 합류시켜서 힘의 균형을 유지할려고 여운형을 설득했었다. 그러나 여운형이 이를 거절하면서 안재홍과 우파 세력이 건준을 떠나게 된다. 이때문에 비교적 좌파에 포용적이었고 건준위 합류에 생각했었던 김병로도 참여하지 않았다.
여하간 건준은 일본제국주의 법률의 완전 폐기, 친일협력자 및 민족반역자의 토지몰수, 철도·통신·금융기관의 국유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정강과 27개조 시정방침을 발표했다.[17]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거창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인공"은 어떠한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1호

후보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
이관술
지지율
33%
21%
18%
16%
12%
후보
김일성
최현배
김규식
서재필
홍남표
지지율
9%
7%
6%
5%
5%
'''내각이 조직될 경우 적당한 인물'''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2호

대통령
내무부장
외무부장
재무부장
군무부장
이승만
김구
여운형
조만식
김일성
사법부장
문교부장
경제부장
교통부장
노동부장
허헌
안재홍
백남운
최용달
박헌영
* 위 표는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45~51에 실린 정치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 자료(편집인 安峰守, 발행인 高麟燦)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여론조사 제1호에서 백분율 합계가 100%를 넘는 이유는 복수 추천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및 참고자료


그 당시 해방정국에서 민중들이 바라는 내각과 거의 유사한 점에서 최고위층만큼은 민중의 지지를 받을 인사들로 구성한 것으로 알 수 있다.

4. 와해와 그 원인


공화국 선포는 하였으나, 미군정은 공화국 각료들이 국민들이 직접 참정권을 행사하여 구성된 것이 아니므로 이들이 국민들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조선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았으며[18], 비 공산주의 진영 출신 독립운동가들도 미군정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조선인민공화국은 제대로 된 정부 기능조차 하지 못하였다. 결국 미군정은 조선총독부를 그대로 이어받아 미 군정만이 38도선 이남에서의 유일한 정부라고 선언하고, 남한지역 내의 모든 정당, 독립운동 단체들에게 강령과 간부명단을 등록하게 했으며, 인민공화국도 하나의 정당으로 등록하도록 명령했다. 10월 10일 미군정은 최후통첩으로 인공에 해체나 명칭 변경을 요구한다. 인공은 11월 말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열어 명칭에서 '국'을 빼는 방안을 논의하고 명칭 사수를 결정했다. 이후 미군정은 물리력을 동원해 각 지방의 인민위원회를 해체하기 시작한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합작이 무산되며 사실상 인공은 유명무실해져 형해화됐다.
한편 이북에서 소련은 미국과는 달리 처음에는 평남 인민위원회와 협력하였지만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소련은 미국의 신탁통치 제안에 동의하고 평남 인민위원회의 위원장이었던 조만식은 이를 반대해 김일성을 비롯한 신탁 찬성파들과 갈등이 생기고 결국 김일성은 조만식을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시키고 생사불명 처리하였다. 이후 인공이 폐지되고 이북에는 북한의 건국을 위한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세워졌다.
지나치게 졸속으로 출범한 것부터가 인공이 와해된 요인이었다. 미군정이 통치를 선언한 후 서울에 도착한 날이 9월 9일, 건국 선포 시기는 9월 6일이었다. 또 이 시점 역시 광복 직후 고작 2주 후였고, 각료가 발표된 건 또 2주 후였으니, 한 나라를 이끌어갈 중책들을 고작 한 달만에 면면한 심사 없이 등용한 것이 되었다.
독립운동가 사이에서도 공산주의, 사회주의 진영, 민족주의/보수주의 진영 등 다양한 이념이 존재했는데, 조선인민공화국은 각 진영 사이의 충분한 논의 없이 급조됐다. 각료의 중 2/3 이상이 조선공산당 재건파나 좌파 출신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나머지는 아직 귀국하지 않았거나 참여를 거부한 인사들이었다. 또한 소군정이 진행되던 북조선의 인사들도 거의 포함되지 않아서 설사 만약 미군정이 우호적인 자세를 취했다해도 인공이 통일정부로 발전하기는 수월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조급하게 인민공화국을 선포한 것은 미군정이 시작되기 전에 임시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여운형의 부담 때문이었으나, 이로 인해 기반이 부실해져 인공은 금세 무너졌다.
여운형은 "인공"의 실패와 함께 정치력에 상당부분 타격을 입었으며, 이후로도 조선공산당 재건파 세력을 포용, 연대하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다가 이후에 중도노선을 굳건히 견지하게 된다. 하지만 상당히 늦은 후였고 그 이후에도 여운형은 좌우 강경파들에게 여러차례 위협을 받다가 결국 여운형의 꿈은 암살로 끝나고 난다.

5. 의의


자주적인 한반도의 통일 정부를 세우려고 했던 노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지방자치 부분에 있어서 특히 의의가 있었다. 인공이 조직됨에 따라 지방에 있던 기존에 전국적으로 활동했던 건준 지부는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인민위원회는 미군이 진주한 뒤에도 해당 지방 주민들의 지지 속에 치안을 담당하는 등 '지방정부'로서 활동한 곳이 꽤나 많았다.[19] 이 인민위원회는 치안,행정 능력이 '우리 스스로도 이끌어 나갈 수 있음'을 능력으로 보여준 사례로 의의가 있다.[20] 이러한 인민위원회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대중들에게 상당한 신망과 지지를 받고 있었다.# 비록 서울의 중앙인민위원회는 좌익 인사들이 주도하였기 때문에 우익들로부터 비난을 많이 받았지만, 이와 달리 지방의 인민위원회 경우는 좌익들만이 아닌 지역에서 양심가로 명망 높은 우익 세력 인사들도 대거 적극 참여했기 때문에 우익으로부터도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예를 들어 중국, 소련, 일본 등지에 이민, 징용이나 징병 등 나갔다가 돌아오는 귀환민들의 행렬은 광복 후 수 개월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었던 무렵에 인민위원회는 이들을 맞이해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해주고 아직 철수하지 않은 일본 군, 경을 견제하는 등 적지 않은 행정력을 발휘했고 남한지역 주둔 미 군정의 병력 배치가 완료되는 1945년 말까지 실질적인 지방 행정기관처럼 활동했었다.
특히 가장 의의가 있었던 것은 소작료 개혁 관련이었다. 서울의 중앙인민위원회가 결정한 소작료 3:7제는 특히 농민들의 환호 속에 받아들여졌다.[21] 이는 미군정이 10월 5일 군정법령 제5호로 법제화 한 '소작료를 생산량의 3분의 1만 내면 된다'는 3/1제를 공포한 것도 이 인민위원회에서 내세웠던 '3:7제'가 농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었던 점에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광복 정국 당시 사람들은 정권 형태가 '군정 체제'[22]보다는 '인민위원회'를 압도적으로 지지했었다.#

6. 여담



7. 관련 문서



[1] 그냥 국가를 상징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독립국임을 나타내는 표어였기 때문에 존속했더라도 얼마 안가 바꿨을것이다.[2] 당시 조만식은 사회주의와는 반대되는 사람이었고 소련군을 기꺼워하진 않았지만 좌우합작의 일원으로 같이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3]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동시에 건준위가 활동했었지만, 조선총독부는 격하게 반발. 8월 20일에 경성(서울)에서 다시 치안권과 행정권을 장악할려고 했었고, 이과정에서 이중 혼란을 겪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총독부와 건준위 사이간 이중혼란이 오는 반면에, 지방에서는 건준위에서 자체적으로 치안,행정권 활동했던 상태.[4] 이는 1945년 8월 광복 되자마자 서울로 올라온 박헌영이 조선공산당 재건파를 조직하고, '8월 테제'를 선포한 부분을 통해 엿볼 수 있다.[5] 이 각료명단은 박헌영이 초안을 작성했다[6] 김병로와 함께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대한제국과 일제의 변호사 자격증을 모두 취득했다. 1926년 조선 최초의 6개월간 민간인 세계일주를 다니기도 했다. 신간회나 건준에 적극 참여하며 온건좌파의 성향을 띄었으나, 결국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김일성대학 총장을 지냈다. 1951년 병사.[7] 이후 월북[8] 연해주 고려공산당 출신 남로당 간부.[9] 1927년 원산 총파업으로 이름을 알린 좌파인사.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 교수로 조선건국동맹 때부터 참여하였다. 이후 월북하여 북한 헌법을 기초하였으나 숙청당했다고 추정된다.[10] 박헌영의 오른팔 역을 하는 남로당의 제2인자였다.[11] 이재유와의 위장부부 관계로 유명한 사회주의 운동가[12] 사무국이나 서기부로 표기된 자료가 있다. 리강국이 서기인 것은 확실하다.[13] 보성고보를 수석졸업하고 독일 유학했던 엘리트 출신으로 독일 공산당(KPD) 당원이기도 했다. 국내에서 공산당,독립운동 활동을 하다가 연인인 간첩 김수임의 도움으로 월북하였으나 역시 숙청당했다.[14] 공산당 ML파, 역시 월북 후 숙청[15] 이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파 세력이 주창한 '8월 테제'에 따른것이다. '8월 테제'란, 초창기에는 '부르주아 자본주의 세력을 포용하면서 나아가 최종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인민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단계적 전략 요지의 내용을 담은 선언을 말한다.[16] 각각 한국문화대백과자료대한민국사에서 확인 가능하다.[17] 이 정강정책은 조소앙이 기초해서 임시정부가 내걸고 있던 삼균주의와 상당히 유사하다.[18] 비단 조선인민공화국 뿐만 아니라 모든 독립 운동 단체들을 승인하지 않았다.[19]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연구에 따르면, 38선 이남의 조사 대상 138개 군 가운데 128개 군에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그 가운데 약 절반에 해당하는 69곳의 인민위원회가 자치 관리를 했다.[20]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현재는 정년 퇴임으로 석좌 교수)에 따르면, 광복 직후에 이러한 자치 기구가 없었다면 굉장히 커다란 혼란이 있었을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21] 일제강점기 식민지 지주제 하에서 소작료를 5할, 많게는 6~8할까지 내 절대적인 빈곤에 신음했던 농민들이 3할만 소작료로 내면 된다는 주장에 '정말 이것이 해방이구나'하고 감격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22] 당시 군정 체제 때는 일제 강점기 당시 경찰로 복무했던 친일 경찰 출신들이 다수 점유했었고, 이 친일 경찰들은 당연히 사람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