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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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인권변호사의 아버지'
이돈명 변호사는 1922년, 삼봉 정도전의 유배지이기도 했던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회두마을에서 태어나, 1946년에 조선대학교의 전신 광주야간대학원에 입학하고 재학 중인 1948년에 조선변호사 예비시험에 합격했다. 1950년에는 조선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52년 제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여 판사로 활동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법관직에 회의를 느끼던 차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1963년부터 법복을 벗고 다른 세 변호사와 함께 제일합동법률사무소를 열고 민사사건 전문 변호사로 일했다. 1974년, 동아일보 광고 사태에 이어서 일어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민청학련 사건)에 충격을 받고 이 사건을 맡은 황인철, 홍성우 변호사에게 찾아가 변론에 동참하겠다고 요청하면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인권변호사 활동 시절인 79년 가톨릭농민회 사건 때는 고문에 못 이긴 의뢰인 오원춘씨가 법정에서 검찰이 시킨 대로 거짓 증언을 하는 바람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허탈하게 돌아왔다. 70~80년대 고락을 함께한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은 “재판을 마친 후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데 선생이 중앙통로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말했다.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고인은 ‘인권변호사들의 맏형’으로 불리게 된다. 사실상 인권변호 활동의 총지휘자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시국사건이 일어나면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변호인단 분배, 피고인 접견, 변론 준비를 도맡았다. 동일방직 사건, YH 사건,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 통혁당재건 사건 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갔다.
광주민주화운동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문을 연 80년대에는 소수 인권변호사들의 고군분투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국사건들이 쏟아졌다. 그때 조영래, 최병모, 박원순 등 10여명의 변호사들이 이돈명 변호사를 찾아왔다. 이들과 함께 85년 최초의 인권변호사 모임인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를 조직하게 된다. 정법회는 지금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전신이되었다.
86년 말엔 옥고도 치렀다. 5.3 인천사태에 관련돼 수배 중이던 이부영 민통련 사무처장(전 국회의원)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뤘다. 그러나 이부영을 숨겨준 것은 이 변호사가 아니라 고영구 변호사였다.[1] 고영구 변호사의 노모와 와병 중이던 부인이 받을 충격을 염려해 자신이 숨겨준 것으로 했다. 이부영 전 의원은 “선생은 내 거짓진술로 예순 넘은 나이에 감옥생활을 하시게 됐는데도, 그 사건 이후 처음 만나자마자 ‘이 사람아, 자네 덕분에 나도 이제 진짜 민주투사가 됐네’라며 껄껄 웃었다”고 전했다.
이후 1988년부터 1991년까지 조선대학교 총장을 지내고 2011년 1월 11일 노환으로 별세하셨다.
2. 주요 변호 활동
- 윤보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동아투위, 조선투위 긴급조치 위반사건
- 크리스찬 아카데미 국가보안법 위반사건
- 김재규 내란음모사건
-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 문부식 등 국가보안법 위반사건
- 김지하 시인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 서울대 프락치 사건[2]
- YH 사건
- 민청학련 사건
3. 이돈명 인권상
이돈명인권상은 2011년 1월 작고한 이돈명 변호사를 기려서 천주교인권위원회가 이 시대의 인권을 위해 실천하는 사람이나 단체에 수여하기 위해 제정한 상이다. 이돈명 변호사가 남긴 인권의 발자취를 기억하고 인권의 가치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매년 1월에 시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