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영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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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강동구 갑)'''
제13대
김동규

'''제14~16대
이부영'''

제17·18대
김충환






[image]
1942년 9월 26일 ~ (82세)
1. 개요
2. 생애
3. 여담
5. 선거 이력
6. 소속 정당
7. 관련 문서


1. 개요


李富榮
대한민국의 언론인, 정치인이다. 호는 청우(靑牛)이다. 종교가톨릭으로 세례명은 이시도르이다.

2. 생애


1942년 경기도 포천군(현 포천시)에서 태어났다. 서울특별시에서 성장기를 보내며 용산고등학교(12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였다. 1974년 동료 기자들과 함께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약칭 동아투위)를 결성하여 유신 체제에 맞서 언론 자유를 수호하자는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였다가 1975년 해직되었다. 그리고 긴급조치 위반,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7년간 복역하였다. 출소 후에도 재야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였다. 1986년 5.3 인천 사태 주도 혐의로 체포되어 1988년 2월까지 복역하였다. 복역 중이던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 은폐되었다는 사실을 교도관으로부터 전달받고[1] 휴지에 관련 사실을 작성하여 김승훈 마티아 신부가 명동성당에서 이를 폭로하게 하였다.[2]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동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5년 김대중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 따라가지 않았고,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7년 통합민주당이 신한국당과 합당하면서 한나라당 소속이 되었으며, 1999년 1월에는 한나라당 원내총무로 선출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한나라당 원내총무 시절, 폐암으로 죽은 제정구 의원의 영결식 때 "제정구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 때문에 억장이 터져 '''DJ'''으로 죽었다."라는 극언을 퍼부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때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이회창의 압승으로 끝났고, 이후 선대위 부위원장을 맡아 이회창을 적극적으로 도왔지만 결국 한나라당의 집권이 좌절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 때 노무현을 향해서는 김대중 정권의 연장 선상에 있다는 것만 집중적으로 지적했을 뿐 큰 비난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참여정부 출범 전후로는 한나라당 내의 개혁소장파를 규합해 '''노무현 대통령과 개혁성으로 겨뤄보겠다는 발언을 하는 등''' 점차 참여정부 성향에 가까워지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2003년 9월 김부겸, 안영근, 김영춘, 이우재 등과 전격적으로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독수리 5형제라 불렸고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했다.[3] 이듬해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당시에는 본회의장에서 끌려나가며 격분한 목소리로 '''"이거 놔! 이거 쿠데타야!"'''라고 외쳤으며, 기자들에게도 '''"이건 완전히 쿠데타예요! 쿠데타…!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의원총회에서 탄핵을 가결했다는 거예요!"'''라면서 탄핵 주도세력을 맹렬히 비판했다. 그러나 그 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지만 한나라당 김충환 후보에 패배하여 낙선했다.
2007년 12월 6일에 JU그룹으로부터 서해자원탐사, 방문판매업 개정 등의 청탁을 받고 2억여원의 돈을 받은 혐의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과 2억 1,070만원의 추징금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었으나, 2008년 6월 고법에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아 풀려났다.
2010년 사면복권을 받고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강동갑에 출마하였으나, 강동구청장 출신 신동우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3. 여담


그의 비서를 지낸 사람 중 이해식은 전직 강동구청장이자, 현 더불어민주당 강동구 을 국회의원 이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강동구 갑 선거구에서 당선진선미는 이부영의 추천으로 강동구에 뿌리를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2017년 현재 몽양 여운형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항목 참조.

4. 대중매체에서



5. 선거 이력


  •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동 갑)

'''49,646 (38.51%)'''
'''당선(1위)'''
'''초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동 갑)

'''42,872 (39.90%)'''
'''재선'''[4]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동 갑)

'''52,147 (52.51%)'''
'''3선'''[5]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동 갑)

50,693 (43.37%)
낙선(2위)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동 갑)

57,909 (47.46%)
[6]

6.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90 - 1991
정계 입문

1991 - 1995
합당[7]

1995 - 1997
합당[8]

1997 - 2003
합당[9]

2003
열린우리당 창당을 위한 탈당

2003 - 2007
창당

2007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2007 - 2008
창당

2008
합당[10]

2008 - 2011
당명 변경

2011 - 2013
합당[11]

2013 - 2014
당명 변경

2014 - 2015
합당[12]

2015 -
탈당
정계 은퇴[13]

7. 관련 문서






[1] 그 교도관은 민주화 운동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입장이었던 터라, 이부영을 비롯한 몇몇 민주화 운동 연루 수감자들의 편의를 최대한 봐줬다고 한다. 특히 이부영에게는 '선생님'이라는 명칭으로 깍듯이 대했으며, 근처 방에서 박종철 고문에 가담했던 조한경 경위가 울부짖는 것을 들은 이부영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조심스럽게 사건의 진상을 알려준 것.[2] 영화 1987에서는 이게 잡지로 바뀌어서 나온다.[3] 정식 창당 전의 가칭이었던 국민참여통합신당(약칭 통합신당) 결성에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4] 1997년 신한국당과 합당[5] 2003.7.7. 한나라당 탈당, 2003.10.27. 열린우리당에 입당[6] 이후 정계 은퇴 선언[7] 신민주연합당과 신설 합당[8] 개혁신당과 신설 합당[9] 신한국당과 신설 합당[10] 민주당과 신설 합당[11]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12]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13]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7406581?sid=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