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1. 개요
2. 배경
3. 사건
4. 재판 과정
5. 언론의 왜곡보도
6. 반전
7. 영향력과 파급효과
8. 평가 및 에필로그
9. 대중매체에서
10. 관련 자료
11. 같이 보기


1. 개요


권 양 -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 있는 얼굴 없는 유명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 그는 무엇을 하였는가.

부천 경찰서[1]

성고문 사건 1심 결심공판 변호인단 변론 中

1986년 6월 5일 부천경찰서(현 부천소사경찰서)의 경찰관 문귀동이 학생운동가 권인숙을 성폭행한 사건. 1988년까지 2년간의 재판 끝에 가해자가 처벌되었다. 흔히들 부천서 성고문 사건, 심지어 당시에는 성고문이라는 표현도 제외하고 "부천서 사건", 또는 "부천서 권 양 사건"[2] 등으로 에둘러서 표현되었던 사건이다.
가해자 문귀동은 사건 당시 경찰관으로 자신의 지위와 권한을 이용해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고 있던 권인숙에게 성고문을 가했다. 사건은 당시 대한민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쳐 여성 인권 의식 향상, 성범죄, 성폭행 부조리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 암암리에 행해지던 부조리를 시민들이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태 당연시되던 시골이나 소규모 집단, 끼리끼리 문화, 끼리끼리 밀어주고 당겨주기,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인한 부조리를 더이상 참지 않고 폭로하는 문화 등이 1990년대 한국 사회에 포괄적으로 나타났다.
이 사건은 부천경찰서[3]1982년 개서된 이래 4년 만에 있었던 흑역사였다. 부천시에는 1981년 이전까지만 해도 부평경찰서가 치안을 담당했으나, 행정구역의 불일치, 비대한 관할 구역 문제 등으로 인해 부평경찰서의 구역을 당시 북구 일대(서구계양구 포함)로 축소시킨 것으로 보인다.[4][5]

2. 배경


1986년 5월 3일, 인천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시위[6]는 대대적인 공안 탄압을 가져오게 된다.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야당인 신한민주당과 재야 운동권 세력 간의 신뢰가 깨진 것이었다. 깨진 신뢰의 틈을 비집고 전두환 정부는 재야 운동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고, 사건이 일어난 인천 지역의 노동자 단체에 대한 탄압은 그중 가장 심했다.
당시 인천 지역에는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노동운동에 투신한 소위 '학출' 들이 많은 곳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이런 학출들이 대대적으로 체포되었다. 학출들은 학력이 너무 높다는 이유로 주민등록 그대로는 취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주민등록증을 대부분 위조한 상태[7]였고, 이는 실정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여기에 5.3 인천항쟁의 지도부 격인 인물들이 모두 도피하면서, 이들을 잡기 위해 수사가 더욱 강도 높게 진행되던 와중이었다.

3. 사건


1986년 5월 21일, 갓 학출이 되어 부천시 지역의 노동 운동에 뛰어든 권인숙이라는 여대생이 있었다. 그녀는 당시 서울대 의류학과 학생이었으며 경기도 부천시에 소재한 (주)성신이란 가스배출기 제조업체에 '허명숙'이란 가명으로 위장 취업했다. 그녀는 위장 취업에 대한 동기를 1989년 9월 11일자 전북대학교 신문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대학에 들어와 나는 2가지의 큰 충격을 맛보아야 했다. 먼저 데모 광경이었다. 학생들이 모여 노래하고 시위를 하는 것을 보면서 '난 저들과 무엇이 다른가, 구경하기도 무서운데 저렇게 뛰쳐나가는 용기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하는 것들과, 학우들이 끌려감에도 잔디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쳐다보지도 않으려는 학우들의 태연함 또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꿈과 낭만의 최고봉으로 꿈꾸어 오던 대학이 점차 황량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공연 동아리에 들었다. 이 동아리 활동이 그 동안의 이기적인 삶에 종지부를 찍게끔 한 것 같다.

"인생에 있어서 꼭 한 번쯤 경험함에 있어서 어느 것 이상으로 가치 있고 보람 있다."는 친구의 권유로 농활에 참가했다. 농활 속에서 나의 맘에 가장 와닿는 것은 3시간에 걸친 선배들의 의식화 학습이 아니었고, 노동의 힘듦과 농민들의 열심히 살아가려는 건실함, 순박함, 착함이었다. 이러한 모습들이 나에게 당연한 의문을 주었다. '자식 교육시키느라 천원 한 장 쓰는 것도 너무 아까워하는 농민들의 검소하고 근면한 삶이 왜 궁핍하고 어려운 삶이어야 하는가?'하는 것들이었다.

결국 농활을 통해 나 이외의 나와 같이 살아나가는 공동체의 '남'이 있구나 하는 것과, 처음으로 '사람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됐다. '이제까지의 나의 삶이 진정으로 노동해서, 노력해서 얻은 삶인가?'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는 살지 않겠다.'는 생각에 운동권에 뛰어들었다.

- 전북대신문 1989년 9월 11일자 5면. <권인숙 씨 초청 강연 초록 - 나의 삶, 나의 투쟁>

5.3 인천항쟁으로 인해 탄압이 격렬해지던 1986년 6월 4일 밤, 권인숙은 그녀의 정체를 의심한 통장의 신고로 자취하던 아파트에서 체포되었다. 조사 도중 권인숙이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사실이 드러났고, 여기에 당시 수배 중이던 양승조를 비롯한 고위 지도층의 소재 또한 추궁받았다. 권인숙은 5일까지 수사를 받았고, 6일 새벽에 경찰서 상황실로 다시 끌려나갔다. 그녀가 자백을 하지 않자 경찰서장이 분노했고, 당시 상황실장이던 문귀동 경장에게 수사를 지시하면서 사건이 벌어졌다.
「문귀동」판결문 요지
이렇게 끌려 온 그녀는 문 경장에게 6월 6일과 7일 2차례에 걸쳐 성고문을 당했다. 자세한 사건의 전개는 위 링크와 대한변호사협회 1986년 인권보고서[8], 김정남 저 <진실 광장에 서다> p.535~538 및 박원순이 쓴 <고문의 한국현대사 야만시대의 기록> 3권을 참고할 것. 때로는 현실은 상상보다 더 잔인하다는 점, 그리고 출판물에 적혀 있는 내용만으로 판단해도[9] 된다는 점만 언급한다. #
6월 16일부터 인천소년교도소[10]로 이감된 권인숙은, 처음에는 자살충동도 일었지만 곧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맞서기로 결심한다. 그녀의 고문 소식이 알려지며서 교도소 내 양심수들이 연대 단식을 했고, 그녀도 몸을 추스린 후 6월 28일부터 단식에 돌입했다. 이어 그녀는 7월 3일부터 문귀동을 강제추행 혐의로 인천지검에 고소하며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날 권인숙은 공문서변조 및 동행사, 사문서변조 및 동행사, 절도, 문서파손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가해자인 문귀동은 권인숙을 명예훼손 혐의로 인천지검에 고발했다.
그녀의 변호인단 9명이 7월 5일에 문귀동 경장과 옥봉환 부천경찰서장 등 관련 경찰관 6명을 상대로 독직폭행 및 가혹행위 혐의로 고발장을 제출하고, 문 경장이 무고 혐의로 맞고소하면서 사건이 널리 알려졌다.

4. 재판 과정


권인숙의 고발에 대해, 검찰의 경우 처음에는 김경회 인천지방검찰청 검사장이 사법시험 동기이자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표의 친인척인 박철언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11]의 격려로 성실히 수사하였다. 그러나 관계기관대책회의에 참석한 서동권 검찰총장이 돌연 축소 수사를 지시하여 축소 수사를 하고, 7월 16일에 검찰은 "사건 당시 성모욕 행위는 없었다"고 공식 발표를 하는 동시에 성고문을 한 문귀동을 '''기소유예''' 처분한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한 저 유명한 말이 "'''급진 좌경사상에 의한 노학연계투쟁을 전개했던 권양의 '성적모욕' 의 허위사실 유포는 운동권이 성마저도 혁명의 도구로 쓴다는 증거다'''".[12] 한마디로 '이게 다 좌파놈들의 계획적인 수작이다. 네가 잘못한 거다, 네년이 더럽다' 라는 개소리다.
그러나 이때 이미 검찰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문귀동을 조사해서 그가 실제로 성고문을 가했음을 확인한 것. 정권의 안위를 위해 검찰은 진실을 묻어버리기로 결정했다. 또 치안본부는 문귀동 경장을 파면하고 옥봉환 부천경찰서장을 경질하는 선에서 끝내고자 했다.
이러한 적반하장식 처리에 여론이 분노하여 7월 19일에 신한민주당, 민주화추진협의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그 외 여성단체와 종교단체 등이 모여 '성고문/용공조작 범국민폭로대회'를 열었지만 경찰에 의해 원천 봉쇄되었고, 검찰의 수사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9월 1일에 변호인단 199명은 인천지검에 재정신청[13]을 냈지만 기각되었고, 11월 21일에 권인숙은 징역 3년을 구형받았다.
이후 이 사건은 고등법원과 대법원을 거치며 계속 치일피일 미뤄졌다가, 1987년 4월에 권인숙 본인과 변호인단이 대법원에 상고 포기서를 제출하자, 권인숙은 결국 1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5. 언론의 왜곡보도


사건 당시 전두환 정권은 "운동권이 마침내 성까지 혁명의 도구화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역공을 가하며 언론에겐 보도지침을 통해 '부천서 성폭행 사건'이라 하지 말고 '부천서 사건'이라 쓸 것을 강요하였다. 이런 보도지침은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던 장세동이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은 물론이요, 언론의 부도덕성을 유감없이 드러내 준 사건이었다. 언론은 인권단체와 시민단체들의 간곡한 요청을 외면하고, 검찰에서 배포한 보도자료와 정권의 보도지침에 따라 앵무새마냥 읊을 것을 강요했다.
특히 이 사건 당시 조선일보의 활약은 두각을 드러냈다. 조선일보는 7월 17일자 사회면 메인 기사에서 <「성적모욕」없고 폭언-폭행만 했다>는 검찰의 발표문을 제하로 뽑아 검찰의 주장을 기정 사실화했다. 거기에 '''"운동권, 공권력 무력화 책동"'''이란 터무니없는 제목까지 달았다. 또한 <「부천서사건」 공안당국 분석>이란 제하의 기사에서도 "급진세력의 투쟁전략/전술 일환", "혁명 위해 '성'까지 도구화한 사건"이라는 검찰 발표 내용을 제하로 뽑아 피해자인 권인숙의 인권을 철저히 유린했다. 나아가 7월 18일자 사설 <「부천사건」에서 얻는 것>에서 "이 시점에서 수사권 밖의 진실이 어떠했는가를 가릴 능력도 없고 그럴 입장도 못 된다."고 주장했다.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보고서는, 조선일보의 성고문 보도를 왜곡보도의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당시 보고서를 읽은 조선일보 기자들은 표현하기 어려운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해당 신문 제작 책임자 선에서는 "이 보고서는 (조선일보에 대한 반감이 뿌리깊은) 동아일보 해직자들 작품이다"는 엉뚱한 반응을 내놓았다. 이것보다 더 충격적인 얘기도 있는데, 1987년 7월 18일 조선일보 사회부 평기자들이 쓴 <조선일보 편집에 관한 의견서>에 따르면 사건 당시 편집국 내에선 "어떻게 다 큰 처녀가 자기가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남에게 내세울 수 있느냐, '''보호해 줄 가치가 없다"'''는 얘기가 오갔다고 한다.
또 언론사의 사회부장 이상 간부들은 7월 16일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발표를 전후해 문공부 고위 관료의 인솔 하에 '간담회' 명목으로 부산, 도고온천 등에 놀러가 해당 사건의 보도에 대한 협조의 대가로 정부 당국이 준 거액의 촌지를 받아 챙겼다. 또한 법원 출입기자들도 검찰 발표 당일 인천지검 출발 전에 법원 기자실에 들른 법무부 고위 당국자로부터 거액의 촌지가 든 두툼한 봉투를 나누어 받았다.[14]

6. 반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6월 항쟁은 거짓의 역사를 끝냈다. 변호인단이 1988년 1월에 '재정신청 조속 처리 촉구서한'을 대법원에 내자, 상황이 완전히 바뀌면서 차일피일 미루던 재정신청을 법원이 전격 수용하여 2월 9일 대법원에서 재정신청[15]을 수용했다. 1989년 문귀동은 징역 5년, 자격정지 3년 및 위자료 지급을 선고받고 교도소로 직행했다. 이때 처음으로 특별검사가 임명되어 이 사건을 맡았다. 반면 권인숙은 6.29 선언 직후인 1987년 7월 8일에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는 여론에 따라 가석방되었다.
이후 권인숙은 명지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부설 연구소인 '울림'의 초대 소장을 지냈고, 2004년에는 군대 내 성폭력 문제에 대한 실태 조사를 하는 등, 권력과 폭력의 관계를 깊게 연구해왔다고 전한다. 그리고 2017년 3월 8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의 대선 캠프에도 합류하였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는 법무부 성희롱·성범죄대책위원회 위원장, 한국여성정책연구원장에 임명되었다. 2020년 4월 15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시민당에서 영입을 통해 비례3번을 받아 당선되어, 더불어민주당과의 합당으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7. 영향력과 파급효과


이 사건은 여성 인권 운동과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압, 부조리가 폭로되기 시작한 도화선이며, 당연하게 여겨지던 부조리나 소규모 집단, 시골 등에서 벌어진 부조리를 시민들이 포괄적으로 폭로하게 된 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경찰관이 자신의 지위와 권한을 이용해 성폭력을 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민족모순'이 먼저냐, '계급모순'이 먼저냐로 분열돼 있던 민중운동 계열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당시 정치투쟁에 가려져 있던 여성운동권 역시 페미니즘 담론에 관심을 가지는 큰 계기가 되었다. 이상록도 "민중운동권 역시 반성해야 할 점이 있다"며 아래와 같이 촉구했다.

당시의 민중 운동가들은 여성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깊이 받아들여 해결을 모색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정치투쟁에 여성문제를 활용하고 있었다. (중략) '여성들의 문제는 여성들 스스로 해결하라'는 남성 노동 지도부의 방임적 태도는, 여성들로 하여금 여성 자신의 고유한 문제들에 보다 관심을 갖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울러 계급문제나 민족문제가 해결되면 여성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식의 입장은 여성운동 내부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 <20세기 여성 사건사: 근대 여성교육의 시작에서 사이버 페미니즘까지(여성사 연구모임 '길밖세상' 편.)> '시민을 성폭행하는 민주국가 대한민국: 1986년 부천서 문귀동 성고문 사건' 부분. 이상록 글. 여성신문사. 2000. p237

여성 인권 외에도 국가 공권력의 권력을 이용한 갑질 폭로 측면에서도 영향력을 미쳤다. 여태 부당한 대우라도 권위라는 이름하에 한국사회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이 사건의 폭로로 여성 인권 의식 향상은 물론이고, 성범죄, 성폭행 부조리 뿐만 아니라 시골이나 소규모 집단, 끼리끼리 문화, 끼리끼리 밀어주고 당겨주기, 혈연, 지연, 학연, 업연, 학맥 등의 부조리도 더이상 참지 않고 폭로하는 문화 등이 포괄적으로 나타났다.

8. 평가 및 에필로그


이 사건은 5공 정권의 부도덕성을 다시금 드러내었다. 그리고 경찰의 흑역사이기도 했다. 이때 제대로 뿌리를 뽑지 못한 고문의 마수는 기어이 한 대학생의 생명을 앗아간다. 바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다. 그리고 이는 6월 항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사건의 후일담 및 에필로그는 다음과 같다.
  • 문귀동은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면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 자는 자신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바로 그 종교를 팔아먹은 자이고, 결혼해서 1남 1녀를 둔 가장인데도 말이다. 사건 후 경찰직에서 퇴직금 없이 파면되어 1987년에 자신이 거주했던 아파트를 담보로 9천만원을 빌려 구두공장 '보광상사'를 세워 운영했으나 경영능력 미숙과 7월 장마로 침수되어 7개월만에 사업을 접었고,[16] 1988년 기소 전까지 먼 친척형이 운영하는 주택업체에서 소일했다. 1993년 만기출소 후 어머니와 형의 금전적 도움을 받으며 은둔생활을 했고, 9월 2일에는 같이 근무했던 경찰관들의 도움으로 부천시 심곡2동 조이너스빌딩 지하에 단란주점 '가빈'을 차렸으나 불법운영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1994년에는 재판 도중에 배상금조차 내지 않고 자신의 처형 앞으로 근저당권을 설정했다가 강제집행면탈죄로 검거되어 물의를 빚은 바 있었으며, 이후 단란주점을 다른 사람에게 팔고 잠적해 행적은 알 수 없다. (1996년 국민일보 기사)
  • 1986년 2심 당시 재판장으로서 권인숙의 재정신청을 기각한 이철환 서울고법 형사3부 부장판사는 이후 부산지방법원장, 제주지방법원장, 춘천지방법원장, 광주고등법원장, 대전고등법원장 등을 거쳐 1999년 이후 변호사가 됐으나, 광주고등법원장 시절이던 1993년에 인천에서 부동산을 소유하며 법관들 중 최고액인 78억 5천만원을 등록해 파문이 일었다.
  • 당시 인천지검장이던 김경회는 2001년 사후 4개월 뒤 중앙일보에 게재된 유고 칼럼에서 사건 당시 정부의 횡포에 대해 개탄했다.
  • 사건 이후 한국 사회는 지위나 권위, 권력을 이용해서 폭압적으로 나오는 것을 부당하게 여기는 목소리가 늘어났다. 그 결과 1992년 이후 성폭력, 성차별 사건은 물론이고 지위에 의한 갑질, 폭언, 권한 남용 등을 망설임 없이 폭로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 권인숙은 출소 후 노동운동계에 남았다가 1994년 여성학 전공을 위해 유학, 현재는 여성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주 연구주제는 '군사주의와 여성' 이다. 이후 명지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문재인 정부에서 공직을 맡았다. 2005년에 <대한민국은 군대다>라는 책을 내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이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시민당[17] 비례대표로 3번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이 사건의 변호인단은 1980년대 당시 인권변호사들의 총 집결이었다. 대충 언급하자면 조영래, 홍성우, 이상수, 박원순 등이 포함된 거의 인권변호사 올스타에 가까웠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과 이 사건 변호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으로 발전한다. 대표변호사인 조영래는 변호인단의 중심으로 재정신청 및 사건에 대한 폭로까지 앞장섰다. 위의 변호인단 변론도 그가 작성한 것이다.
  • 이 사건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위 인권변호사들 중 한 명이 나중에 직접적인 빨갱이 논란에 시달렸다. 그리고 권인숙이 재직 중이던 명지대학교에 있는 또 다른 교수는 "이 인물에게 후보직을 양보한 인물 역시 "대한민국에 빨갱이가 어딨냐"는 식으로 말했다."[18] 는 내용으로 특정 인물을 폄하하는 칼럼을 쓴 후 학교 내외에서 "권인숙 교수에 대한 예우도 없냐"는 비아냥을 당한다.
  •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1986년 7월 21일 명동성당 미사[19]에서 "나는 권 양의 고소와 변호인단의 고발이 사실이라고 믿는다"고 직접적인 발언을 했다. 검찰이 성의 혁명 도구화 운운하던 시점에서 검찰과 전두환 정부에 직격탄을 가한 발언이었다.
  • 당시 MBC 보도국 간부로 성의 혁명 도구화를 크게 선전하고 보도한 인물이, 노조원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2008년 YTN 사장으로 취임한 구본홍이다. 문귀동에 대하여 그는 신앙을 들먹이며 옹호했다. 그는 2010년 5월부터 기독교 방송 CTS 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 이 사건에 관해 "'성의 도구화' 부분을 크게 쓰고, '성고문'을 '성모욕'으로 바꾸라"고 지시한 문건이 안기부에서 나와 문공부를 거쳐 언론사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대로 보도가 나갔다. 1986년 9월 9일 이 문건을 포함해 정부가 언론사에 하달한 584개 문건이 폭로된다. 바로 보도지침이다.
  • 김완섭도 저거 가짜 아니냐며 깠다. 참고로 김완섭은 광주 5.18 유공자로 누구보다도 5공화국에 적대감이 강했다. 적대감이 엉뚱하게 변해서 그중 하나가 반 경상도 감정이 되었지만...그의 권위주의 혐오와 부당한 애국심 강요 비판은 당시에도 수많은 호응을 얻기는 했다. 그러나 김완섭의 다른 일부 몇몇 주장도 그렇듯이 이것도....
  • 고발장을 보면 "최고학부까지 다닌 한 처녀가 입에 담기조차 수치스러운 저 끔찍한 강체추행을 당한 사실을 스스로 밝힌 이상, 그 밖에 또 무슨 증거가 필요해서 수사를 못 한다는 말인가?" 라는 문장이 있다. 그런데 피해자의 진술에서 가해자 성기의 형태와 어디에 점이 있었는지 진술했는데, 조사결과 진술내용이 거의 맞았다.

9. 대중매체에서


  • 2003년작 봉준호 감독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김뢰하가 연기한 조용구 형사가 미쳐 날뛰는 계기가 된다. 혐의자인 박현규(박해일)를 취조하면서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군홧발로 마구 폭행한 조용구 형사는 신 반장(송재호)에게 계단 위에서 걷어차여 굴러떨어지는 혹독한 질책을 받고, 다신 취조에 참여하지 못하는 처분을 당한다. 이에 울분이 쌓인 조용구는 낮부터 고깃집에 들어가서 술을 마셨는데, 텔레비전에서 성고문 사건 관련 뉴스가 나오자 운동권 학생들이 "무식한 형사 새끼들의 을 다 짤라버려야 한다!!"고 욕을 한다. 이에 흥분한 조용구가 텔레비전을 부수고 여대생들을 "교수랑 붙어먹는 더러운 년들!"하면서 구타한다. 이때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백광호가 휘말리게 되는데...
  • 2014년작 SBS 드라마 끝없는 사랑에서도 이 사건이 나오는데, 주인공 서인애가 주민등록증 위조혐의로 구속됐다가 경찰관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대생 윤지혜[20]를 변호해주면서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5공 몰락의 신호탄을 쏘아올린다. 그리고 안기부장 천태웅은 '이 사건이 사실이라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이 사건으로 인해 정권이 몰락될까봐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한다.'라고 말하는 청와대 경호실장과 안기부 차장 박영태와는 달리 아주 태연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위에서도 서술되어 있듯이, 실제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당시의 안기부장은 장세동으로,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한다"는 말과 함께 보도지침을 내렸다고 알려진 인물.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상당히 다른 인물로 나온다.
  • 2017년 12월 개봉한 영화 1987의 초반에서 최환 공안부장검사로 분한 하정우의 입에서 "부천서 사건 때처럼 경찰들 말만 듣고 기소유예했다가 독박 쓴 거 기억 안 나냐"는 식으로 언급된다.

10. 관련 자료



11. 같이 보기


[1] 부천 남부경찰서를 거쳐 현재 부천 소사경찰서이다.[2] 앞서 언급된 성만으로 알고 있는 유명인사라는 것이 이를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건명에는 가해자명을 사용한다는 것을 보면 사건 이름 하나하나마저도 의미심장하다.[3] 이후 부천남부경찰서로 이름이 바뀌었고, 다시 부천소사경찰서로 바뀜.[4] 그 시기에는 김포경찰서, 강화경찰서가 각각 별개로 있었던 것에 비하면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5] 부천지역 전화도 부천전화국이 신설된 1976년까지는 부평전화국이 담당했다.[6] 인천 5.3 운동 혹은 흔히 5.3 인천사태[7] 이 때문에 권인숙은 허명숙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다.[8] 대한변협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가능.[9] '''문귀동이 피해자에게 가한 행위는 국내법상 강제추행죄 구성요건을 정확히 충족시켰다.''' 해당 판례와 통설은 남성기와 여성기가 접촉하는 정도로는 강간이 성립되지 않고, 남자 성기가 여자 성기에 완전히 함몰하는 순간 강간죄의 기수에 이른다고 본다. 즉 간음행위 혹은 성교에 이르지 않았으므로 본 사안에서 강간죄는 성립되지 아니한다.[10] 현. 인천구치소, 경북 김천소년교도소.[11] 검사 출신이었다.[12] 성의 혁명 도구화 운운은 50년대의 반공검사들인 오제도, 선우종원 시절부터 유구하게 나오던 드립이었다.[13] 검찰의 불기소에 대해 법원 직권으로 재판하는 것.[14] 원 출처: <곡필로 본 해방 50년(김삼웅 저.)> 한울. 1995. p381~384.[15] 기소독점주의상 검사밖에 기소를 할 수 없으나 이 사건의 경우 검사가 전부 기소를 거부했다.[16] 해당 사실은 <주부생활> 1987년 9월호에 실렸다.[17] 이름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더불어민주당과 연관이 있는 정당이다. 이 당이 창당된 이유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항목 참조. 선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더불어민주당과 합당하였다.[18] 라고 돌려썼지만, 저 때 참가한 인권변호사들 중 이후 공직선거에 출마하면서 타 후보와 경선을 치르지 않고 양보를 받은 사람은 딱 한 명이다.[19] 이런 미사는 여러 번 빛을 발하게 된다. 단적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되었음을 폭로한 것도 명동성당에서 한 미사였다.[20] 권인숙을 모티브로 만든 가상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