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성(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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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교육자, 정치인.
2. 생애
1937년 함경남도 함흥부에서 당시 함흥지방법원 판사였던 이충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8.15 광복 이후 월남하여 성장하였고 서울고등학교(8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3] 이후 모교인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유년기의 일화로는 해방 직후에 백범 김구 선생의 강연을 듣고 감동을 깊게 받았으며, 김구 선생이 암살당했을 당시 초등학생인 나이에도 장례식에서 참여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후에 백범선생기념사업회장 등을 지냈다.
1980년 5월 15일 당시 대학생과 시민 15여만명이 계엄령 해제, 전두환 퇴진 등을 외치면서 서울역 앞에 집결하여 시위를 벌이자, 당시 서울대 학생처장 신분으로 보안사령부와 교섭하여 '무사귀교보장'을 약속받고 학생회장단을 설득하였다. 소위 서울역 회군 사건이다.
당시 시위학생들이 남대문을 넘어설 경우, 신군부의 강력한 진압작전이 준비돼 있다는 얘기를 내무장관을 통해 들었고, 그는 즉시 현장에 나가서 학생들을 설득하여 해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학생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서울역에서 서울대학교까지 걸어서 돌아왔으며, 학교로 돌아온 그는 아직 밥을 못먹은 시위 학생들에게 교직원들을 동원하여 학생식당에서 따뜻한 밥을 해먹였다.
그러나 이후 신군부가 5.17 내란을 일으키면서 시위하러 가는 학생들에게 차량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국군보안사령부에 끌려가서 고문당하였다. 이때문에 지금까지도 허리가 안 좋다.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재임하던 1995년 12월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이후 1997년 신한국당 상임고문에 임명되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한국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다. 당시 이회창이 대세론을 형성하면서 앞서나가자, 2위권을 형성하고 있던 이인제, 이한동, 김덕룡, 이수성은 반이회창 연대를 내걸고 1차투표에선 서로 경쟁하지만, 2차 결선투표에선 누가 진출하든지 표를 몰아주기로 약속하였다. 대의원 12,000여명이 투표한 후보 경선에서 이수성은 13.6%를 얻으면서 5위로 탈락하였다.[4] 그리고 이어진 결선투표에선 4자연대의 약속이 무색하게, 이회창이 60%를 득표하면서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로 정해졌다. 그리고 이수성은 계속 이회창 후보와 극심한 갈등을 빚다가, 대선을 불과 한달 남겨둔 11월 초에 신한국당을 탈당하였다.
김대중 정부 때는 구 여권 출신 인물임에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을 역임하였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칠곡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의 TK 바람으로 서울대학교 법대 제자인 한나라당 이인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화합과도약을위한국민연대'라는 당을 창당하여 출마하였으나, 사실상 정동영 후보를 지지하며 중도 사퇴하였다.[5] 이수성 후보사퇴…사실상 '"정동영 지지"
제자로, 조준현 성신여자대학교 법학과 교수, 오영근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기헌 명지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한인섭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강동범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조국 문재인 정권 초대 민정 수석인 서울대 법대 교수, 세월호 특별조사위원이었던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이 있다.
정치적으로 전형적인 화해/통합주의자 이지만, 대학교수 시절 반독재민주화운동, 진보적 학생운동에 매우 유화적이었다. 1980년 서울역회군 당시 학생들을 대신해서 보안사령부와 교섭한 일화는 유명하며, 이후 문민정부 시절인 1994년에는 서울대 총장 신분으로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이 주도한 총학생회 출범식에 참석해서 축사를 하기도 했다. 또한 1967년엔 데모주동자였던 제자 손학규와 조영래 학생을 관용차로 학교 밖으로 탈출시킨 것으로도 모자라서,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 경북 칠곡으로 까지 피신 일화도 있다.
워낙 인맥이 넓어서, 한때 김상현 전 국회의원, 김재기 전 주택은행장과 함께 '한국 3대 마당발'로 불리기도 했다. 알고 지내는 지인만 5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유인경이 만난사람]이수성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
동생으로 이수인 전 교수, 국회의원이 있다. 단 동생 이수인은 정치적으로 개혁성향으로 주로 민주당계 쪽에서 활동하였다. 문민정부 시절에는 동생 이수인이 야당 국회의원으로 국회 본회의에서 형인 이수성 국무총리한테 대정부 질의를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뉴스자료화면
3. 선거 이력
4. 소속 정당
[1] 인근의 심천리와 함께 광주 이씨 집성촌이다.[2] 좌통례공파(左通禮公派, 칠곡파) 21대손 수(壽)◯ 항렬. 아버지 이충영(李忠榮)은 20대손 ◯환(煥) '''◯영(榮)''' 항렬.[3] 김용준 헌법재판소장과 고교-대학 동창이다.[4] 당시 2위 이인제 14.7%, 3위 이한동 14.6%, 4위 김덕룡 13.8%로 이수성까지 2위권 후보 4명의 득표율을 간발의 차이였다. 실제 2위 이인제와 5위 이수성의 표차이는 고작 129표였다.[5] 이후 그가 만든 화합과도약을위한국민연대는 이듬해 열린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불참하다가, 2009년에 자진해산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