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H 사건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벌이는 YH무역 여공들.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뒷이야기
5. 관련 문서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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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9년 8월 9일, 가발 업체였던 YH무역의 여성 노동자 170여 명이 회사 운영 정상화와 근로자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서울 마포구 도화동 신민당사[1]에서 농성을 벌였던 사건이다. 'YH 여공 신민당사 점거 농성 사건'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으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신민당 총재 직무를 정지당한 뒤 결국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당하기까지 했고, 나아가 부마민주항쟁을 촉발시켰으며, 결과적으로 10.26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사실상 유신 공화국 붕괴의 효시.'''

2. 배경


YH무역은 1966년 10여명의 사원으로 출발한 가발회사로 가발 수출의 호경기와 정부의 수출 지원 정책에 힘입어 창립 4년 만인 1970년에 종업원 3,000명의 국내 최대 가발업체, 수출 순위 15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YH무역은 회사 창립자 장용호와 그 친인척이 경영하며 미국으로 외화를 반출시키기도 하였고,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고용했을 뿐 아니라 노골적인 불법 해고, 부당 전직 및 전출, 감봉 등의 행위를 자행했다.
회사의 처사에 견디다 못한 가발업체 여성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1975년 3월 담당 감독의 독단적 인사이동 등 제반 문제로 건조반 2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작업을 거부하였고, 이를 계기로 5월 24일 전국섬유노조 YH지부를 결성했다. 이에 앞서 회사 측은 건조반 조장이었으며 YH노동조합 결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김경숙·박금순·이옥자·전정숙 등을 해고하였고, 최고참인 최순영에게 강원도 하청공장으로 출장 명령을 내렸다. 회사의 방해로 설립신고를 한 달 만에 겨우 마친 노동조합은 조직 강화 활동과 사내 질서 안정을 기한다는 취지로 대의원대회를 비롯한 기숙사 자치회 구성, 소그룹활동, 교육, 수련회 등을 가지며 회사와 지속적으로 노사협의를 시도했다. 노조는 1975년 12월 50%의 상여금 지급을 성취하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의 경영상태는 무리한 사업 확장 등으로 악화되어 은행 부채가 급증하였고 이에 회사는 공장 이전, 위장 휴업 등의 형태를 취하면서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여 노동조합은 1978년 5월 9일 제3차 정기대의원대회를 개최하였고, 회사의 위장 휴업 등을 지적하면서 농성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1979년 3월 29일 회사는 결국 부채와 적자 운영, 노조의 임금 인상 요구 등의 이유를 제시하며 4월 말로 폐업한다는 공고를 붙였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4월 6일 긴급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회사 정상조업을 위한 대책과 사업장 폐쇄가 불가피한 상황에 대한 대비, 타업체의 인수 및 고용 승계 등 대책을 협의키로 하였다. 노조는 결의문을 통해 폐업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극한투쟁도 불사한다고 경고했다. 회사나 관계 기관들은 회사정상화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노동자들은 7월 25일 긴급대의원대회를 열어 7월 30일까지 정상화 해결이 없으면 조합원 총회를 열기로 결의하였다. 7월 30일까지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되지 않았고, 이에 노동자들은 7월 30일 조합원 총회를 열고 회사정상화를 요구하며 야간 농성에 돌입하였다.

3. 전개


노동자들의 주간 조업, 야간 농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8월 6일 회사는 일방적으로 폐업 공고를 내고, 7일에는 기숙사 식당까지 폐쇄하고, 퇴직금·해고수당을 8월 10일까지 수령하지 않으면 법원에 공탁한다고 공고하였다. 이에 YH 노동자들은 야당인 신민당에 호소하기로 결정하였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이들의 호소를 받아들여 흔쾌히 신민당사를 집회 장소로 내어주는 한편, 당직자들을 동원해 주변을 감시하는 경찰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YH무역 여성노동자 187명은 8월 9일 마포구 신민당사에서 회사 정상화와 노동자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농성 투쟁을 시작하였다. 8월 10일 노동자들은 긴급결사총회를 열어 YH무역을 은행관리기업으로 인수할 것과 장용호 회장을 소환할 것, 기업 정상화와 생계대책을 강구할 것 등을 결의하며 계속 농성을 하였다.
박정희와 여권은 YH사건 배후에 김영삼 총재가 있다고 확신했다. 신민당 당사를 40시간 동안이나 노조 농성자들에게 내준 것 자체가 그렇다. 이런 와중에 신민당에 내분이 일었다. 조일환씨 등 신민당 간부 3명이 김영삼의 총재직 당선은 무효라며 서울지방법원에 직무정지가처분 신청을 냈다.

"1979.8.9.10:00시경, YH회사 200여명이 회사 내 문제해결을 요구하며 신민당사에 집결하여 농성을 벌임으로서 발단이 됐습니다. 8.10.10:00경, 김계원과 김재규가 강제해산을 결의했습니다. 사람들이 투신을 하면 그물망, 매트리스 등의 안전장구가 있어야 하는데 당시는 숫자가 부족함으로 며칠간 연기하자는 실무자들의 건의가 있었지만 김재규부장의 강행지시로 안전대책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8.11.02:00에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 해산한 적이 있습니다.”

1979년 11월 18일, 계엄군법회의 당시 김정섭의 진술

8월 11일 새벽 2시 1,000여 명의 경찰이 이른바 ‘101작전’을 개시하고 신민당사에 난입하여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강제 연행하였다. 작전은 23분만에 종료되었지만 그 23분 동안 이들을 막는 신민당원들과 집회 참가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으며, 마음대로 건물을 부수고 사무실로 쳐들어가서 관계자들까지 닥치는 대로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김경숙(21, 노조 집행위원)이 사망하고 신민당 의원과 당원, 취재 중이던 기자, 신민당사에서 일하던 용역, 경비들까지 경찰에 무차별 구타당하여 중경상을 입었다. 심지어 김영삼 신민당 총재박권흠[2] 대변인까지도 경찰에 폭행당해서 '''갈비뼈가 골절되고 얼굴이 뭉개졌으며''', 박용만 의원은 다리가 부러지고 황낙주 원내총무가 어깨를 얻어맞았다. 김영삼 총재는 구속까지는 되지 않았으나 상도동 자택에 끌려나가는 수모를 겪었다.
경찰진입을 막다가 형사들에게 강제로 끌려나가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 참고로
신민당사에서 상도동 자택으로 끌려가는 동안 형사들에게 모욕적 언사를 들어
가며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이날 경찰은 노조 지부장 최순영 등 여공 172명과 경찰의 강제 연행을 제지하던 신민당 당원 26명을 강제로 연행하였다. 또 정부는 YH무역 노조의 신민당 농성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인명진·문동환 목사, 이문영 전 고려대 교수, 시인 고은 등 8명을 구속하였다.
특히 진압 직전 김영삼의 모습이 압권이었는데, 이순구 서울시경국장이 전화를 걸어 총재를 바꾸라고 고압적으로 말하자 김영삼은 건방지다며 전화를 끊어버렸고 진압 작전이 시작되자 신민당사 밖에 2000명의 경찰이 몰려온 상태였음에도 이를 지휘하던 허웅 마포경찰서장에게 다가가 '''"네놈이 저 여공들을 모두 죽이려 하냐!"'''라는 말과 함께 '''싸대기를 날렸다고'''(!). #한편 양일동이 당수인 민주통일당도 경찰의 진압을 비난하며 이 투쟁에 동참하였다.
신민당과 민주통일당은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깝다'''"라는 플랜카드를 걸고, 김경숙 사인 규명과 책임자 문책 등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렸었고, 미국 국무부에서도 "경찰의 강제해산 조치는 분명 지나치고 가혹하다"는 성명을 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이 반발하자 미국 국무부는 "국무성은 지난번 성명의 입장을 고수한다. 한국 당국이 관련자를 징계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 바란다."는 논평을 다시 내보냈다.
이에 조일환 의원 등이 법원에 제출한 총재직 제명안이 가결되자 감정이 격화된 김영삼은 NYT와의 인터뷰에서 "The time has come for the United States to make a clear choice between abasically dictatorial regime, increasingly alienated from the people, and the majority who aspire to democracy. (국민들로부터 유리된 소수의 독재 정부냐,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대다수 대한민국 국민이냐, 둘 중 하나를 미국 정부가 선택해서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것이다.)"는 발언을 하였고 이를 문제삼은 공화당은 '''김영삼의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게 된다.'''
결국 1979년 10월 4일, 김영삼은 국회의원에서 제명된다. 이는 헌정 사상 최초의 일이며 이 이후로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런 일은 없었을 정도로 초유의 사태였다. 김영삼 총재는 국회의원에서 제명된 직후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성명문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지금까지 정치권에서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다.
김영삼의 국회의원 제명은 김영삼의 고향이었던 부산지역 민심을 건드렸고, 이 민심은 부마민주항쟁을 촉발하였다. 또한 부마민주항쟁은 김재규의 10.26 사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니, 학계에서는 사실상 YH 사건이야말로 유신체제 종식의 방아쇠 역할을 한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4. 뒷이야기


노동운동계의 대부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더불어민주당전순옥 비례대표 의원은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 YH 사건과 숨겨진 뒷이야기를 꺼냈다. 중앙정보부가 깊게 개입되어 있었으며,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시위를 잔인하게 진압해서 살해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물론, 김경숙 씨도 마찬가지다.
사건의 원흉인 ‘YH무역’의 당시 본사 건물은 현재 서울특별시 중랑구 사가정로49길 53 (면목동)에 지금도 남아있으며 ‘원진재단 부설 녹색병원’이라는 이름으로 골조는 그대로 둔채 외장과 내장을 리모델링해서 사용중이다.[3] 실제로 병원을 이용해보면 전에 가발공장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깔끔한 건물외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천장과 병원답지않은 동선(많은 문턱 및 미로같은 구조)을 가짐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위와 같은 사연에 기인한다.
또한 당시 경찰 손에 죽어간 김경숙이 사용한 기숙사 건물도 남아 있는데 병원 북쪽에 위치한 야외 주차장의 관리소로 사용되고 있다. 또 주차장 왼쪽으로는 당시 부속건물로 사용된 본관만큼이나 큰 규모의 별관도 남아 있다. 외관만 봐선 전혀 과거의 상흔을 느낄 수 없는 현재의 녹색병원이고 과거 YH무역 본사였던 건물과 달리 기숙사와 별관은 최소한의 개보수만 이루어진채로 과거의 상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2015년에 서울시는 도화동 구 신민당사 자리(SK HUB Green) 근처 인도에 김경숙 노동자가 사망했음을 알리는 동판을 새겼다.
이 병원과 원진재단도 내막을 보면 상당히 가슴아픈 내용이다. 바로 유명한 원진레이온 사태가 알려진 뒤, 그 직업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과 가족들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병원과 재단이기 때문이다. 위에 나왔듯이 YH 사건이 왜 발생했는지를 생각하면 슬픈 인연이다.
이 사건의 빌미를 제공했던 장용호 대표(미국인)는 현재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족들과 잘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주한국일보인용.

5. 관련 문서



6. 여담


  • YH무역 노조 지부장을 포함한 사건 당사자들은 김영삼 전 대통령 사망 당시 분향소를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 #
[1] 현 SK HUB Green 자리.[2] 정작 전두환이 집권하자 여당인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였다.[3] 공장 폐쇄 직후 서울기독병원으로 사용된 것을 인수하였다.[4] 전순옥 의원이 필리버스터 중에 사건의 내막을 진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