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드 뤼지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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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왕국의 제9대 공동 국왕'''
'''즉위명'''
시빌(Sibylle)
(Guy)
'''이름'''
시빌 당주(Sibylle d'Anjou)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
''' 출생일'''
1159년
1150년 전후
'''출생지'''
예루살렘 왕국 예루살렘
프랑스 왕국 뤼지냥
''' 사망일'''
1190년 7월 25일 (31세)
1194년 7월 18일(43~44세)
'''사망지'''
예루살렘 왕국 아크레
키프로스 왕국 니코시아
''' 매장지'''
예루살렘 왕국 아크레 불명
키프로스 왕국 니코시아 템플기사 교회
''' 가문'''
앙주 (House of Anjou)
뤼지냥 (House of Lusignan)
'''부모'''
부친 아모리 당주
모친 아녜스 드 쿠르트네
부친 위그 8세 드 뤼지냥
모친 부르고뉴 드 랑콩
''' 배우자'''
굴리엘모 델 몬페라토[1]
기 드 뤼지냥
시빌 당주
'''자녀'''
보두앵 5세
알리스 드 뤼지냥
마리 드 뤼지냥
알리스 드 뤼지냥
마리 드 뤼지냥
'''종교'''
로마 가톨릭
''' 재위기간'''
1186년 8월 말 ~ 1190년 7월 25일 (3년 11개월)
1186년 8월 말 ~ 1190년 7월 25일 (3년 11개월)
1. 개요
2. 프랑스에서의 행적
3. 예루살렘 왕국에서의 행적
4. 하틴 전투에서의 패배(1187)
5. 포로 석방 후
6. 기타


1. 개요


십자군 전쟁 당시의 기사. 프랑스어로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이며 영어로 Guy of Lusignan이라고 쓴다. 그 외에 예루살렘의 기(Guy of Jerusalem), 키프로스의 기(Guy of Cyprus)란 칭호도 존재한다.

2. 프랑스에서의 행적


  • 뤼지냥 가문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은 링크 참고
프랑스 푸아투 출신으로, 뤼지냥 가문은 푸아투 지역의 영주이면서 동시에 아키텐 공작에게 종속된 위치에 있었다. 1168년, 기와 그 형제들이 당시 근처를 약탈하고 귀환하고 있던 잉글랜드의 대귀족이자 최강의 세력을 가졌던 솔즈베리 백작 패트릭을 살해하고 그 일행을 납치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포로로 잡혀간 인물 중에는 훗날 잉글랜드의 대귀족이 되는 윌리엄 마셜도 있었다. 게다가 패트릭은 다름아닌 아키텐의 엘레오노르[2]를 호위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대형사고. 더 상세히 사고를 설명하자면, 아키텐에 종속된 사람이 아키텐을 소유한 사람[3]의 친구이자 호위하는 사람을 죽이고, 그의 물건을 털어갔다. 명백한 반역인 셈. 쉬운 말로 명색이 귀족이지 그냥 동네 깡패나 다를 바 없었다.[4]
당시 아키텐 공작을 대행하고 있던 사자심왕 리처드 1세는 이 보고를 듣고는 진노하였으며, 당장 기와 그 형제들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프랑스에서 쫓겨난 기는 그의 형 아모리가 있던 예루살렘 왕국으로 건너갔다. 이를 계기로 기는 예루살렘 왕가의 가신 자격으로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3. 예루살렘 왕국에서의 행적


이 시기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은 보두앵 4세였는데, 공교롭게도 나병 환자였던 까닭에 후계자를 놓고 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가 망명한 시점에는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5]에데사 백작 보에몽이 연대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에, 보두앵 4세는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1180년 기를 누이 시빌라와 혼인시켜 야파와 아스칼론의 백작으로 서임하였다. 그리고 1182년에는 섭정으로 임명하여 왕국의 전권을 맡겼다.
하지만 기는 르노 드 샤티용(또는 샤티용의 레이날드)과 동맹을 맺고 이슬람 상단을 공격하여 살라흐 앗 딘과 맺은 휴전조약을 파기해 버렸는데, 이는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상황을 봐서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결국 분노한 보두앵 4세는 시빌라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보두앵 5세를 공동왕으로 세우고, 기의 섭정직을 박탈하였다. 더 나아가 시빌라와 기의 혼인도 파기하려 하였으나 공교롭게도 1185년 나병으로 숨을 거두면서 파혼은 없었던 일이 되었다. 게다가 보두앵 5세가 이듬해 사망하면서 그 뒤를 이어 시빌라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은 발리앙의 양녀인 이자벨[6]과 시빌라의 다툼으로 왕위 계승 문제가 심각했다. 이사벨의 남편 옹프루아가 기 드 뤼지냥을 지지하자 발리앙-레몽 세력은 시빌라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는 대신 기와의 파혼을 조건으로 내걸며 타협을 시도했다. 시빌라는 이를 받아들여 순조롭게 여왕에 즉위하였으나, 여왕에 오르자마자 기를 다시 남편으로 지목하면서[7] 기 드 뤼지냥은 예루살렘의 왕이 될 수 있었다.

4. 하틴 전투에서의 패배(1187)


하지만 왕위에 오른 기가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으니, 본인 스스로 일으킨 살라흐 앗 딘과의 전쟁이었다. 당시 살라흐 앗 딘과 중재를 위해 노력하던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를 협박[8]하여 자신과 협력하게 만들고[9] 동맹인 르노 드 샤티용과 함께 살라흐 앗 딘에 맞섰다. 그러나 하틴 전투에서 레몽 3세의 말을 안듣고 사고를 치는 바람에 대차게 말아먹고 포로로 잡혔으며 다마스쿠스로 압송되었다. 르노는 살라딘이 친히 참수했으나,[10] 기는 목숨만은 건지고 투옥되었다. 그 사이 이벨린의 발리앙, 몬페라토의 코라도 등 남은 기사들이 X빠지게 고생해서 왕국 전체가 공중분해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예루살렘은 어쩔 수 없이 넘겨주었지만.
하틴 전투에서의 참패로 예루살렘 왕국의 영지는 사실상 티레 한 곳 밖에 남지 않게 되버린다. 하틴 전투의 소식을 들은 교황 우르바노 3세가 뒷골 잡고 쓰러진 뒤 저 하늘의 별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5. 포로 석방 후


1188년, 석방된 기는 시빌라와 함께 티레로 향하였으나, 티레의 영주이던 코라도가 '''"무슨 낯짝으로 여길 오는거냐!"'''면서 길길이 날뛰며 입성을 거부하였다. 그 때문에 티레 성 밖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제3차 십자군 원정대가 오자 그들과 함께 합류하여 아크레 공성전에 참여하였다.
바로 이 아크레 공격이 그의 최대(?) 업적이라 할 수 있는데, 때마침 하틴 전투의 참극을 전해들은 유럽의 동지들이 속속 십자군 수하의 몇 안 남은 항구 도시들로 들어오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이 멋모르는 유럽 친구들이 부하에게 무시당하며 아크레 앞에서 얼쩡이는 기의 군대를 보고 '''"예루살렘의 왕이 적은 병력으로 대적과 맞서 싸우는데 부하란 놈은 성에서 벌벌 떨고 있다."'''고 생각해서 모두 거기로 가 합류하는 바람에 정작 코라도는 개털이 되고, 기는 명성을 드높일 수 있었다. 역시 인생은 타이밍. 그런 것도 있지만, 당시 아크레를 점령했던 살라흐 앗 딘은 아크레의 요새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해버렸기 때문에 기 드 뤼지냥이 아크레를 접수하자 제3차 십자군에게는 그야말로 '''최적의 집결지'''가 굴러들어온 셈이 되었다.
1190년 아크레 공성전 와중에 시빌라와 그의 두 딸 알리스, 마리가 모두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예루살렘 왕국의 제후들은 시빌라가 죽었으니 기는 더 이상 예루살렘의 왕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이사벨을 여왕으로 추대하였다. 당시 이사벨의 남편은 몬페라토의 코라도였고 프랑스의 왕 필리프 2세의 든든한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이게 마음에 안들었던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기를 지지하면서 대립 구도를 형성해주었기에 한동안 왕위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3차 십자군 원정이 마무리되고 리처드 1세가 본국으로 귀국하자, 기는 지지 기반을 잃었고 어쩔 수 없이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를 이사벨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리처드 1세가 오면서 점령하였던 키프로스를 기에게 선물해주었기 때문에 기는 키프로스의 영주가 되었으며, 덕분에 1192년 키프로스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기록되었다.
그 후 열심히 해적질(성전)을 했다.
기는 1194년에 사망했지만 후계자를 두지 못했던 까닭에 형 애므리 드 뤼지냥이 그 뒤를 이었다. 1474년 자크 3세 때까지 키프로스의 왕위를 애므리의 후손이 계승했다. [11]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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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헝가리계 뉴질랜드 배우인 마르톤 초카시가 연기했다.[12] 상당히 찌질하면서도 매우 호전적이고 광신적이고 계급주의를 상징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주인공인 이벨린의 발리앙의 안티 테제라 하겠다. 실제 인물 역시 찌질한 편이지만,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르노 드 샤티용과 공모하고 이슬람과의 전쟁에 미쳐 있는 인물로 나온다.[13]
사실 기가 현실 감각과 외교 능력이 부재한 나머지 왕국을 말아먹은 것을 보면 영화에서 이렇게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그 뒤로 살라딘에게 받는 대접이 무척 박하다. 하긴 그 놈의 샤티용과 한 패이고, 간접적으로 자기 여동생까지 죽게 한 놈이니. 예루살렘 공성전 직전에 (휘하 장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속옷에 바보모자만 입히고는 당나귀에 거꾸로 태워서 이를 예루살렘 방어군이 볼 수 있게 전시되는 굴욕을 당한다. 그리고 압권으로 예루살렘 공성전을 끝내는 협상에서 살라딘이 “기독교 백성, 병사 그리고 왕비도 모두 기독교 영역으로 갈 수 있게 해주겠네. '''아, 댁들 왕도 데려가고 싶다면 데려가게나.'''”라고 무슨 반쯤 잊은 짐짝 취급한다. 하긴 작중에서나 현실에서나 예루살렘 왕국 귀족들이 기에게 이를 가는 것을 보면 딱히 예루살렘 측에서 되돌려받고 싶어하는 인물은 아니다.
살라딘이 그를 포로로 잡은 뒤 비교하면서 말한 말대로 선왕이자 처남인 보두앵 4세와 극중 행적이 아주 비교된다.[14] 아무튼 왕이 된 후 보두앵 4세와 똑같은 대사를 두 번 말하는데, 그 느낌이 다소 다른 게 포인트다. 군을 소집하라(Assemble the army.)와 내가 예루살렘이다(I am Jerusalem.)라는 두 대사인데, 같은 키워드의 대사임에도 상황과 인물이 다르기에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특히 똑같이 적의 왕이지만[15] 살아 있을 때나 죽은 후에나 살라딘의 존중을 받는 보두앵 4세와는 달리[16] 포로로 잡혔을 때 그가 받은 상기의 대우를 보아도 충분히 비교된다. 이런 상기의 차이를 본다면 보두앵 4세 사후 예루살렘의 운명이 이렇게 극도의 차이를 가진 일이 되어버린 일에 대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는 인물이다.
[1] 알레라미치(몬페라토) 가문의 굴리엘모(기욤). 현대 프랑스어로 기욤 드 몽페라.[2] 헨리 2세의 부인이자 리처드 1세, 존 왕의 어머니.[3] 아키텐은 엘레오노르의 소유였고, 그녀와 결혼한 헨리 2세 및 둘 사이의 아들이 공작위를 세습받았다.[4] 지금이나 서양 귀족들이 고상한 척 거들먹거리고 있지 이 시절에는 그냥 개싸움 잘하는 놈이 왕의 눈에 들면 작위 받던 시절이다.[5] 티베리아스(Tiberias) 또한 그의 영지였기 때문에(정확히는 그의 아내인 갈릴리 공작부인 에시바의 영지였다) '티베리아스의 레몽'이라고도 한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티베리아스는 영어 발음인 '타이베리어스'로 불린다. 레몽 3세의 배역은 제러미 아이언스.[6] 시빌라의 이복동생인데, 이자벨의 어머니가 발리앙과 재혼을 했다.[7] 시오노 나나미조차 십자군 이야기에서 이 사실을 언급하면서 "시빌라는 기 드 뤼지냥의 얼굴에 반해 있었지만 기 드 뤼지냥에게 잘생긴 얼굴 빼고는 아무런 장점이라고는 없었다"고 깠다.[8] 레몽이 독단적으로 살라딘과 협정을 맺고 자신의 영지를 통행하게 해줬는데 마침 그곳에 있던 성요한기사단과 성전기사단이 살라딘의 대군에 학살당한 것. 이 후 교황과 주교들에게 '''"이 놈이 이교도들하고 공존을 주장하네요. 아무래도 파문시켜야 할 듯"'''이라는 서신을 날렸다.[9]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작중 하틴 전투 직전에 열린 회의에서 당장 이교도들을 치러 나서자는 기와 다른 기사들에게 발리앙이 지금 전쟁하면 안 된다고 반대하며 말린다. 이 때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 즉 티베리아스는 '''내 기사단은 이번 전투에서 빠지겠다'''고 하며 막사를 나가 버린다. 기 드 뤼지냥은 "그럼 전공은 모두 내 차지로군"이라면서 비웃지만...[10] 왜냐면 이 인간은 이슬람 세력에게 당한 일 때문에 무슬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기에 악명이 높았고, 나중에는 '''살라딘의 여동생'''까지 살해했다. 안 죽이는게 이상하다.[11] 여담으로 1489년 자크 3세의 모후이자 키프로스의 마지막 군주인 카테리나 코르나로가 베네치아 공화국의 압력으로 왕국을 해체했고,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가 된 키프로스는 1571년에 오스만 제국에 점령된다.[12] 반지의 제왕에서는 켈레보른 역으로 주인공 벨리앙 역을 맡은 올란도 브룸과 함께 출연한 바가 있다.[13] 딱히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으나 사실 결단력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뭔가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르노 드 샤티용 등 강경파 세력에 휩쓸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에 가깝다. 르노 드 샤티용이 캐러밴을 습격할 때도 기는 상단이 무장하고 있다며 공격하기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히지만, 르노가 어차피 싸우러 온 건데 그럼 더 잘되지 않았냐고 하며 공격을 개시하자 그대로 따라가는 모습을 보여준다.[14] 역사적으로 적어도 이 위키의 평가는 보두앵 4세를 성군으로, 기 드 뤼지냥을 암군으로 분류하고 있다. 한마디로 극중 인물의 바탕이 된 실제 군주의 평가에서도 엄청난 격차를 보인다는 것이다.[15] 다만 보두앵 4세는 본인이 극중에서 언급하기도 한 살라딘의 안위를 위협한 몽기사르 전투의 지도자였으나, 기는 하틴 전투의 패배로 결과적으로는 살라딘에게 이익을 가져다준 편이므로 같은 적의 왕이라고 해도 다소 격이 다르다.[16] 케락에서 군사를 데리고 한 회담 시 살라딘은 보두앵 4세에게 자기 의사를 보내주려 했고, 예루살렘을 얻은 뒤에도 그가 묻힌 십자가가 그려진 무덤자리를 밟지 않고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