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목(1890)
1915년 음력 1월 15일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현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안일암(安逸庵)에서 시회(詩會)를 위장하여 박상진·서상일 등이 국권회복운동을 펼칠 목적으로 결성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의 단원으로 참가하여, 단군대황조에게 제사를 드리고 국권회복운동에 종사하기로 맹세한 후로부터, 자금모집과 선전활동을 담당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인해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6월 30일 대구지검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이 내려지기도 했다.#
1925년부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수차례 조달했으며, 1932년부터는 장남 이두석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44년 8월 10일 여운형·조동호·이상백 등이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예지하고, 일본의 패망과 조국건설에 대한 논의를 거쳐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할 때 중앙조직의 재무부 담당자로서 자금조달 및 자금관리 등을 맡았다.
그러다가 1945년 6월 예비검속으로 경기도 경찰부 고등계에 구금되었다가 옥중에서 해방을 맞아 곧 출옥하였다.
이후 조용히 지내다가 1978년 2월 4일 별세하였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1] 좌통례공파(左通禮公派, 칠곡파) 21대손 수(壽) 항렬.[2]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생가 앞 안내판에는 1948년 2월 2일로 기재되어 있는데, 안내판 자체에 오기가 많아 신뢰성은 다소 떨어진다.[3] 인근의 석전리와 함께 광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달영·이석·이수각도 이 마을 출신이다. 매원리 418번지에 마찬가지로 독립유공자인 아들과 2대에 걸친 생가가 남아있다.이수목·이두석 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