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석
1. 남원시 출신 독립운동가, 李斗碩
이두석(李斗碩)은 1921년 8월 26일 전라북도 남원군(현 남원시) 아영면 아곡리의 유학자 집안에서 이수홍(李壽洪)의 아들로 태어났다. 13세 때 운봉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최남선·이광수의 저서를 탐독하고 삼국지 원전을 읽는 등 신문물과 한국사에 밝았다.
보통학교 졸업 후 1929년 봄부터 고향에서 형 이두현(李斗鉉) 등과 함께 야학당을 세워 문맹퇴치 활동을 전개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비밀리에 수양전진계(修養前進契)를 조직하여 40여 명의 계원들과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경지를 확장하고 청년들의 체력을 단련시키는 등 농촌 경제 건설을 꾀했다.
그러던 중 일장기와 일본 왕의 사진을 찢어 소각한 일로 일본 경찰의 추적 대상이 되었다. 이에 1931년 일본으로 도망, 생고무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며 주로 오사카·고베 등지에서 일본 내의 좌익 민족운동단체에 참가하여 일제 타도와 독립쟁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1933년 12월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日本勞動組合全國協議會)에 가입하여 고베지구 노조재건운동에 힘을 쏟았다. 또한 그해 12월 13일에는 일본공산청년동맹(日本共産靑年同盟)에도 가입하였고, 고베시 위원회 서부지구 조직책임자로 선임되어 청년동맹의 조직 정비와 확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4년 1월에는 제2의 '쌀내놓으라회'를 결성한 뒤 건국제(建國祭), 실업반대투쟁, 기념일 투쟁 등의 시위를 주도하다가 같은 해 4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조사를 받던 중 탈출하여 1937년 1월 오사카에서 김인택(金仁宅) 등 10여 명과 함께 좌익극단(左翼劇團)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그해 4월에는 김철산(金鐵山) 등과 더불어 경제학이론연구회를 조직하여 회원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지도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이후 1938년 1~2월 오사카시에서 공산주의그룹의 동지들과 함께 현 시국에 있어서 좌익 민족운동의 방침에 관하여 협의하기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펴다가 그해 7월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1939년 11월 26일 일본 고베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수감 중 고문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얻었으며 1941년 출옥하였으나 지속적인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이후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47년 10월 7일 별세하였다.
사후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칠곡군 출신 독립운동가, 李斗錫
이두석(李斗錫)은 1912년 5월 19일 경상북도 칠곡군 파미면 상매동(현 왜관읍 매원리 상매마을)에서 이수목(李壽穆)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왜관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중동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중동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호응하여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연대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종로경찰서에 29일간 구금되었고, 풀려난 후 강제 퇴교 처분을 받았다.
이후 귀향하여 고향 왜관면에서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동맹휴학을 주동하다가 퇴학당한 정행돈·이창기·박몽득 등과 함께 1932년 4월 청년동지회(靑年同志會)를 조직하고 농촌계몽 및 한글강습, 소비조합 운동, 민족의식 고취 등의 활동을 전개하며 민족의식을 길렀다.
그후 일본으로 건너가 주오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1937년 전후 귀국하여 왜관면에서 박형동 등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항일 단체 독서회 성진회(惺進會)를 조직하고 농촌계몽 및 민족의식 고취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중# 활동내용이 발각되어 1938년 2월에 왜관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대구경찰서에 이송되었으며, 그곳에서 일본 경찰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그해 3월 23일 대구경찰서 유치장에서 순국하였다.
사후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한편, 형사사건부 1939년 11월 4일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처분이 내려진 사실이 있다.
[1] 수형인명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921년생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1929년부터 항일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1921년생일수가 없다고 본다.[2] 재령 이씨 집성촌이다.[3] 좌통례공파(左通禮公派, 칠곡파) 22대손 '''석(錫)''' 진(鎭) 항렬. 아버지 이수목(李壽穆)은 21대손 수(壽) 항렬.[4] 생가 앞 안내판에는 1902년 출생으로 기재되어 있다.[5] 인근의 석전리와 함께 광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달영·이석·이수각도 이 마을 출신이다. 매원리 418번지에 부자 2대의 생가가 남아있다.이수목·이두석 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