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식
1. 옮겨심는다는 뜻의 한자어 移植
본래는 식물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심는다는 뜻을 가진 단어. 이 뜻에서 파생되어 식물 이외의 문화 매체 등을 원래 발생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져가 퍼트리는 것도 이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장기 이식이나 소프트웨어 이식 역시 이 뜻에서 파생된 것.
1.1. 의학적인 의미의 이식
장기이식 문서 참고.
1.2. 소프트웨어의 이식
포팅(porting) 문서 참고.
2. 이탈리아 요리의 한자식 표기
伊食이라고 쓴다. 이탈리아 요리 문서 참고.
3. 조선의 문장가 이식
이식(李植, 1584년∼1647년)
자는 여고, 호는 택당, 본관은 덕수이다.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618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어 이조좌랑이 되었다. 그 후 부제학·대제학·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1642년 김상헌 등과 함께 청과의 화의를 반대하였다 하여 선양에 잡혀 갔다가 돌아올 때, 다시 의주에서 붙잡혔으나 탈출하여 돌아왔다.
그는 또한 장유와 더불어 당대 일류의 문장가였으며, 이정구#s-3·신흠·장유와 더불어 조선중기 문장 4대가 월상계택(月象谿)으로 꼽혔다. 이는 네 명의 호를 딴 것으로, 이식은 택(澤)로 네 번째에 든다.[1] <선조실록> 수정 작업을 전담하였다.
이식은 상당히 복고적인 문장가였다. 그 성리학적 결벽은 문장뿐만 아니라 자해서인 <초학자훈증집>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식은 주자의 제자인 진순의 <북계자의>를 참고하여 <초학자훈증집>을 저술하였는데, 진순이 '道'항목을 설명할 때 노장(老壯) 사상을 곁들여 설명한 반면 이식은 '도'를 설명할 때 노자의 노자도 꺼내지 않았다.
당시 조선에서는 양명좌파의 문장이 인기를 끌었는데, 중국의 양명좌파 문인들이 거친 행동을 한 것을 듣고는 조선의 문인들까지 이에 경도될까봐 걱정한 택당이 일부러 이런 식의 복고적 노선을 취했다는 주장이 있다.
죽은 뒤 숙종 12년(1686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로 문정(文靖)을 받았다.# 저서로 <택당집>, <초학자훈증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