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구
1. 일본 프로야구 시절
일본 히로시마현 구레시에 위치한 사립 고코(呉港)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72년 드래프트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9순위 지명으로 입단했다. 고교 시절에는 주로 유격수로 뛰었지만 히로시마 입단 이후에는 3루수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고 한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 입단 후 1982년까지 10년 동안 단 10경기에 출장해 3타수 무안타의 성적 밖에 남기지 못하고[1] 1983년 평소 형처럼 따르던 팀 동료 장명부와 함께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한다.[2] 입단 당시 계약금은 2천만원, 연봉은 2천 4백만원[3] 이었다고 한다.
2. 한국 프로야구 시절
삼미 슈퍼스타즈 입단 첫 해에는 다시 고교 시절 포지션이던 유격수로 주로 출전했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과는 영 딴 판으로, 첫 해부터 전 경기 출장에, 타율 2할 7푼 7리로 유격수로써 나쁘지 않은 타율과 탄탄한 수비력은 대단히 고평가를 받았다. 이듬해 1984년에는 임호균이 롯데 자이언츠로 1:4 트레이드[4] 되면서 반대 급부로 권두조가 입단함에 따라 3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음에도 역시 전 경기 출장, 2할 5푼 7리의 타율로 쏠쏠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이영구의 삼미 입단을 책임졌던 장명부 답게 이영구의 연봉 인상과 재계약 또한 장명부가 자신의 연봉 협상때마다 책임졌는데, 1985년 장명부가 구단과 재계약 협상에서 실패했을 때 이영구도 협상을 거부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 행적은 한국에서는 거의 불명이었는데...
3. 은퇴 후
키야마 에이큐(이영구)의 최근 근황을 소개한 기사(일본어)
2017년 JSports라는 스포츠 칼럼에서 오오제키 타카후미(尾関高文)[5] 라는 기자에 의해 그의 근황이 공개되었다.
2020년 현재, 도쿄 시나가와에 있는 니시코야마역 근처에서 그의 이름을 딴 "求"라는 히로시마 츠케멘 전문점을 운영 중이라고 한다. 실제로 가게를 보면 히로시마 도요 카프 유니폼을 비롯한 갖가지 야구 용품들을 심심치 않게 걸어 놓고 있다. 위의 기사의 2페이지로 가면 기자와 찍은 사진[6] 도 함께 있으니, 궁금한 위키러들은 참고하시길...
4. 여담
일본 소설가이자 문학 평론가 세키가와 나쓰오가 쓴 "해협을 건넌 홈런"에 따르면, 한국 스포츠 신문에서 "프로야구 타격 2위 김무종[7] 과 이영구가 일본 프로야구 시절 타격 20위 안에도 들지 못한 것을 보면 한국의 프로야구는 일본 프로야구의 1군과 2군 사이의 수준에 있다고 판단된다"고 썼다고 한다. [8] [9]
5. 연도별 성적
6. 관련 문서
[1] 이영구의 일본프로야구 마지막 해인 1982년 웨스턴 리그에서 타율 .339로 2위를 차지했지만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2] 이영구의 삼미 슈퍼스타즈 입단은 장명부의 계약 조건이기도 했다.[3] 당시로서는 특급 계약조건이었다. 1년전의 박철순과 같은 대우.[4] 임호균 ↔ 권두조, 박정후, 우경하, 김정수 [5] 이 분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열렬한 팬이라고 하며, 위의 기사를 쓴 계기도 前 히로시마 OB 선수인 가네이시 아키히토(투수, 가네다 마사이치의 조카) 선수의 추천으로 가게 되면서 쓴 기사라고 한다.[6] 사진의 왼쪽 인물이 이영구이다.[7] 김무종과 이영구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 입단 동기이다.[8] 물론 지금도 한일 프로야구는 수준의 차이가 분명 있지만, 이영구가 뛰던 시기에는 지금보다도 훨씬 그 격차가 컸을 거라 추정이 가능하다.[9] 다만, 김무종은 한국에서도 3할도 쳐본 적이 없는 선수로, 타격으로는 포수임을 감안해도 1류는 아니었던 선수였는데 타격 2위라 언급되는 부분은 어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