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복

 

1. 고려의 문신
1.1. 개요
1.2. 생애
1.3. 창작물
2. 대한민국의 법조인
4. 관련 문서


1. 고려의 문신



'''성주 이씨 가문 출신 배향공신'''
'''충혜헌효대왕'''
'''충정왕'''
'''문렬공 이조년'''
'''문충공 이인복'''

1.1. 개요


李仁復
1308 ~ 1374
고려시대의 문신, 충정왕의 배향공신이다. 본관은 성주 이씨, 이름은 인복.

1.2. 생애


그의 할아버지는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시조 다정가로 유명한 청백리 성산후(星山侯) 이조년이고 그의 동생은 고려 말 최강의 권신으로 전횡을 부리며 고려를 몰락시킨 이인임이다.[1][2] 성리학의 선구자였던 백이정에게 수학한 뒤 보통의 귀족들과 달리 음서가 아니라 과거로 당당히 급제하여 충주공복에 제수되었다. 그것 뿐만 아니라 원나라에 가서도 제과에 급제하여 금주판관의 벼슬을 받고 돌아왔다. 그야말로 어떻게 보면 동시대 인물인 이색과 동급의 엄친아인 셈.
부원배 및 권문세족과 부정축재와 인사권의 폐단을 일으킨 원흉들의 척결에 앞장 섰고, 자주적인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공민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고 왕권 강화 정책에 깊숙히 참여했다. 또한 공민왕의 개혁의 선봉에 서서 보다 적극적인 성리학 보급에 앞장섰다. 공민왕의 재위 초인 1352년에 최영과 함께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워 1354년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政堂文學兼監察大夫)에 제수되었고, 이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그 뒤에는 승려 신돈이 공민왕의 총애를 입고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신돈에 대항하였고 결국 이 때문에 파직당했지만 다시 복귀했다. 1373년에는 검교시중에 봉해졌다.
공민왕이 시해당한 1374년에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후 충정왕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초은집, 금경록 등이 있다.

1.3. 창작물


정성모가 배역을 맡아 열연했다. 이 배우는 사극에서는 주로 악역을 연기했는데, 보기 드문 선역 역할. 드라마 속에서도 고려의 충신으로 나와 공민왕에게 간언을 서슴치않게 올리는 등 충직한 신하이자 조언자로 나온다. 다만 급진적인 개혁가인 신돈과 다르게 온건적인 개혁을 주장하며 명백히 대립 노선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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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민국의 법조인



대한민국의 전 대법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3. 대한민국야구선수




4. 관련 문서



[1] 참고로 조부인 이조년은 온갖 난행을 일삼고 다니던 충혜왕에게 거의 유일하게 충언을 올렸던 인물이다. 그리고 강직한 성품으로 신료들 사이에서도 꽤 명망이 높았으며 사후 충혜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2] 사실 이인복은 동생 이인임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동생 이인임을 향해 나라집안을 거덜낼 놈이라하며 디스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