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고려)

 


'''이색
李穡
'''
<colcolor=#000><colbgcolor=#fedc89> '''시호'''
'''문정공(文靖公)'''
'''작위'''
한산백(韓山伯)[1]
'''군호'''
한산군(韓山君)[2]
한산부원군(韩山府院君)[3]
'''본관'''
한산 이씨
'''이름'''
이색(李穡)
'''자'''
영숙(穎叔)
'''호'''
목은(牧隱)
'''생몰연도'''
1328년(고려 충숙왕 15) ~ 1396년(조선 태조 5)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기타
5. 미디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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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후기의 문인.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 외가가 있던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4] 출생으로 추정된다.# 아버지는 성리학맥에 있어 이제현의 뒤를 이었다고 평가받는 이곡(李穀)이다.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더불어 고려 3은(隱)이라 불린다.[5] 익재 이제현 밑에서 공부했으며 성리학을 연구했고 문하에 정몽주, 정도전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위인을 여럿 키워냈다. 정몽주, 정도전이 유명해서 그렇지 이숭인, 권근, 길재, 이첨, 하륜, 윤소종, 염흥방까지 사실상 여말선초의 거의 모든 사대부들을 키워 낸 인물. 자신의 제자인 권근, 정몽주, 길재 등을 통하여 후일 관학파(훈구파), 사림파가 형성되었기에 그 계보에서 거의 최상단에 있는 인물로 신진사대부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제자인 박상충의 처남이기도 하다. 이색과 처남인 박상충은 고려 문과 1위, 2위로 급제하였다.

2. 생애


고려에서 진사시에 합격한 뒤 원나라에 건너가 원나라 국자감에서 처음 성리학을 배워서 연구하였고 이후 원나라에서 과거 시험을 쳐 회시에서 장원으로 급제, 전시[6]에서는 2등[7]으로 합격했다.[8] 앞서 통일신라 시기 최치원, 최승우 등도 당나라에서 급제했다고 하지만 외국인 대상의 빈공과에 합격한 것이므로 다소 격이 떨어지는데 비해 이색의 전시 2등은 그야말로 클라스가 다른 어마무시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괜히 사대부의 아버지가 아니다. 이후 원나라에서 벼슬을 살다가 어머니의 연로함을 이유로 귀국했다. 고려에 돌아와서 처음 한 일이 무신집권기의 잔재였던 정방의 폐지.
공민왕 때 토지 제도 개혁, 불교 억제 등의 상소를 올렸으며 1388년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자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옹립하는 것에 가담했다. 이후 창왕 폐위 때 이성계 일파에게 관리들의 토지를 빼앗아 분배하자는 토지 개혁에 반대한다는[9][10] 이유로 밀려 귀양을 갔다가 공양왕 때 정몽주가 정권을 잡자 부원군의 자리를 받아 한산부원군이라 불린다. 그러나 역성혁명에는 찬성하지 않았기에 이성계로 인해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11]
1396년 여강(驪江, 현 경기도 여주시)으로 유배를 가던 도중 죽었는데 당시 조선의 실세였던 정도전은 스승이기도 한 이색에게 냉혹한 태도를 보였고 주변 사람과 짜고 유배보내는 도중에 바다에 던져넣어 죽일 음모도 꾸몄다. 그러나 이성계의 결정으로 다른 곳으로 유배가던 도중 사망했고,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도전 독살설이 있다.

3. 평가


성리학맥에서 이색의 위치는 한국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안향의 6군자[12]-이제현-이곡-이색-정몽주-길재, 권근으로 이어지는데 조선 성리학의 정통 계보는 이색, 정몽주, 길재가 시발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이색과 이색의 제자들 대부분이 여말선초에 난세의 핵심부에 위치해 있었던 점은 당시 성리학이 매우 현실 참여적인 학문이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수제자로는 일반적으로 정몽주를 들며 특히 이색은 정몽주의 강론을 듣고 정몽주야말로 '동방이학의 비조'라는 찬사를 보냈을 정도다.[13]
다만 조선 개국에는 반대했기 때문에 학자로서의 위치나 명성에 비해서 정치적 입지는 다소 약하고 이렇다 할 정치적 업적도 없는 편인데, 실제로도 당대에 이미 이재(관리로서의 재능)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선왕조 세종실록에 보면 좋은 평가도 있지만 대체로 혹평에 가까운 편.
그러나 당대 인물들 사이에서의 입지는 확고했던 걸출한 인물로, 조선 건국 후 한 젊은 문신이 척불론을 펴자 태조는 "이색도 그런 말은 안했다. 네가 이색보다 잘났느냐."라고 반문했다고 한다.[14] 정치가나 관리로서의 자질은 떨어졌으나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만큼 학문은 대단히 뛰어났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장 여말선초의 급변기를 이끌었던 대다수의 사대부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웠음을 생각해 보면 결코 과소평가할만한 인물이 아니다. 즉 후일의 사림들처럼 정치가나 경세가의 면모까지 겸비하지는 못했지만 전적으로 대학자로서 활약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끝까지 조선 왕조를 거부했지만 조선 왕조를 세운 세력들을 다 키워낸 조선의 사상적 스승이기도 하다.
다만 여주 신륵사의 나옹선사의 비문을 써주는 등[15] 불교와 친하게 지내는 경향을 많이 보여줘서 이후 성리학에서 내내 까이게 된다. 일단 비문을 써주는 대가로 절에서 후원을 많이 해줘서 풍족하게 살 수 있었지만[16] 조선의 불교탄압에 의해 불교와 친하게 지냈던 이색까지 덩달아 까이게 된 것, 반대로 정도전은 젊은 시절 비문을 몇번 써준 적은 있지만 나중에 불교와 관계를 끊고 죽을 때까지 불교를 탄압한다.
조선인들도 대체로 이색의 학문이나 인간됨에 호의를 표하고 있고, 비극적인 개인사에 대해서도 동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었다. 용재총화에서는 아들인 이종학[17]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고 있었지만 트집을 잡힐까 봐 어디 가서 대놓고 슬퍼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손님이 오자 같이 말을 타자는 핑계로 깊은 숲 속까지 가서 아무도 보지 않는 그곳에서 날이 어두워지도록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인간인 이상 공명심에 욕심이 있었던 것 같긴 하다. 이제현 사후 익재집의 서문을 작성하는데, 그곳에 1000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의 이름이 기억될 수 있는지에 대해 걱정하는 글을 썼다.

4. 기타


  • 1388년 문하시중의 자격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18] 주원장이 원나라에서 과거까지 급제한 이색에게 중국어를 해 보라고 했으나 주원장이 이색의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하였다고[19] 전해진다. 아마도 이색은 원나라의 표준어(북경어)로 말했으나 주원장이 남방 출신이어서[20][21] 이색의 중국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주원장은 이색이 구사하는 중국어를 두고 "나하추 같구만"하고 비웃었고 이색은 돌아와서 "나는 황제가 반드시 이 일을 물어볼 줄 알고 이것저것 준비해 갔는데 황제는 정작 내가 생각지도 않은 것만 물어보더라"고 하면서 주원장을 두고 "마음에 줏대가 없다[心無所主]"고 깠다.[22] 이 사건은 홍무정운의 발행을 비롯해 중국의 표준어를 통일시키는 과정에서 문자의 옥 등의 반발이 있었고 그런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다만 서로 발음이 너무 달라서 소통이 안될 정도였다면 이색 또한 주원장의 질문을 못 알아듣고 통역을 통했어야 정상인데 기록대로라면 이색은 주원장의 질문을 통역없이 알아듣고 대답을 했다. 주원장도 말을 알아들을 정도는 되었음에도 일부러 원나라 발음이 강한걸 조롱하기 위해 못 알아듣겠다고 했을 가능성도 있다.
  • 세조와 함께 계유정난에 참가해 정난공신에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등을 숙청하고 세조를 즉위시켜 좌익공신까지 오른 이계전이계린이 이색의 손자다. 그로 인해 이색의 후손들은 훈구파의 한 축이 된 것에 비해 이색의 학풍을 이은 제자들은 사림파의 한 축이 되었다.[23] 하지만 사육신 중 1명인 이개는 이색의 증손자로 같은 가문에서도 다른 길을 걸었다. 선조영의정을 역임한 이산해가 이색의 7대손이다.
  • 손자인 이맹균(1371~1440)은 세종대왕 치하에서 세자인 이향(뒤에 문종)까지 가르치던 스승이었으며 좌찬성까지 올랐으나 여종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이를 안 부인 이씨가 그 여종을 굶기고 때려죽이게 했다. 그러자 이맹균은 여종이 잘못하여 아내가 때려죽였다고 하며 시체마저도 길가에 내다버렸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하여 바로 세종대왕이 아무리 종이라고 해도 이런 짓은 심하다고 비난하며 그를 파직시키고 이씨와 이맹균을 귀양보냈다. 그나마 황해도 우봉헌으로 귀양간 이맹균은 몇달도 안돼 병으로 다 죽어갔고 세종은 어차피 이젠 죽을 거 귀양을 풀어줬으나 이맹균은 한양으로 오던 도중 개성에서 숨졌다. 이씨는 남편 장례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귀양을 풀어줬지만 이후 3년이나 귀양살이를 해야했다.

5. 미디어에서


  • MBC 조선왕조 500년 추동궁 마마에서는 이대로가 배역을 맡았다. 후술할 용의 눈물에서와 마찬가지로 목은 이색은 이성계의 앞에서도 송헌이라고 부르며 칭신하지 않았다. 이 소식을 전해듣고 가장 분노한 것은 정안군 이방원(이정길 역).[24] 이에 이방원은 궁궐과 자신과의 연락을 맡고 있던 칠점선(우왕의 후궁 - 이혜숙 역)에게 명하여 이성계가 이색에게 하사하는 에 독을 넣을 것을 지시하고... 결국 여주 강 배 위에서 술을 마신 이색은 곧바로 피를 토하고 쓰러지며, 근처 신륵사 방 안으로 급히 옮겨지지만 의원의 진맥도 받지 못하고, 유언도 못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이 드라마에서는 특히 이방원의 악업이 매우 두드러진다. 오죽하면 고려 왕족들을 모두 물에 빠뜨려 수장시킨 것도 이방원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묘사될 정도다. 이방원의 사적인 부하 이숙번(김희라 역), 송거신(나성균 역/역사적으로 이방원의 부인 여흥 민씨와 친척 간/여흥 민씨의 어머니가 여산 송씨), 목인해(백인철 역 - 제2차 왕자의 난에서 눈에 화살을 맞아 실명하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목인해와 조대림 역모 사건은 안 나온다), 마천목(박경현 역) 등이 정규 관원인 조영규(김기일 역)와 합세하여 배 안에 구멍을 뚫는다.
  •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남일우가 배역을 맡았다. 조선 건국 이후 태조 이성계를 가리켜 '송헌'(이성계의 호)이라 부르며 조롱한다. 그러나 관대한 이성계는 그 절개를 높이사 처벌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전답을 내린다. 산천을 유람하던 중 이성계가 보낸 어주상을 받게 되는데 제자들이 독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며 말리는 걸 무시하고 술을 마시며 먼저 간 이숭인과 정몽주를 회상하다 갑자기 쓰러져 사망한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가 분노하여 도승지에게 소줏간을 맡고 있는 자를 불러오라 이른다. 하지만 그가 소줏간의 어주를 몰래 훔쳐마신게 과하여 길가에서 얼어죽었다 고 하니 책상을 내리치며 대신을 물러가게 하였다. 정도전이 사건을 이제 더 이상 캐지 말고 덮자는 걸 보면 정도전이 은밀히 손을 쓴 듯하다. 본래 이색의 죽음은 한양 천도 이후의 시점이었는데 박종화 작 세종대왕에서 한양 천도 이전의 시점으로 잘못 묘사하였고 용의 눈물에도 이걸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진행했다.
  • 신돈에서는 전인택이 배역을 맡았다. 유림이 바로 세워야 나라가 바로 세워진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신돈이 성균관을 재건하는 등의 유림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자 개혁에 동참하지만, 신돈과 공민왕이 대립하기 시작하니 신돈과 거리를 두며 방관하기만 한다.
  • 신의에서는 김형종이 배역을 맡았다.
  • 대풍수에서는 최용민이 배역을 맡았다.
[1] 조선 왕조가 개창된 뒤 봉해짐.[2] 1383[3] 1384[4] 현재는 영양 남씨안동 권씨의 집성촌인데, 고려 말에는 목은 이색의 외가인 함창 김씨 일족이 처음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5] 사람에 따라 길재를 빼고 도은 이숭인을 포함시키기도 한다.[6] 최종 시험. 임금 앞에서 시험을 침.[7] 이색은 전시에서 1등의 성적을 얻었으나 이색은 원나라인이 아닌 외국인인(고려인) 까닭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 때 1등 합격자는 '우계지(牛繼志)'이다.[8] 당시 원나라의 과거 시험은 이후 명청대처럼 정기적으로(식년시:3년마다 실시, 그외 특별 시험이 종종 있음)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불규칙적으로 드문드문 시행했고 선발 인원 또한 극소수였다.[9] 이색의 한계이기도 했다. 하필 이색의 집안은 신진 사대부 중에서도 토지 소유량이 많은 편인지라 토지 개혁을 진행했다가는 빼앗길 토지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10] 신진 사대부와 권문세족은 겹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권문세족 중에서도 성리학을 배우고 과거를 통해 벼슬에 올라 개혁에 찬성하면 신진 사대부가 되는 것이다. 권문세족들도 음서뿐만 아니라 과거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윤소종도 권문세가 출신.[11] 이성계의 즉위 과정을 비판하면서 이성계에게 옥새를 바친 배극렴을 마고(馬賈)(말 장수)라고 디스하기도 했다.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이색의 졸기.[12] 권부, 백이정 등 6명의 제자다. 이 중의 1명이 이조년으로 이인임의 조부.[13] 다만 이것은 제자를 칭찬하는 말로 이 말을 정몽주보다 학문이 뛰어나지 못했다고 곧이 곧대로 해석해버리면 곤란하다. 물론 정몽주의 학문적 완성도는 이색보다 못하지는 않았다.[14] 태조가 개국공신 1등으로 외교 문서를 비롯한 각종 문서를 전담했던 정총에게 대장경을 인출할 원문을 지어 바치게 하자, 정총이 이에 반대하면서 있었던 일이다. 태조는 독실한 불교 신자여서 불쾌한 기색을 드러낸 것이지만, 이색이나 정몽주 같은 보수파 사대부들도 의외로 불교 세력과 그리 거리를 두지 않아서 철저한 척불론자들이었던 신진 사대부들에게 까이기도 했다. 정몽주의 경우는 이단인 불교를 좋아한다고 욕을 먹어서, 불교 배척에 앞장서던 정도전이 앞장서서 '''내 친구 정몽주는 그렇지 않다'''면서 옹호하는 글을 따로 써 주기도 했을 정도. [15] 목은집 권49(목은문고 권14)[16] 나옹선사의 비문을 써준 대가로 불교계에서 윤필료(붓을 닦은 값, 사실상 돈 줄 명분이다.)를 주는데 이색이 너무 많이 준다고 거부하자 그 돈으로 암자 5개를 짓는 등 어마어마하게 후원해준다.[17] 정도전에게 죽임을 당했다.[18] 당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을 소위 인질 격으로 동행하여 명나라에 함께 데려갔다.[19] 주원장은 인사 치레조로 "원나라에서 한림을 했다니 한어(중국어) 좀 하겠네?"라고 말을 건넸는데 이색은 "친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주원장은 못 알아듣고 옆에 있던 예부 관리가 통역을 해 주고서야 알아 들었다.[20] 당시엔 수도도 난징이었다. 주원장이 죽고 아들끼리 싸운 끝에 북평왕이 이겨서 금나라와 원나라의 수도였던 베이징으로 옮겨간 것.[21] 중국 북부 지역과 남부 지역의 방언 차이가 엄청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지금도 강남 지역의 광동어는 북경어에 기반을 둔 표준중국어와 같이 대화를 붙여 보면 거의 외국어 수준으로 소통이 안된다. 예컨대 하나 일(ㄧ, 1)의 발음은 표준중국어로는 이(yī)지만 광동어론 얏(yat1)이다.[22] 당시 이색은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막기 위해 고려에 대한 명나라의 감국(監國)을 논의하고자 하였다. 말장난이나 하고 왔으니 이색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만했던 것.[23] 훈구와 사림은 현대인들 생각처럼 딱 나뉘는 정당 같은게 아니다. 고려 말의 권문세족과 신진 사대부도 마찬가지.[24] 당시에 있었던 중신들을 불러 호통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