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환
李重煥
1690년(숙종 16) ~ 1756년(영조 32)
1. 개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다.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휘조(輝祖), 호는 청담(淸潭)·청화산인(靑華山人)이다. 이다. 삼종조부 성호 이익(李瀷)[1] 의 문인이다.
2. 생애
1690년 한성부 서부 황화방 군기사계 소정동(현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s-1)[2] 에서 예조참판을 지낸 아버지 이진휴(李震休)와 함양 오씨 오상주(吳相胄)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5품 통덕랑(通德郞)의 품계를 갖고 있던 1713년(숙종 39), 증광시 문과에 병과 24위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승문원정자, 김천도찰방, 승정원주서, 병조 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자 목호룡의 당여[3] 라는 이유로 구금되어 여러 번 유배를 당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라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조선 전역을 두루 답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시 전국의 인심과 풍속 및 물화의 생산지·집산지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는 관직에서 물러난 사대부들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보자는 동기였다. 그가 가장 좋은 곳을 선정하는 기본 관점은 인심과 산천이 좋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교류가 좋은 곳이었는데,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쓴 저서가 바로 택리지이다.
택리지에서 사농공상의 구분을 단순한 직업적 차이로만 보았다. 그리고 지리적 환경을 잘 이용할 것, 상업적 농업 등을 중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