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實學
넓게는 유교에서 공리공론(空理空論)에 기초한 헛된 학문'이라는 뜻의 허학(虛學)과 대립되고 실제의 참된 학문이라는 뜻을 지닌다. 즉 실학이란 용어 자체는 유교 내에서 쓰이는 보편적인 단어였다.
좁게는 조선 후기에 성리학을 '''보완'''[1] 하여 경세치용[2] 과 이용후생[3] , 실사구시[4] 의 태도를 강조한 학문이라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천관우가 실학의 개념을 정립하면서 실학자들의 연구에 실사구시의 실학적인 측면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후자(협의)의 뜻으로 주로 쓰인다.
조선의 실학은 그 기원을 17세기 이수광과 한백겸에서 찾는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접했던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실학정신의 기원[5] 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모습을 보였으며 한백겸의 동국지리지는 평양에 있었다는 기자의 정전 유적을 나름대로 고증하면서[6] '''토지개혁론'''의 시작을 열었다.
그렇게 싹이 보인 조선의 실학이 본격화 된 것은 이후의 고증학과 서양학문에 대한 관심,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병자호란으로 대표되는 외부 충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18세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는 유형원, 이익, 홍대용, 박지원, 정약용, 서유구 등이 있다. 이들 중에서 서울에 주로 거주하던 경화사족(京華士族)들이 특히 관심을 보인 학문은 북학론이다. 이 북학론이 청나라를 배우자는 뜻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청나라에 남아 있는 중화 문명을 배우자는 사조로서, 북벌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의견이 있다.
이 조선 후기의 실학에 대한 관심은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실학자들이 청나라에서 실학 관련 책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천주교에 대한 책이 같이 들어왔다. 최초로 천주교의 존재를 소개한 것이 이수광의 지봉유설이었을 정도이며, 이후 이익과 그 제자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연구가 시작되었다. 실학자들은 이것을 처음에는 서학, 또는 천주학이라 부르면서 학문으로 연구하다가 이게 서양의 종교라는 것을 깨닫고 천주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실학의 전개는 크게 3기로 나누는데, 1기인 18세기 전반은 실학의 발생기로 중농학파가, 2기인 후반은 실학의 정립기로 중상학파가, 3기인 19세기 초반은 실학의 전성기로 국학파가 대두[7] 했다. 다만 실학의 분류 자체가 꽤 주관적인 것임을 명심하자.[8]
이후 실학은 개화사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실학이 성리학의 관념적인 측면을 비판한 학문으로서 시대를 개혁하려는 측면이 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정리하자면 성리학은 양반 사대부 중심, 벌열양반 중심, 관념철학, 사장 중시, 사변적이었던 것에 비하여, 실학은 민중도 연구 대상이고 기존 유학의 사변적 측면에 경험적, 실험적 방법론을 더하고 성리학 이전의 선진 시대 유학과 제자백가 유학도 포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관점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근대적 관점에서 결과론적으로 실학을 평가했다는 비판이 있다. 정체성론에 반박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억지로 내재적 발전론적 사고로 접근했다는 주장. 실제적으로 실학이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점이 억지로 성리학에서 실학을 분리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제기되며 비판이 제기되었고 최근 유행하는 근대성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학설이 퍼지며 더 공격받게 되었다. 학계[9] 일각에서는 '사실 성리학과 별 차이가 없다'고 '''아예 실학이라는 카테고리를 부정하는 입장'''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 중 한 예가 도올 김용옥이다. 이 부분은 김용옥 문서 참조.
실제로 실학도 성리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단지 성리학에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제도에 집중을 한 차이가 있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으며, 실학자들이 제안한 대안이 당대 조선의 현실에 맞는 것이였는지도 논란거리다. 이에 대한 사학계의 이의 제기는 사실 '실학'이라는 개념이 학문적으로 정립되던 1950~1970년대부터 꾸준히 나오던 것이었고 1980년대 일련의 논쟁을 거친 것이었으며, 1990년대 이후 연구사적 차원에서 이러한 재검토를 무시하는 신진학자는 거의 없다.
실학자로 분류되는 꽤 많은 학자들이 실학과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노론에 포함되었다. 특히 중상학파-북학파 계열은 대부분 서인-노론 계통 인사였다. 물론 권력의 핵심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또한 실학자들이 쓴 다른 문집의 글들을 보면 성리학적 도덕에 기반한 글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때문에 실학은 성리학에서 탈피했다기 보다는 성리학의 철학적 요소를 줄이고 초창기 제자백가 시절의 유교의 실용적인 면을 들고온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예송논쟁 당시 서인과 남인들의 경제에 대한 정책을 보면 실학의 중농주의vs중상주의 학설과 유사한 점을 많이 찾을 수 있다. 다만 조선 후기에 권력의 중심에 있던 양반들이 주로 관심갖지 않았던 현실 개혁 사상에 실학이 성리학보다 훨씬 더 관심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역사학계에선 이 점을 주목한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대한 다양한 문헌 기록들을 찾아내어 연구하는 자료가 쌓이다 보니, 그동안 거의 완벽하게 호평만 받아오던 실학자들의 주장들이 사실은 조선 시대의 현실과 뒤떨어진 지극히 몽상적이고 비현실적이었다는 반증이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심하게 말하면, 이 중에서도 일부 주장은 '''방구석에서 행한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기까지 하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반계수록의 저자인 유형원은 "우리나라에서는 수레를 쓸 줄 모른다."라고 적어 마치 조선에서는 수레를 전혀 안 쓰는 것처럼 서술했으나 사실은 유형원이 살았던 시대의 조선에서는 수백 대의 수레를 잘만 사용했으며, 박제가도 북학의에서 조선의 배가 물이 차올라 곡식을 싣지 못하는 형편없는 것이라며 혹평했으나 18세기 조선의 경강상인들은 무려 2천석 이상의 곡식을 실어나를 수 있는 대형선박을 잘만 만들어서 사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조선은 육운을 통한 유통보단 수운을 통한 유통을 많이 했다. 물론 육운이 많이 불리한 점이 있었긴 했다 대표적으로 험한 산지와 화강암 지형 때문이다. 이 문제는 터널을 뚫어야 해결이 가능한데 근대에나 가능해진다. #1, #2
또한 실학자들이 조선의 신분제도를 비판하고 평등한 사회를 주장했다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그들이 남긴 글을 잘 보면 오히려 신분제도를 긍정하고 있음이 드러나기까지 했다(...)#
볼드체 된 인물들은 수능이나 공시에서 자주 출제된 만큼 실학자 중 중요한 인물들로 손 꼽힌다.
1. 개요
넓게는 유교에서 공리공론(空理空論)에 기초한 헛된 학문'이라는 뜻의 허학(虛學)과 대립되고 실제의 참된 학문이라는 뜻을 지닌다. 즉 실학이란 용어 자체는 유교 내에서 쓰이는 보편적인 단어였다.
좁게는 조선 후기에 성리학을 '''보완'''[1] 하여 경세치용[2] 과 이용후생[3] , 실사구시[4] 의 태도를 강조한 학문이라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천관우가 실학의 개념을 정립하면서 실학자들의 연구에 실사구시의 실학적인 측면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후자(협의)의 뜻으로 주로 쓰인다.
조선의 실학은 그 기원을 17세기 이수광과 한백겸에서 찾는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접했던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실학정신의 기원[5] 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모습을 보였으며 한백겸의 동국지리지는 평양에 있었다는 기자의 정전 유적을 나름대로 고증하면서[6] '''토지개혁론'''의 시작을 열었다.
그렇게 싹이 보인 조선의 실학이 본격화 된 것은 이후의 고증학과 서양학문에 대한 관심,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병자호란으로 대표되는 외부 충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18세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는 유형원, 이익, 홍대용, 박지원, 정약용, 서유구 등이 있다. 이들 중에서 서울에 주로 거주하던 경화사족(京華士族)들이 특히 관심을 보인 학문은 북학론이다. 이 북학론이 청나라를 배우자는 뜻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청나라에 남아 있는 중화 문명을 배우자는 사조로서, 북벌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의견이 있다.
이 조선 후기의 실학에 대한 관심은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실학자들이 청나라에서 실학 관련 책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천주교에 대한 책이 같이 들어왔다. 최초로 천주교의 존재를 소개한 것이 이수광의 지봉유설이었을 정도이며, 이후 이익과 그 제자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연구가 시작되었다. 실학자들은 이것을 처음에는 서학, 또는 천주학이라 부르면서 학문으로 연구하다가 이게 서양의 종교라는 것을 깨닫고 천주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실학의 전개는 크게 3기로 나누는데, 1기인 18세기 전반은 실학의 발생기로 중농학파가, 2기인 후반은 실학의 정립기로 중상학파가, 3기인 19세기 초반은 실학의 전성기로 국학파가 대두[7] 했다. 다만 실학의 분류 자체가 꽤 주관적인 것임을 명심하자.[8]
이후 실학은 개화사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2. 성리학과의 차이
실학이 성리학의 관념적인 측면을 비판한 학문으로서 시대를 개혁하려는 측면이 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정리하자면 성리학은 양반 사대부 중심, 벌열양반 중심, 관념철학, 사장 중시, 사변적이었던 것에 비하여, 실학은 민중도 연구 대상이고 기존 유학의 사변적 측면에 경험적, 실험적 방법론을 더하고 성리학 이전의 선진 시대 유학과 제자백가 유학도 포섭했다는 것이다.
3. 학문으로서의 '실학'의 실존 논란
그러나 위의 관점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근대적 관점에서 결과론적으로 실학을 평가했다는 비판이 있다. 정체성론에 반박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억지로 내재적 발전론적 사고로 접근했다는 주장. 실제적으로 실학이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점이 억지로 성리학에서 실학을 분리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제기되며 비판이 제기되었고 최근 유행하는 근대성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학설이 퍼지며 더 공격받게 되었다. 학계[9] 일각에서는 '사실 성리학과 별 차이가 없다'고 '''아예 실학이라는 카테고리를 부정하는 입장'''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 중 한 예가 도올 김용옥이다. 이 부분은 김용옥 문서 참조.
실제로 실학도 성리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단지 성리학에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제도에 집중을 한 차이가 있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으며, 실학자들이 제안한 대안이 당대 조선의 현실에 맞는 것이였는지도 논란거리다. 이에 대한 사학계의 이의 제기는 사실 '실학'이라는 개념이 학문적으로 정립되던 1950~1970년대부터 꾸준히 나오던 것이었고 1980년대 일련의 논쟁을 거친 것이었으며, 1990년대 이후 연구사적 차원에서 이러한 재검토를 무시하는 신진학자는 거의 없다.
실학자로 분류되는 꽤 많은 학자들이 실학과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노론에 포함되었다. 특히 중상학파-북학파 계열은 대부분 서인-노론 계통 인사였다. 물론 권력의 핵심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또한 실학자들이 쓴 다른 문집의 글들을 보면 성리학적 도덕에 기반한 글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때문에 실학은 성리학에서 탈피했다기 보다는 성리학의 철학적 요소를 줄이고 초창기 제자백가 시절의 유교의 실용적인 면을 들고온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예송논쟁 당시 서인과 남인들의 경제에 대한 정책을 보면 실학의 중농주의vs중상주의 학설과 유사한 점을 많이 찾을 수 있다. 다만 조선 후기에 권력의 중심에 있던 양반들이 주로 관심갖지 않았던 현실 개혁 사상에 실학이 성리학보다 훨씬 더 관심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역사학계에선 이 점을 주목한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대한 다양한 문헌 기록들을 찾아내어 연구하는 자료가 쌓이다 보니, 그동안 거의 완벽하게 호평만 받아오던 실학자들의 주장들이 사실은 조선 시대의 현실과 뒤떨어진 지극히 몽상적이고 비현실적이었다는 반증이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심하게 말하면, 이 중에서도 일부 주장은 '''방구석에서 행한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기까지 하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반계수록의 저자인 유형원은 "우리나라에서는 수레를 쓸 줄 모른다."라고 적어 마치 조선에서는 수레를 전혀 안 쓰는 것처럼 서술했으나 사실은 유형원이 살았던 시대의 조선에서는 수백 대의 수레를 잘만 사용했으며, 박제가도 북학의에서 조선의 배가 물이 차올라 곡식을 싣지 못하는 형편없는 것이라며 혹평했으나 18세기 조선의 경강상인들은 무려 2천석 이상의 곡식을 실어나를 수 있는 대형선박을 잘만 만들어서 사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조선은 육운을 통한 유통보단 수운을 통한 유통을 많이 했다. 물론 육운이 많이 불리한 점이 있었긴 했다 대표적으로 험한 산지와 화강암 지형 때문이다. 이 문제는 터널을 뚫어야 해결이 가능한데 근대에나 가능해진다. #1, #2
또한 실학자들이 조선의 신분제도를 비판하고 평등한 사회를 주장했다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그들이 남긴 글을 잘 보면 오히려 신분제도를 긍정하고 있음이 드러나기까지 했다(...)#
4. 실학자 목록
볼드체 된 인물들은 수능이나 공시에서 자주 출제된 만큼 실학자 중 중요한 인물들로 손 꼽힌다.
- 김정호 - 대동여지도
- 김정희 - 추사체, 세한도
- 박제가 - 북학의
- 박지원 - 과농소초, 열하일기
- 서유구 - 임원경제지
- 안정복 - 동사강목
- 유득공 - 발해고
- 유수원 - 우서
- 유형원 - 반계수록
- 이규경 - 오주연문장전산고
- 이덕무 - 청장관전서
- 이서구
- 이수광 - 지봉유설
- 이익 - 성호사설, 곽우록
- 이중환 - 택리지
- 정약용 -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 채제공
- 한백겸 - 동국지리지
- 홍대용 - 의산문답, 임하경륜, 주해수용
- 홍만선 - 산림경제
5. 학파 목록
6. 같이보기
[1] '''대체'''한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2] 학문이 실생활에 유용해야 한다.[3] 편리한 기구를 사용해서 백성의 삶을 풍족하게 한다.[4] 사실을 토대로 진리를 탐구한다.[5] 성리학에 기원을 두고 있으면서도 다양한 학문에의 관심, 외국에 대한 관심,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등에서 보이는 백과사전식 저술 등 실학, 특히 남인 실학의 기원을 거의 다 보여줬다.[6] 사실 알고보면 고구려 궁전유적이었다. 구획별로 나눠져 있었던 것이 사실 이 때문이다.[7] 다만 국학파를 실학자로 인식하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거의 없는데, 어디까지가 실학이고, 어디까지가 국학인지 애매하기 때문이다. 이익의 제자로 역사학을 다뤘던 안정복은 국학파에 포함되겠지만 안정복에 대해서 실학자라는 인식은 적은 편이고, 인문지리지인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 역시 마찬가지다. 해당분야의 발전을 도모했던, 지도의 김정호나 의학의 허준과 이제마도 국학파에 포함시키는 이들이 있지만 이들을 실학자로 보기는 또 애매한 것이 사실이다.[8] 이상 역사비평 편집위원회,'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역사비평사,2009,p301[9] 한국사학, 동양 철학, 한문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