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기남인

 




1. 개요


인조반정 이후에 조정에 남아 있던 남인들을 대체적으로 근기남인으로 부른다.

2. 상세


인조반정 이후, 붕당은 서인 집권에 남인 소수 등용으로 바뀌었으며, 이 과정에서 성향이 달랐던 청소북중북의 남인으로의 탈바꿈으로 근기남인과 영남남인의 차이점이 드러나게 된다...
라고 써있지만, 일단 근기남인과 영남남인을 간단하게 가를 수 있는 것은 지역의 차이이다. 수도인 한양과 경기도에 거주하는 남인을 '근기남인', 경상도에 거주하는 남인을 '영남남인'이라 불렀다. 이것은 저 위에 문장과도 연결되어 있어, 반정이나 인조 재위 기간에 관직을 떠나 낙향한 정통파 남인의 자리를 실용적인 북인계 내지 청소북이 메꾼 것이다. 영남남인은 이황의 '퇴계학'에 영향을 짙게 밭아 정통 주자학(성리학)과 주자학의 심성론과 예론 등에 대해서 연구한 반면, 근기남인은 상대적으로 실용적인 성향을 가진 청소북과 중북이 섞이며 정통파보단 다른 성향을 갖게 되었다.
근기남인의 학통은 퇴계 이황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배운 정구 때부터 시작된다. 정구는 한려학파의 창시자이자 왕사부동례설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퇴계학파, 남명학파와 회재학파(이언적)가 섞인 한려학파는 조정 내 남인의 근간이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송논쟁 때 남인의 논리였던 '왕과 사대부의 예는 같을 수 없다'인 왕사부동례설이 만들어진 것이다.
정구의 학문은 허목[1], 윤휴[2], 유형원에게 이어져 예송논쟁 때 남인의 주요 논리가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은 성리학이 아닌 초기 유학, 즉 <육경>을 중요시했다. 사대부가 없던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때를 기반하여 쓰여진 것으로, 사대부의 특별한 존재를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왕을 강조하면서 국왕 중심 통치 체제와 토지 제도 정비를 제시했다.
허목을 이어받은 것은 이익이다. 이익과 유형원실학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제자들 역시 실학을 중요시 여겼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인식은 달라서 결국 이들은 공서신서로 나뉜다.

3. 소속 인물



[1] 제자이다.[2] 정구의 제자인 윤효전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