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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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0월, 한국시리즈 1차전 시구자로 초청받은 이충남.
대학 졸업 후, 난카이 호크스에 제2차 지명 2순위로 프로지명을 받고 입단, 6년간 내야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한 채1972년 선수생활을 은퇴한 뒤 난카이 호크스와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특히 선수보다는 오히려 코치로 명성을 날린 경우인데, 수비코치와 작전코치로 일하면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 각 팀의 전력분석을 토대로 적중도 높은 작전을 수립하여 "컴퓨터"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내놓는 작전마다 족족 들어맞고, 상대의 작전을 귀신같이 간파하는데 능했기 때문.
원래 OB 베어스 창단 감독으로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으나 한국에서의 연고도 없고, 재일교포에 대한 일종의 편견도 작용해서 결국 없던 일이 되었다. 한국에서 재일교포로 감독에 오른 김영덕, 김성근, 신용균등 과는 다른 점이 그는 한국에서의 선수 경력이 전혀 없었고 결정적으로 한국말을 전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 프로야구 무대에서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국내 프로구단이 지속적으로 눈독을 들였고, 그 결과 프로 원년(1982년) 우승에 실패한 후 롯데,해태[1] 와의 경쟁 끝에 삼성에서 그를 영입한다. 직책은 '''조감독'''으로 수석코치보다 조금 높은 자리고, 감독인 서영무보다 연봉이 더 높았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서 지휘권에 혼선이 발생하였고, 게다가 서영무 감독의 애제자인 임신근 투수코치를 해임했기 때문에 팀 내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이충남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갈등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었고, 선수들도 프런트의 의중이 실린 이충남 조감독에게 가까워진다. 결국 시즌 도중이던 1983년 5월, 서영무 감독이 자진 사퇴 하여 팀을 떠나면서 이충남이 정식으로 '''감독대행'''에 취임한다.[2]
여기에 장효조, 김시진이 합류했기 때문에 전력 보강도 괜찮았고 감독의 작전 능력도 좋아서 특히 볼카운트 분석이나 투구 패턴 분석을 도입했다는 점은 훌륭하다고 꼽을 수 있다. 여기에 포수 수비능력 향상에도 제법 일가견이 있었다고.[3] 그런데... 삼성은 전기리그 5위, 후기리그 공동 2위에 그친다. 당시엔 1위 아니면 의미가 전혀 없던 시절이라 가을 야구 탈락.[4][5][6] 1994년~1996년 556, 2009년과 함께 삼성 라이온즈가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사례로 남게 되었다.
이유는 감독인 이충남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아직 선수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의사소통까지 되지 않으니 자연히 팀이 제대로 굴러갈 수 없었다. 김영덕이나 김성근처럼 한국에서의 야구 캐리어를 쌓으며 한국 야구의 정서도 이해하고, 무엇보다 한국어가 가능했다면 사정은 좀 더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건 가정일 뿐이다. 여하튼 삼성 구단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한 듯 시즌 종료 후 이충남과의 재계약을 거부했고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 버렸다.
다만, 그가 도입한 시스템은 삼성이 1980년대 강호로 군림하는데 밑거름이 된 것은 분명하다.
삼성에서 퇴단한 이후 일본으로 돌아온 이충남은 광고회사를 경영했고, 학생야구 지도자 자격을 회복하여 모교인 교토 류코쿠 대학의 야구부 코치로 재임 중이라고 한다.
[1] 다만,해태는 이충남 대신 코끼리 감독을 영입하면서 80년대~90년대의 기간동안 총 9번 우승을 하게 된다. [2] 다만, 삼성 구단이 오늘날에도 그를 2대 감독으로 정식 인정하기 때문에, 그를 감독으로 본다. 다시 말해 감독 재임 시절에는 정식감독으로 취임하지도, 정식감독이란 호칭도 못썼지만 실질적으로 정식감독 역할을 했기에 2대 감독으로 인정한다는 소리다.[3] 물론 이는 아직 낮았던 한국 야구의 수준때문에 더 빠른 향상이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일본에서 1류 코치로 인정받았으니.[4] 당시 제도는 전기리그 1위/후기리그 1위가 한국시리즈 직행이었고 한 팀이 두번다 1위를 하면 아예 한국시리즈를 생략하고 그 팀이 통합 우승을 한 것으로 간주했다. 당시 구단수가 적어서라고는 하지만 프로야구 출범 다음해인 1983년부터 피해를 보는 팀이 3년 연속으로 나오는 등 매우 얼척없는 제도였다.[5] 1983년 삼미 전/후기리그 2위, 1984년 OB 베어스 전/후기리그 2위+통합 승률 1위, 롯데 자이언츠 전/후기리그 2위, 이 3팀은 해당 년도에 모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그나마 1982년에도 편법으로 한국시리즈가 열렸지 그게 아니었으면 OB가 한국시리즈 없이 통합 우승을 했다.[6] 1985년에는 아예 한국시리즈가 생략되어버리는 등의 코미디를 찍자 한번의 수정을 거쳐 1989년에 지금과 같은 제도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