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로 발보

 


[image]
'''이름'''
이탈로 발보 (Italo Balbo)
'''연도'''
1896년 6월 5일 ~ 1940년 6월 28일
'''국적'''
이탈리아 왕국
1. 개요
2. 생애
2.2. 파시스트당에서의 활동
2.3. 두 번의 대서양 횡단
2.4. 무솔리니와의 갈등
3. 여담
4. 관련문서


1. 개요


이탈리아 왕국의 군인이자 공군 장관. 이탈리아 공군의 아버지로 불린다.[1]

2. 생애



2.1. 제1차 세계 대전


이탈리아의 페라라에서 출생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20살의 나이로 육군 소위로 참전하여 알프스 산맥의 전선에서 싸웠으며, 그 공으로 무공훈장을 수여받는다. 그 후 대위로 제대, 평범한 은행원으로 살아가던 중 파시즘에 빠져 무솔리니의 국가 파시스트당(이하 파시스트당)에 가입하게 된다.

2.2. 파시스트당에서의 활동


파시스트당 가입 초기에는 파시스트 지역구 비서로 일하다가 그 후 정치깡패 조직 '''첼리바노'''를 이끌며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민주주의자 등 다른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으며 수많은 폭동에 참가한다. 그러던 중 베니토 무솔리니는 혼란한 정국에 호응해 1922년 10월 27일 로마 진군이란 도박을 감행한다. 이때 발보는 다른 파시스트들과 로마 진군을 지휘한다. 그런데 당시 사회주의에 반감을 품고 있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무솔리니 내각이 수립되었고, 도박은 대성공했다. 이때부터 그저 악명 높은 정치 깡패일 뿐이었던 발보의 삶은 180도 바뀌게 된다.
무솔리니 집권 후 1924년, 발보는 파시스트 시민군 사령관, 1925년에는 경제부 차관을 맡았다. 그러다 1928년에 '육군항공대'로서 육군에 묶여 있던 이탈리아 공군이 독립하게 되자, 발보는 공군 사령관을 맡게 되고, 1929년에는 유럽 최연소로 공군 장관의 자리에 오른다. 본래 1차 세계 대전에도 육군으로 참가할 만큼 공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곧 자신이 스스로 조종사가 될 만큼 공군과의 사랑에 빠진다.

2.3. 두 번의 대서양 횡단


공군 장관에 오른 이탈로 발보는 이탈리아 공군의 힘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1930년 12월 17일부터 1931년 1월 15일에 걸쳐 쌍동수상기인 사보이아 마르케티 S.55 비행정을 거느리고 이탈리아에서 리우 데 자네이루까지 비행을 한다. 이 일로 발보의 인기는 상승, 이탈리아 공군 역시 선망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발보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또 다시 한번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로마에서 출발해 시카고까지 약 1900km에 달하는 거리를, 1933년 7월 1일부터 8월 12일까지 43일에 걸쳐 비행하게 된다. 이 때 당시 시카고에는 세계박람회가 열리고 있었고, 발보가 이끄는 24기의 비행기가 시카고 상공에 도착하자 미국 시민들은 열렬한 환영으로 맞아준다. 발보는 뉴욕에서 카 퍼레이드를 벌이고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식사도 같이 하게 된다. 이 때 당시 뉴욕 시장인 존 오브라이언은 "당신의 업적은 콜럼버스나 마르코니에 버금간다."며 발보를 칭송하였고 그를 찬사하기 위해 시카고 7번 가의 이름을 '이탈로 발보 가'라고 명명했다. 발보는 이 일로 전 국민적 사랑을 넘어 전 세계의 유명인사가 된다.
[image]
[image]
뉴욕에서 카 퍼레이드 중인 발보
그가 귀환하자 오랜친구인 무솔리니도 기쁘게 그를 맞아주며 대대적 환영을 받는다.

그는 뛰어난 비행가이고 위대한 혁명가임과 동시에 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

무솔리니, 발보의 귀국 환영 만찬에서


2.4. 무솔리니와의 갈등


'''"당신은 독일의 구두나 닦고 살 것인가!"'''

-

무솔리니가 독일과 강철 조약을 체결하려고 하자 한 말.

[image]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발보의 날이 가면 갈수록 치솟는 그의 인기에 무솔리니는 발보를 시기하고 있었으며, 그를 국민의 관심 밖으로 두기 위해 1934년 리비아 총독으로 좌천시킨다. 사실상 사막으로의 유배나 다름없는 처사였고 공군은 강력하게 반발한다. 하지만 발보는 "나는 명령에 복종할 따름이다, 나는 군인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리비아 총독에 부임한다.
리비아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점점 시대에 뒤떨어지던 이탈리아 공군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던 발보는 무솔리니가 친독일 정책을 펴며 독일과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며 무솔리니에 대해 반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2.5. 제2차 세계 대전과 최후


1939년 이탈리아가 대놓고 독일을 지원하고 나서자, 화난 발보는 무솔리니에게 "이렇게 비굴한 동맹을 맺다니. 당신이 독일의 구두닦이냐!" 등의 강도 높은 비난을 날렸고 무솔리니는 이에 발보에게 "배만 부른 민주주의의 돼지"라고 맞받아친다. 결국 무솔리니는 국민들의 인기가 상당했던 발보를 제거할 결심까지 내린다. 발보도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나서 부하들에게 "너무 늦기 전에 무솔리니를 처단하는 것이 좋다." 라고 하였고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서도 "히틀러는 나쁜 결말을 맞이할 거다." 라고 말했다.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상황을 지켜보던 무솔리니는 독일이 전격전으로 프랑스를 압살하는 것을 보자 재빨리 연합군에 선전포고를 때려버린다. 이에 발보는 북아프리카에서 잔뼈가 굵은 영국군에게 이탈리아군이 상대도 안 될거라는 사실을 직감하지만 이탈리아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기로 결심하고 북아프리카의 이탈리아군 정비에 들어간다.
[image]
격추된 비행기의 잔해
1940년 6월 28일 영국과의 항공전을 대비해 토브룩 상공을 경계 비행하고 있던 발보는 어디선가 날아온 대공포에 격추되어 사망한다. 알고 보니 더 어이 없었던 것은 발보의 격추 원인이 영국군이 아니라 토브룩에 정박하고 있던 이탈리아 해군순양함 산 조르지오의 오인사격이었던 것.
발보의 이런 허망한 죽음을 두고 무솔리니의 암살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발보의 유족들은 무솔리니가 계획한 암살이라고 굳게 믿었다. 무솔리니가 토브룩을 방문했을 때 발보의 사망장소에 가보는 것을 거부한 것도 암살설이 널리 퍼진 계기가 되었다. 현재는 단순한 오인사격이라는 것이 통설이지만. 발보의 유해는 1940년 7월 4일,트리폴리 교외에서 화장되었다.

3. 여담


이탈로 발보의 사후 그의 자리였던 리비아에 주둔해있는 이탈리아 군 총사령관은 로돌포 그라치아니가 이어받았다. '''그리고 리비아에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4. 관련문서



[1] 비슷한 인물로 보자면 독일의 헤르만 괴링이 있다. 둘 다 전쟁 전까지 해도 두 국가의 공군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