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역임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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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의 3대 국왕
이탈리아령 알바니아의 초대 국왕
에티오피아 제국의 8대 황제
'''
'''본명'''
Vittorio Emanuele Ferdinando Maria Gennaro di Savoia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페르디난도 마리아 젠나로 디 사보이아
'''출생'''
1869년 11월 11일
이탈리아 왕국 나폴리
'''사망'''
1947년 12월 28일 (향년 78세)
이집트 왕국 알렉산드리아
'''국적'''
[image] 이탈리아 왕국
'''신체'''
153cm
'''종교'''
가톨릭
'''가족'''
아버지 움베르토 1세
어머니 마르게리타 왕비
'''배우자'''
엘레나 페트로비치네고시
'''자녀'''
움베르토 2세
욜란다
마팔다
조반나
마리아 프란체스카
'''재위 기간'''
이탈리아 왕국 국왕: 1900년 7월 29일 ~ 1946년 5월 9일
에티오피아 제국 황제: 1936년 5월 9일 ~ 1941년 5월 5일[1]
알바니아 왕국 국왕: 1939년 4월 19일 ~ 1943년 11월 27일[2]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전
2.2. 즉위 및 초기 집권기
2.3. 집권 중반기 : 무솔리니 정권기
2.4. 집권 말기 : 축출된 군주
2.5. 퇴위와 말년
3. 사후 논란
4. 가족관계
5. 기타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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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보이 왕가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3대 국왕이자 에티오피아의 황제(1936 ~ 1941), 알바니아의 왕(1939 ~ 1943)을 겸임했다. 다만 이탈리아 국왕 외의 지위는 추축국 말고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사실상 이탈리아 왕국 마지막 국왕이나 공식적으로 아들 움베르토 2세가 34일 동안 재위를 했기 때문에 마지막 국왕은 아니다.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당원들이 로마로 진군하며 폭동을 일으켰을 때는 이에 대한 진압을 거부하고, 무솔리니에 협조함으로써 그의 집권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후 무솔리니의 독재와 침략을 방관하여 끝내 패전이라는 파국을 맞이하였고, 이후에는 패전 수습을 위해 어떻게든 노력하였으나 왕정 종식이라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2. 생애



2.1. 즉위 전


나폴리에서 태어났기에 나폴리의 왕자라는 별명이 있었다. 사실 그가 태어났을 때에는 이미 할아버지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 의해 이탈리아 통일이 거의 완성된 상태였으며 태어난 후 2년만에 이탈리아 통일이 공식적으로 완료되면서 그의 미래에는 신생 열강국가인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차기 지도자라는 빛나는 미래가 열려 있었다.
이후 왕실 교육을 받으며 평범하게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 움베르토 1세는 건강했기에 특별한 일이 없었으면 그의 즉위는 40대 즈음 되어서야 가능했을 것이었고 본인도 특별히 왕위에 목매달지 않았다. 다만 그는 왕세자 시기에 에티오피아 침략의 실패[3] 및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 세력의 발호를 지켜보았다.
즉위 전 그는 성격이 너무 좋아서 조금만 더 심지가 굳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간단히 말해서 성격이 너무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이라는 거였다. 이탈리아 왕국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었지만 동시기 입헌군주국이었던 영국에 비교해서 왕의 권한이 매우 강하여 총리 임명권 및 의회 해산권에 총리 및 의회가 내놓은 제안에 대한 거부권 등이 있었다. 사실 의회 정치가 잘 돌아가면 왕이 유순한 것이 오히려 좋은 경우이다. 왕이 의회가 하는 일에 태클 안 걸고 조용히 얼굴마담이나 하면 되는 거니… 그러나 이탈리아의 정치 환경은 그렇게 좋지는 못했다.

2.2. 즉위 및 초기 집권기


그가 31세가 되던 해인 1900년 7월 29일, 못해도 10년은 더 살거라 의심치 않았던 부친 움베르토 1세아나키스트가 쏜 탄환에 맞고 급서하면서 그는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이탈리아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가 즉위했을 때 이탈리아는 낙후된 노동환경에 이어 좌파 정당의 힘이 강해졌고, 열악한 경제여건에 몇 년 전 에티오피아 침략전쟁의 참패가 겹쳐 사회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자본가와 이들을 대표하는 의회 우파 세력은 에티오피아에서 된통 깨진건 그새 잊고 다른 열강처럼 식민지 획득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요구했다.
그는 의회 및 자본가 세력이 주도한 식민지 전쟁을 묵인했고, 덕분에 이탈리아는 1912년에 다 죽어가는 병자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걸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이탈리아군은 무능함을 보였다. 리비아의 해안을 점령한 이탈리아군은 내륙의 적군을 상대하지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결국 리비아가 아닌 에게 해의 도데카니사 제도가 이탈리아 해군에 의해 점령된 이후 오스만 제국에게서 항복을 받아내어 어떻게든 승리는 할 수 있었고, 지중해 건너 리비아와 도데카니사 제도를 식민지로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작 이정도로 자본가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는 없었고, 우파들은 식민지를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고, 당시 좌파는 좌파대로 날뛰어서 국왕을 머리 아프게 하였다.
한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이탈리아는 중립을 선포하였다. 선왕 시절에 맺어진 삼국동맹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지중해를 장악한 영국과 리비아의 주권을 인정해 준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기는 힘들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정치권은 자유주의 세력과 가톨릭, 사회주의 세력이 중립을 지지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중립에 유리하게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유순하다던 국왕이 나서서 비상대권을 발동하겠다고 위협하였고, 살란드라 내각을 이용해 협상국동맹국 각 측에 참전을 골자로 한 비밀 회담을 하게 했다. 당연히 의회는 분노해 날뛰었고, 국왕은 의회의 절차를 무시한 채 이탈리아의 참전을 추진하였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엄청난 식민지를 약속받고 이탈리아는 1915년에 독일-오헝에 선전포고했으나 오헝과의 전투에서 우세를 점하면서도 오헝을 제대로 밀어내지 못하는 등 졸전을 보였다.

2.3. 집권 중반기 : 무솔리니 정권기


국왕과 내각에 의해 추진된 1차대전은 결국 이탈리아가 가담한 협상국 측의 승리로 끝났으나 이탈리아 입장에선 원하는 만큼 충분한 대가를 얻지 못했다. 이탈리아가 획득한 영토는 아드리아해 북부의 약간의 일리리아 지방쥐트티롤에 그친 반면, 60만 명이 넘는 전사자와 수십만 명의 부상자라는 막대한 인명피해, 그리고 심각한 전비 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이처럼 말이 좋아 승전국이지, 막대한 희생에 비해 얻은게 없다는 인식이 이탈리아 전역에 들끓었고[4]1920년부터 이탈리아 사회와 정치권은 극심한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특히 의회는 어느 당도 안정적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 채 좌우파간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총리가 심심하면 바뀌는 등 지도력 부재의 상황에 빠져 있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역시 1차대전의 참전에 책임이 있었고, 이탈리아에서 왕에게 부여되던 권한을 엉뚱한 데 써 버린다.
1922년 10월 22일, 파시스트당 당수 베니토 무솔리니와 그를 추종하는 4만 여명의 검은 셔츠단이 수도 로마로 진군을 시작했다. 루이지 팍타(Luigi Facta) 총리는 어영부영 망설이다가 뒤늦게 강경 대응으로 방향을 잡고 국왕에게 계엄령 선포와 진압 부대 동원을 요청했다. 사실 검은 셔츠단이 로마에 도착한 10월 말엽 그 수는 7천 여명으로 줄어들었고 그나마도 즉시 진압이 가능한 상태였다.[5]
그리고 이들을 확실하게 진압하기 위해 총리가 계엄령을 선포하기 위해 재가를 요청하자, 국왕이 재가를 거부하여 검은 셔츠단 진압을 막았다. 이는 파시스트에 대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우호적 태도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국왕은 약 3달동안 의회가 정부 구성도 못해서 자기들끼리 싸우는 판국에 검은 셔츠단이 끝내 로마까지 들어온 점에 주목했고, 의회 내 정당들이 정부를 구성할 것을 기다리며 언제까지 임시 총리 체제로 갈 수도 없다고 제멋대로 판단했다. 더구나 이탈리아 좌파와 노동운동 세력은 7월 31일부로 전국적 총파업에 돌입, 안그래도 선왕의 암살로 좌파와 노동운동 세력을 싫어하던 국왕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우려를 부추기고 있었다.
이러한 기존 정치권의 혼란과 사회주의 혁명의 우려 속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사회주의 세력의 준동을 막고 정치권의 혼란을 막아줄 인물로 로마 진군을 단행한 베니토 무솔리니에 기대를 걸었고, 국왕의 권한으로 베니토 무솔리니를 총리에 지명해 버렸다! 사실 무솔리니도 의회 내 우파 정당 간 혼란과 분열을 틈타 파시스트당 우위의 연립내각을 구성하려는 목적이었는데 느닷없이 국왕이 직접 "너님 총리 해보시졈?" 했던 것.
이후에는 국왕의 현안정치 개입권한을 발동하지 않고 조용히 잘 살았다.(…) 가끔 무솔리니랑 사진도 찍어주며 무솔리니 파시즘 독재체제의 기반이자 얼굴마담 역할도 충실히 해주었고, 무솔리니도 자신이 추진하는 국정 방안에 어깃장 놓지 않는 국왕에게 충분한 예우를 보여주었다. 물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관점에서는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당 집권으로 좌파노동조합이 척결되어 '왕정에 대한 위협'과 '국익과 사회를 위협하는 혼란'이 사라졌다는 점[6]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이후 무솔리니 정군의 침략 전쟁 수행과정에서 에티오피아 황제와 알바니아 국왕을 겸하게 된다. 왕은 무솔리니의 침공 계획에 이견이 없었고, 겸임하게 된 에티오피아 황제위와 알바니아 왕위에 대해서도 기뻐했다. 심지어 이탈리아가 무조건 항복한 후에도 이 두 지위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2달 동안 고집을 부리다가 마지못해 포기했다.

2.4. 집권 말기 : 축출된 군주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6월, 이탈리아가 나치 독일의 동맹으로서 연합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이탈리아는 다시 전쟁에 참전했다. 그리고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에서 보여주듯 '''신나게 털리기 시작'''했다.(…)
프랑스 침공 실패에 일종의 에피소드 정도로 웃어넘길 수 있었으나 사실상 건드릴 필요가 없던 그리스 침공에서 약소국가 그리스에게 털려서 독일의 구원을 받아야 하질 않나,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는 20만 대군이 2만에게 뼛속까지 털리면서 본진인 리비아까지 모두 토해내고 독일군이 와서야 겨우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에르빈 롬멜이 점령하려고 그렇게 애쓴 토브룩 요새는 본래 이탈리아 것이었다.(…)
1941년 1월 영국군 주도 연합군의 아프리카 전역이 시작되어 5월에는 에티오피아를 상실하고 그 해 말에는 동아프리카 전역을 상실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42년 11월 북아프리카 식민지까지 모두 상실하고 이듬해 5월에는 이탈리아군이 북아프리카에서 완전히 축출된다. 이렇게 북아프리카 전역이 종결되자 연합군의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본토 진공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결국 연합군은 남부 시칠리아 섬에 상륙, 이탈리아 전선이 시작되었다. 파시스트당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났고, 노동자들은 종전을 희망하는 총파업에 나서고 있었다. 뒤이어 7월 19일에는 연합군 공군에 의한 대규모 로마 공습이 이뤄져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7월 24일, 연합군이 로마에 대규모 공습을 단행한 직후 열린 대 파시스트 평의회에서 19 대 7로 무솔리니 축출을 결의했다. 이에 격분한 무솔리니는 '''"너님들 다 뒤져씀!! 국왕 폐하가 너님들 다 혼내줄 거임!!"''' 하면서 국왕을 알현했으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위기를 느껴 무솔리니에게 클레임을 걸었다. 21년 전 무솔리니를 총리로 기용한 그 권한으로 이번에는 그 무솔리니를 실각시킨 것이다. 국왕은 무솔리니에게 '''"이제 그만두는 게 어떤가?"''' 하며 실각을 선고했고, 마지막 동아줄로 믿은 국왕에게 버림받은 것을 깨달은 무솔리니는 얌전히 실각당하고, 즉시 국왕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연금당했다.
이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국왕 권한으로 새로운 총리로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를 임명한 다음 연합국과의 강화를 지시하는 등 항복과 종전을 주도했다. 이때가 국왕으로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가장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에 나선 때였다. 결국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다음 정부 지도부와 함께 연합군이 먼저 해방시키고 있던 이탈리아 최남부로 피신했다. 당시 이탈리아군 전력은 독일군에 비해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피신은 불가피한 면이 있었지만, 이로 인해 독일군이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을 지원하기 더 수월해졌고, 이탈리아 북부는 전쟁 참화를 직격탄으로 맞게 되었다.
1944년 6월 로마 탈환 이후 로마로 귀환했으나 왕가는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이후의 대독전 수행에 있어서도 이탈리아는 특별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패전국으로 분류되었으며 전 국토는 전쟁으로 황폐화되었다. 이런 일을 벌인 주범인 무솔리니는 종전 직전에 처단되었으나 국민들은 무솔리니 다음으로 전쟁에 책임[7]이 큰 국왕 및 왕가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특히 북부 주민들은 국왕·왕가가 무솔리니 정권과 함께 전쟁을 벌여놓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재빨리 남부로 피신한 것에 크게 배신감을 느꼈다.

2.5. 퇴위와 말년


전후 사회당, 공산당좌파 진영의 주도로 공화정 수립이 추진되고, 결국 1946년 6월 2일 총선과 함께 왕정 유지 여부를 결정하는 개헌 국민투표 실시가 결정됐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어떻게든 왕정을 유지하기 위해 인기가 없는 자신이 퇴위하는 게 낫다고 판단하고 5월 9일 퇴위와 함께 아들 움베르토 2세에게 양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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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투표는 46:54로 왕정 폐지로 결론이 났다. 무솔리니 실각과 함께 일찍이 연합군에 점령되었던 남부는 군주제 지지 여론이 더 강했던 데 비해, 독일군의 개입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레지스탕스 활동[8]이 상대적으로 더 강력했던 북부는 공화제 수립 여론이 더 강했다. 움베르토 2세와 왕정 지지 측에서는 결과가 조작되었다며 결과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조작되었다는 증거는 없었고 최종적으로 대법원이 이의 제기를 기각했다.
1946년 6월 13일 이탈리아 정치권이 공화정 수립을 선언한 다음날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이집트 왕국으로 망명했다.[9] 망명 이듬해인 1947년 12월 28일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했다. 물론 이탈리아 공화국 정부는 그의 장례식에 일체 조문하지 않았다.[10]

3. 사후 논란


사망 후 그의 유해는 알렉산드리아에 매장됐다가 2017년 12월 17일에 이탈리아 피에몬테로에 있는 비코포르테 성당 구내 사보이아 왕가 묘지에 안장됐다. 또한 프랑스 몽펠리에에서 사망하고 그곳에 매장된 엘레나 왕비의 유해도 이틀 앞선 12월 15일 같은 가족묘지에 안장됐다.
한편, 왕과 왕비 유해의 이탈리아 국내 운구에 대해서 당시 이탈리아 유대인 단체 '이탈리아유대인공동체연합(L'Unione delle comunità ebraiche italiane)' 회장 노에미 디 세니(Noemi Di Segni)는 "파시즘 정권의 급부상에 결코 반대하지 않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파시즘 정권과 파시즘 정권이 자행한 폭력의 공모자"라며 "이탈리아 정부 승인 아래 그의 유해가 송환된 것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고 밝혔다. 또한 이탈리아에 있는 반(反)파시즘 레지스탕스 활동 참가자 전우회(戰友會) '이탈리아파르티잔전국협회(Associazione Nazionale Partigiani d'Italia)' 전(前)[11] 회장 카를로 스무랄리아(Carlo Smuraglia)도 "그의 유해를 엄숙한 의식 아래 국가가 나서서 송환한 것은 (파시즘에 맞선) 역사적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양심과 충돌하는 것"이라며 운구를 허락한 이탈리아 정부를 비판했다.[12]
다른 한편, 왕과 왕비 유해의 이탈리아 국내 운구에 대해서 현 사보이아 왕가 당주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귀환한 증조부의 유해가 안치될 올바른 장소는 판테온"이라고 발언해 빈축을 샀다. 그의 아버지가 했던 무솔리니 파시즘 정권 두둔 발언과 비슷한 정치적 성향의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

4. 가족관계


부왕 움베르토 1세 : 1844년 3월 14일 ~ 1900년 7월 29일 아나키스트에게 암살당했다.
모후 제노바의 마르가리타 : 1851년 11월 20일 ~ 1926년 1월 4일
아내 몬테네그로의 엘레나[13] : 1873년 1월 8일 ~ 1952년 11월 28일 망명 때 남편과는 별거하고 프랑스로 갔다.
장녀 욜란다 마르가리타 : 1901년 6월 1일 ~ 1986년 10월 16일
차녀 마팔다 마리아 : 1902년 11월 2일 ~ 1944년 8월 27일
장남 움베르토 2세 : 1904년 9월 15일 ~ 1983년 3월 18일
3녀 조반나 엘리사베타 : 1907년 11월 13일 ~ 2000년 2월 26일 불가리아의 국왕 보리스 3세의 왕비이자 시메온 2세의 모후.
4녀 마리아 프란세스카 : 1914년 12월 26일 ~ 2001년 12월 7일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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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때문에 다른 굴욕을 당한 적도 있었다. 독일의 빌헬름 2세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단신을 놀리기를 좋아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독일을 방문하자 빌헬름 2세는 일부러 체격이 큰 장병들을 선별해서 의장대를 구성해 방문 행사에 동원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키가 더욱 돋보인(?) 것은 물론이다. 왕비는 반대로 키가 180cm였는데 "내 작은 왕"이라고 부르며 귀여워해줬다고 한다(...)[14]
  •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오프닝에서 잠시 등장한다. 주인공인 귀도와 친구의 차가 고장나 브레이크 없이 돌진하다가 국왕의 퍼레이드에 끼어들게 되고 그 바람에 국왕보다 먼저 앞서가다가 국왕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귀도와 친구가 국왕으로 착각 받아 먼저 환영받으면서 지나갔다. 이때 잘보면 귀도가 사람들에게 비키라면서 손을 흔드는데 그 장면이 나치식 경례를 하는 것과 비슷한 동작이어서 주변 사람들도 다 손으로 나치식 경례를 하고 있다. 그 뒤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본인이 탄 차가 지나가는데 환영하지 않고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 때문에 당황해 하는 표정을 짓는다.
  •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 독일이 카이저 복귀-영국 적대 루트를 탈 시 국가 중점으로 무솔리니를 암살하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국가 지도자가 된다.
  • 제2차 세계 대전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추축국의 지도자 중에서 독보적으로 인지도가 낮은데다 풍자도 덜 당한 인물이다.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연합국에서 만든 프로파간다를 보면 풍자되고 있는 것은 아돌프 히틀러, 히로히토, 베니토 무솔리니였다. 보면 알겠지만 저 셋 가운데 무솔리니만 국가원수가 아니다. 연합국에서는 입헌군주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보다는 파시스트당의 지도자인 무솔리니가 훨씬 더 전쟁의 주동자에 가깝게 보였던 것이다. 물론 실제로도 그렇긴 했다. 그러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권한을 직접 행사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엄연한 이탈리아군의 통수권자로서 전시상황을 모두 보고받았고, 이탈리아군의 작전도 빠짐없이 그대로 보고받아 무솔리니만큼이나 전시상황을 정확하게 잘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비록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이탈리아군이 저지른 잔혹행위가 많지 않았지만, 이탈리아가 직접 확장한 달마티아, 알바니아, 티롤 등에서 이탈리아군이 저지른 전쟁범죄들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모두 알고 있었으나 그냥 방관했다. 그리고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허가하여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 전쟁에서 이탈리아군이 생화학 무기를 사용하는 것까지 허가했다. 그러므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고한 꼭두각시라기보단 전쟁의 공범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히로히토도 마찬가지다.

6. 둘러보기




[1] 국제연맹을 포함해 미국, 소련, 멕시코, 중국 등 국제사회 다수에게 승인받지 못했다. 영국, 프랑스는 1938년에 이를 승인했으나 1940년 6월에 2년 만에 이를 취소했다. 게다가 이탈리아군은 마지막까지 에티오피아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해서, 1941년 초 영국군 주도 연합군이 에티오피아로 진군하는 '''순간까지도''' 몇몇 지역은 여전히 하일레 셀라시에를 지지하는 토착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1943년 9월 8일 이탈리아 정부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한 후에도 2달 남짓이나 '''에티오피아 황위는 의회가 합법적으로 짐에게 부여한 칭호'''라며 황위 포기를 거부하다가 결국 11월에 와서야 공식적으로 포기한다. [2] 1943년 11월 에티오피아 황위를 공식적으로 포기할 때 같이 포기한다.[3] 1896년에 단행된 에티오피아 침공전쟁에서 이탈리아 원정군이 대참패해 궤멸당하고 에티오피아에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맺은 바가 있다. 명불허전 이탈리아군.[4] 볼멘 소리가 나올 법도 한게 이손초 하나를 12차에 걸친 공격에도 뚫지 못하고 60만의 전사자를 내는 추태도 보였지만 어쨌든 전선을 밀어붙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항복을 받아낸 1등 공신은 이탈리아였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쥐트티롤과 기타 지방을 얻었긴 했는데 이게 영 성에 차지 않았던 것. [5] 일단 제대로 무장을 갖춘 인간조차 없었다.[6] 물론 일시적으로 공개 활동만 사라졌을 뿐, 이탈리아 사회당과 이탈리아 공산당 등 좌파는 계속 지하 활동으로 명맥을 잇고 있었고, 나중에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다시 성장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전후 왕정 폐지에 앞장선다.[7] 무솔리니 파시즘 정권의 공격적 대외정책에 힘을 실어준 인사 중 한 명이 바로 국왕 본인이었다.[8] 이탈리아 파르티잔 활동은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보다 더 좌파의 영향력이 강했다.[9] 아들 움베르토 2세는 포르투갈로 망명했고 며느리 마리아 이오세는 남편과 같이 망명했다가 곧 남편을 떠나 스위스 제네바로 이주했다.[10] 이는 그의 아들 움베르토 2세 장례식 때도 마찬가지였다.[11] 회장 임기 : 2011년 4월 16일 - 2017년 11월 3일[12] 기사[13] 몬테네그로 왕국의 국왕인 니콜라 1세의 5녀다. 니콜라 1세는 무려 12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중 10명이 딸이였다.''' 그중 5명의 공주가 각각 타국의 왕이나 왕자와 결혼한 덕분에 니콜라 1세는 유럽의 시아버지라는 별명이 생겼다.[14] 다행히도 아내의 유전자 덕에 아들은 장신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