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민주의
1. 개요
일민주의(一民主義)는 1949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국시로 지정된 '민족 내부의 분열을 없애자'는 통치 이념이다. 초대 문교부 장관이자 철학자였던 안호상(安浩相)에 의해 이론화 되었다.
2. 상세
해방 이후 당시 국민들은 자본주의 편, 공산주의 편 그리고 둘 다 싫다는 조선민족청년단 세력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당시 조선민족청년단은 '''자본주의니 공산주의니 둘 다 싫고 우리식으로 통일하자는 편'''으로 단장은 이범석이었는데, 안호상이 조선민족청년단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주었다. 조선민족청년단, 소위 족청이 주장한 민족주의는 전통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독일 나치의 영향을 받은 제3의 위치로 보인다.[1]"한겨레인 일민(一民)은 반드시 한 핏줄(동일혈통)이다. 이 한 핏줄이라는 것이 일민에는 절대적 요소다. 만일 한 핏줄이 아니라면, 한 겨레 한 백성이 될 수 없고 또 만일 한 겨레 한 백성이라면, 반드시 한 핏줄 일 것이다."
안호상의 저서 『일민주의의 본바탕』 중
사실 안호상이나 양우정의 관점이 이승만의 관점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았다.
이승만은 건국 후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 전국민적 통합을 위해 이 일민주의를 국시로 삼았다. 그리고 계급의 귀천 차별 철폐, 남녀차별 철폐, 빈부 차별 철폐, 지역 차별 철폐 등 각종 차별을 타파하여 전국민의 화합을 이루고자 했다. 이승만이 쓴 일민주의 개술을 보면 그가 무엇을 일민주의의 핵심으로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이승만이 일민주의 개술에서 제시한 일민주의 4대 강령은 다음과 같다.나는 일민주의를 제창한다. 이로써 신흥 국가의 국시를 명시하고자 한다. (중략) 우선 지역적 관념을 없애서 우리가 하나 됨을 억세게 하고 남녀구별을 말아서 우리가 하나 됨으로 북돋게 하자 했으니 이 두가지는 우리 독립운동 초기에 있어서부터 실천하려 한 바요, 귀천 계급의 제거와 빈부 차등의 근절 같은 것은 이념의 체계화로부터 체계의 실현화에 미치게까지 우리 운동의 보철에 맞추어서 일층 우일층 금일의 현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니 이 '일민'이라는 두 글자는 나의 50년 운동의 출발이요 또 귀추이다.
이승만, 『일민주의 개술』 中
- 경제상으로는 빈곤한 인민의 생활 정도를 높여 누구나 동일한 복리를 누리게 할것
- 정치상으로는 대다수 민중의 지위를 높여 누구나 상등 계급의 대우를 받게 할것
- 남녀동등 주의를 실천하여 우리의 화복안위의 책임을 삼천만이 동일히 분담하게 할것
- 지역의 도별을 타파해서 동서남북을 물론하고 대한국민은 다 한 민족임을 표명할것
일민주의를 보급하기 위한 단체는 일민주의보급회였고 안호상이 보급회 부회장을 맡았다. 일민주의보급회는 일민주의 강령 등을 알리는 역할을 넘어서 이승만 우상화를 유지하기 위한 단체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안호상은 전국 교원을 대상으로 사상 검증을 시도하고 여순반란사건을 계기로 좌익 교원 뿐 아니라 이승만 정권과 일민주의에 반대하는 교원들까지 전면적인 숙청을 시도했다. 이후 안호상은 홍익인간과 일민주의를 교육이념으로 채택했다.
대한국민당이 먼저 일민주의를 당시로 삼고 있었으나, 1951년 이승만의 자유당도 당시를 일민주의로 삼고 본격적으로 이승만을 우상화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민족청년단도 해체되고 이범석도 정계 뒷전으로 밀려나면서 1952년 여름 이후로는 일민주의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고 짧은 기간 동안 국시의 자리에 있었던 일민주의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