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한

 



'''대한민국 초대 사회부 장관
전진한
錢鎭漢 | Jeon Jin-han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출생'''
1901년 11월 5일
경상북도 상주군 함창면 오사리# ##
(現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오사리)
'''사망'''
1972년 4월 22일 (향년 70세)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現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묘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본관'''
문경 전씨[1]
'''호'''
우촌(牛村)
'''재임기간'''
초대 사회부 장관
1948년 8월 3일 ~ 1948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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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부모'''
아버지 전경준(錢京俊), 어머니 박성악(朴城岳)
'''배우자'''
최광숙
'''자녀'''
아들 전창원
'''친인척'''
사위 정재철
손자 전상헌, 외손자 정문헌
'''학력'''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경제과 / 학사)
'''종교'''
불교
'''의원 선수'''
'''5'''
'''의원 대수'''
'''1''', '''2''', '''3''', '''5''', '''6'''
'''약력'''
초대 사회부 장관
제헌 국회의원 (경북 상주군 을)
제2대 국회의원 (경남 부산시 무)
제3대 국회의원 (경남 부산시 을)
제5대 국회의원 (서울 종로구 갑)
제6대 국회의원 (서울 종로구)

1. 개요
2. 일생
3. 업적
3.1. 이익균점권
4. 사상
4.1. 자유협동주의
4.2. 성향
5. 매체
6. 참고 문서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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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정치인. 대한민국의 초대 사회부[2] 장관을 역임하였다.

2. 일생


1901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소년기에는 여관 심부름꾼으로 일하다가 1917년 경성부로 올라와 고학하였다. 와세다제1고등학원[3]을 거쳐 1922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경제과에 입학하여 1928년 졸업하였다.
1926년 협동조합운동사를 조직해 협동조합운동, 대중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발판으로 항일독립운동, 노동운동을 하다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이후에는 독실한 불자(佛子)로서 금강산, 오대산 등지에 은거하며 참선을 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이후 정치가로 활동했지만 죽을 때까지 참선을 멈추지는 않았다. 후일에 “정치는 부업이고, 참선이 본업이었다”라 말하기도 하였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처음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간여하다가 한국민주당 발기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후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지지하면서도 노동운동을 하였다.
1948년 5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노동총연맹[4] 후보로 경상북도 상주군 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헌국회에서 활동하면서 제헌헌법에 노동3권과 노동자의 이익균점권 등 노동 관련 조항들을 명시하는데 기여했다. 당시 회의록에는 보통 다른 의원들은 5분 정도 발언하는데 전진한 의원은 이익균점권 조항 명시를 주장하는데 약 20분 동안 발언해 신익희 부의장이 짜증을 내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의 노동 분야에 대한 전문성과 관심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1948년 8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초대 사회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48년 9월 대한노농당 창당에 기여하지만 곧 대한국민당에 흡수된다. 1949년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ICFTU)[5]의 창립과 이후의 국제노동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노동총연맹 후보로 경상남도 부산시 갑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52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재보궐선거에서 대한노동총연맹 후보로 경상남도 부산시 무 지역구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부산시 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5년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반대하는 운동을 하였다. 1955년 노농당[6]을 결성한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노농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갑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윤명운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특별시 성동구 갑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유성권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같은 해 윤보선의 대통령 출마로 치러진 서울특별시 종로구 갑 지역구 재보궐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민정당 창당에 참여하고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에 반대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독립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유진오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2년 별세했다.

3. 업적



3.1. 이익균점권


제헌 국회의원이었던 그는 헌법에 노동자 경영참여권과 이익균점권 조항을 추가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중 이익균점권은 헌법에 명시되지만 노동자 경영참여권은 치열한 토론 끝에 명시되지 못했다.
이익균점권은 제헌헌법 제18조 제2항에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私企業)에 있어서는 근로자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라는 조항으로 명시되었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 삭제된다.
이는 지금 시대에도 매우 급진적인 조항으로, 쉽게 말하면 “자본가기업자본을 출자해 기업의 이익을 일부 분배받는 것처럼, 노동자도 기업에 노동력을 출자하므로 그만큼 기업의 이익을 분배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약 70년 전인 1948년에 우파 정치인이 주장한 내용이다.

3.2. 근로기준법


1953년 최초의 근로기준법 제정에 기여하였다. 지금 기준으로도 노동자의 권익을 최대한으로 보장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노동자들은 에 대해 무지했던 탓에 이 법의 존재조차 몰랐고, 박정희 정부수출중시 정책 탓에 이 법을 지키는 기업이 거의 없었다.

4. 사상



4.1. 자유협동주의


전진한은 우파 정치인으로서 자칫 자유를 억압하고 독재의 도구로 악용될 수 있는 공산주의를 반대했지만, 자본가에 의한 일당적 사회 지배 또한 우려하였다. 그 결과 1955년 이승만과 결별하고 노농당을 창당, 『자유협동주의』라는 책을 펴내 다음과 같은 사상을 제창했다.
자유협동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각자가 창의적으로 제 소질과 재능을 발휘하는 사회, 노동과 자본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 사람들 간의 상호 연대와 자립, 자치, 협동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추구하는 사상이다. 전진한의 말에 따르면 “음악에 있어서 악사가 각자 법열 속에서 자유로이 자신의 악기의 성능과 자기의 개성을 발휘하여 전체와 협동함으로써 하나의 심포니를 형성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는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며 독자적인 자유협동주의 사상 체계를 발전시켜나갔고, “협동이 없는 자유는 방종과 탐욕으로 흐르며, 자유가 없는 협동은 전체주의파시즘으로 귀결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4.2. 성향


전반적인 사상이 사회적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질서자유주의적인 사상과 닮아있다.
노농당 강령으로써 경제민주화의 본래 의미인 경제적 민주주의도 주장했는데, 자유협동주의도 그렇고 연결시켜보면 한국에서도 독일처럼 “자본가와 노동자가 협력하면서 발전한다”는 주장을 한 반공주의적 우익 정치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전진한의 사상은 고전적인 생디칼리즘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나 좌파 사상과는 거리가 있는, 코포라티즘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5. 매체


제1공화국(드라마), 제3공화국(드라마)에서는 배우 김상순이 연기하였다.

5.1. 야인시대



야인시대에서는 성우 이종구씨가 역할을 맡았다. 전진한이 경북 출신임을 감안했는지 동남 방언을 구사한다.
첫 등장은 정부 수립 후 사회부 장관으로서 대통령이 장관들과 대면한 자리에서였는데, 이승만이 그의 남루한 복장을 문제삼았고 임영신도 거들었다. 그러나 오히려 기죽기는커녕, “많은 국민들이 끼니도 떼우지 못하고 고생하는 와중에, 민생을 책임져야 할 장관인 자신이 쓸데없이 겉만 번지르르한 양복이나 빼입고 다닐 수는 없다”고 반박하는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7]
6.25 전쟁 시기 부산에서 활동하는 김두한을 만나 노동운동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으며, 김두한이 학도병을 이끌고 전선으로 가기 전에 유진산과 함께 그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후 3.15 부정선거 때(121화) 자유당의 전횡이 거세지자 “이럴 줄 알았다”고 말하고 나서부터 등장하지 않았다.

6. 참고 문서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특별시 종로구 갑 )'''
제5대 민의원
윤보선


제5대 민의원의원
''' 전진한 '''[8]

종로구 갑, 을 통합
제6대
전진한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특별시 종로구)'''
제5대 전진한(종로구 갑)

제6대
''' 전진한 '''

제7대 유진오
제5대 한근조(종로구 을)

[1] 전국에 6,000여 명밖에 안되는 희성이다. 배우 전인화가 전진한의 종씨이다.[2]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 여성가족부[3] 와세다대학의 예과[4] 이 조직은 훗날 한국노총이 된다.[5] International Confederation of Free Trade Unions[6] 노동당이 아니다.[7] 이에 대해 이승만은 화를 내며 “어른이 하는 말에 토를 단다”고 버럭했다.[8] 전임자 윤보선이 대통령이 되어 나가면서 치뤄진 보궐선거에서 당선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