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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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 1914년~1999년 4월 12일
나는 앞으로 이 건물이 남북의 학도가 한자리에 모여 조국의 장래를 의논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1]
1. 개요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한학자, 금석학자, 서예가. 호는 청명(靑溟), 충청북도 옥천군 출신. 1963년 태동고전연구소를 설립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문 원전을 강독하는 강좌를 진행하였으며, 1976년부터는 전문 연구인력을 대상으로 한학연수생을 선발해 집중적으로 한문을 연수하여 인문학 연구자를 다수 배출하였다.
2. 생애
2.1. 학문 수학과 교수 생활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법화리 버구실 마을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유림(儒林)이었으나 뼈대있는 유학자 집안이라고 할 수는 없었고, 겨우 한자 몇 글자를 섞어 편지나 겨우 쓸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다고 하며,[2] 가세 또한 풍족한 편은 아니었으며, 조부가 별세한 뒤에는 그나마 있던 농토도 팔아 근근히 입에 풀칠할 정도만이 남았다고 한다.
조부 임경호(任敬鎬)에게 4세 때부터 《천자문》을 배웠으며, 그 영향으로 정규 교육은 받지 않았다.[3][4] 조부가 별세한 뒤에는 가세가 기울어 따로 수학의 기회를 갖지 못하다가 14세에 충청북도 보은의 (일종의) 기숙형 서당 관선정(觀善亭)[5] 에 들어가 겸산(兼山) 홍치유(洪致裕)[6] 의 문하에서 6년간 한학을 수학하였다.
20세 무렵에는 가세가 더욱 기울어 관선정을 나와야 했고, 그 뒤에는 대구에서 막노동으로 연명하였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 교원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시행한 중등교원 임용시험을 통과[7] 해 경북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다시 대구사범학교에 초빙되어 강사 생활을 하였으나 둘 다 오래가지 못했고, 그 이후에도 경북고등여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았으나 역시 중도에 그만두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보은으로 피난하였다가 1952년부터는 서울한의과대학[8] 의 전임강사로 활동하였다. 1953년부터는 신석호의 추천으로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서 시간강사 생활을 하였으며, 1956년에는 조교수가 되었다.[9] 물론 이 외에도 고려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등에도 출강하였다. 당시에는 사료 강독과 한국고대사를 위주로 수업하였다고 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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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 교수데모 당시 플래카드에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쓰고 있는 임창순.)
1960년, 4·19 때에도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4·25 교수데모에 앞장섰는데 당시 결의문에 ‘대통령 하야’ 구호를 넣을 것을 주장하였고, 데모 당일에 들었던 플래카드에 “學生의 피에 報答하라.”[11] 라는 구호를 친필로 쓴 일은 유명하다.
이후에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약칭 ‘민자통’)에 참여[12] 하였다가 5·16 군사쿠데타로 인해 3개월간 구속되었으며 석방 직후 해직[13] 되었고, 1964년에는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면서 옥고를 치렀다.
학문적 성과로는 1946년 대구사범 재직시에 무술오작비(戊戌塢作碑)[14] 를 발견했고, 1958년에는 그를 토대로 처음 연구 논문을 썼는데 그것이 「大邱에서 新發見된 戊戌塢作碑 小考(대구에서 신발견된 무술오작비 소고)」이다. 1978년에는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를 판독하고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해박한 금석문 지식을 바탕으로 중원고구려비, 울진봉평비의 판독과 해석에도 참여하는 등 고고학적인 분야에서 활약하였으며, 이 외에도 각종 서첩과 서지적 정보를 추적하는 일에도 다수 참여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규원사화≫인데- 그 책의 내용이나 현재의 위상을 생각하면... [15]
2.2. 태동고전연구소와 지곡서당
1963년부터 태동고전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그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교수 시절 만났던 고려대 출신 제자들의 권유로 시작했다고 한다.(「나의 학문 나의 인생 : 4·25 교수데모에 앞장선 한학·금석문의 대가 – 임창순」, 『역사비평』1992년 8월호, 역사비평사, 1992, 197쪽.) 초창기에는 종로 수표동 동방연서회[16] 사무실에서 연구소를 개설하고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문강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개인의 옥고와 재정상의 어려움 때문에 수차례 자리를 옮기기도 하였다.
1976년부터는 선경그룹의 최종현(SK그룹 최태원 회장의 부친.)이 운영하던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지원을 받기 시작하였고 이때부터 장학생을 선발해 한학 집중연수를 시작하였다. 초창기 교육과정은 5년으로 사서삼경을 기본으로 이수하게 하였고, 동시에 모두 암송시켰다고 한다.[17]
이후 교육 과정은 5년에서 3년으로 줄었으며, 1979년에는 남양주 지둔리로 옮겼는데 그곳은 원래 자신이 1974년부터 기거하기 위해 마련한 곳으로, 새로 건물을 짓고[18] 연수생들을 뽑아 기숙생활을 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태동고전연구소 출신자들은 '태동고전연구소'라는 명칭보다도 '지곡서당'이라는 명칭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여타의 한문 연수 기관과는 달리 사서삼경의 교재로는 한문대계[19] 를 사용하는데, 그의 생전부터도 그랬다고 하며 그것을 선택한 이유는 주희의 집주(集註)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주석을 다양하게 섭렵하기 위해서라고 한다.[20]
임창순은 전통적인 한문 해석 방법이라 할 수 있는 현토(懸吐)를 반대하였다. 애초에 구결토 자제가 전통 시대에 한문을 해석하기 위한 방법에서 나온 것으로 그 자체로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토씨를 고집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구결토에 집착하다보면 한문 해석에서 방해가 된다는 것이 그 이유.[21] 그에 따라 제자들을 교육하는 데에서도 현토를 배제하였으며, 지금도 태동고전연구소에서는 현토를 가르치지 않는다.
1985년에는 연구소의 부지와 장서 일체를 한림대학교에 기증하였고, 연구소는 한림대 부설로 편입되었다. 임창순 자신은 1999년 별세 할 때까지 태동고전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며 한학 연수생을 키우는데 매진하였다.
1995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재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 3월에는 그때까지 남아 있던 자신의 사재 모두를 출연하여 청명문화재단을 설립했고, 계간지인 ≪통일시론≫을 간행하였다.[22] 이듬해인 1999년 4월 12일, 85세로 타계하였다. 장례는 고인의 유지에 따라 화장으로 치렀는데, 이 시기까지만 해도 노년층이나 지도층의 화장 문화가 정착된 단계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그의 화장 사례가 기사에 나기도 했다.[23]
3. 여담
그 자신이 행서와 초서의 대가로 손꼽힐 만큼 유명한 서예가이기도 해서, 서예가인 검여(劍如) 류희강(柳熙綱),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등과도 교분이 있었다. 때문에 검여가 만년에 쓴 관서악부(關西樂府)라는 예서 대자 글씨에 대한 발문을 임창순이 직접 짓고 쓴 적도 있으며[24] 여초는 현재 지곡서당의 한옥 당채에 딸린 건물인 청류헌(聽流軒) 현판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그의 서예 작품은 행서와 초서, 혹은 행초서에 걸쳐 두루 나타나는데, 강렬하거나 굳건하지는 않지만 자유롭고 경직되지 않은 연미함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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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를 쓰고 있는 임창순.
성품이 소탈해서 제자들과는 격의 없이 맞담배를 피우기도 하였고 바둑과 마작을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25] 남양주에 위치한 지곡서당 당채 앞에 위치한 그의 추모비에도 담배를 피우는 그의 모습이 박재동의 캐리커쳐로 담겨있고, 그 앞에는 바둑판이 조각되어 있을 정도. 또 한 서예잡지 기자가 서예와 인격수양에 대해서 질문하자 “그건 서예학원 선생들이 회원 모집하려고 하는 거짓말이고 글씨는 내가 써서 보기 좋으면 그뿐.”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고. 또 제자들과의 맞담배 일화에서도 나타나지만 대단한 골초로도 유명한데 술은 전혀 못마셨지만 담배는 많이 태웠다고 한다. 오죽하면 그의 글씨 작품에 많이 찍힌 낙관 가운데에는 '방랑연운(放浪烟雲)'이라고 쓴 것이 있었다고 한다.
그 자신이 한학자이면서도 역사학과의 전임 교수로도 활동했고, 역사학 자체에 대한 관심도 높아서인지 태동고전연구소 수료생들 대부분은 역사학자인 경우가 많고, 철학 전공자들도 많은 편이며, 묘하게 예학(禮學)에 대한 관심도도 높다. 특히 최근 출간된 ≪의례역주≫ (세창출판사, 2015, 전8권.)의 번역진 5사람 중 4명이 태동고전연구소 출신이며, 그에게서 직접 사서삼경을 배운 인물들이기도 하다.
태동고전연구소의 한학 연수생 선발은 1976년부터 있었으나, 그 이전에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문강좌를 진행하거나 각 대학에 강사로 출강한 바 있어 많은 학자들이 그에게서 한학을 배운 바 있다. 정옥자나 강만길 같은 이들은 한학 연수생 선발 이전에 그에게서 배었던 인물들이며, 한학 연수생 선발 이후로는 박한제, 김영하 같은 이들이 그에게서 배웠다. 학계에 송시열 재평가론을 앞서서 설파하고 있는 지두환이나 대중적으로 송시열 재평가 붐을 일으킨 오항녕 역시 한학 연수원 선발 이후 배운 인물. 임창순의 학문적 계보가 퇴계학파에 닿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묘한 인연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 뉴라이트 계열의 대표적인 인사로 꼽히는 이영훈 역시 그의 문하에서 한학을 배운 적이 있는데 이것도 상당히 묘한 인연.
또한 태동고전연구소의 아이덴티티라 할 수 있는 ‘암송’과 ‘초서’ 역시 임창순 개인의 고집이었다. 특히 암송의 경우 과거 자신이 수학했던 관선정에서의 평가 방식이었다고 하며,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것 또한 관선정에서의 방식이었다고 한다.
아들인 임세권은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4. 이후의 태동고전연구소와 지곡서당
임창순은 1985년 한림대학교 재단에 태동고전연구소와 지곡서당, 부속 대지 및 건물과 장서 일체를 돈을 받지 않고 넘기면서 기존의 연구소의 운영 방식을 존중하면서 교육 활동을 지속한다는 단 한가지의 조건만 걸었다. 이후 태동고전연구소는 한림대학교 부설이 되었으며, 한학연수는 3년 연한의 석사 과정이 되었다.
그러나 한림대학교 재단은 재정 문제를 들어 2014년을 마지막으로 태동고전연구소의 연수기능을 폐지하고, 연구기관으로 존속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임창순이 최초 연구소를 넘길때 걸었던 조건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었고,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태동고전연구소 측은 이미 한림대학교에 내준 재산 일체를 그대로 두고 나와 2015년부터는 낙원동의 오피스텔에서 한학연수를 재개했다. 이때 연구소와 재단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지만 학계에 자리잡은 졸업생들의 도움으로 유지되는 중이다. 다만 합숙연수의 방식을 유지할 수 없다는게 안타깝다고.
[1] 1979년 지곡서당의 당채를 지을 때 임창순이 직접 지은 상량문의 일부. 젊은 시절의 통일 운동 활동과 후진 양성에 대한 그의 열망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임창순을 소개할 때 반드시 나오는 말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이후에 건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면...[2] 심지어 임창순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부친 임원재(任元宰)는 기회만 있으면 출세하려고 했다고 한다.(「나의 학문 나의 인생 : 4·25 교수데모에 앞장선 한학·금석문의 대가 – 임창순」, 『역사비평』1992년 8월호, 역사비평사, 1992, 182~183쪽.)[3] 조부는 학교가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곳이라며 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나의 학문 나의 인생 : 4·25 교수데모에 앞장선 한학·금석문의 대가 – 임창순」, 『역사비평』1992년 8월호, 역사비평사, 1992, 182~183쪽.)[4] 임창순과 같은 세대를 비롯해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한학자들의 경우, 유사한 사례를 경험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보이는데, 유림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간직한 경우에는 이러한 보수적 관점을 배경에 둔 조치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5] 보은 선씨 집안의 선정훈(宣政薰)이 1926년에 설립한 서당으로 인재를 선발해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며 학문을 가르쳤다. 관선정 출신으로 역사학자 신석호(申奭鎬), 한학자 변시연(邊時淵) 등이 있다. 관선정 출신의 한학자 정기형에 의하면 관선정은 1944년까지 보은에 있었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철거된 후에는 경상북도 서령, 상주 등으로 옮겨가며 1951년까지 존속했다 한다.[6] 성리학자, 자(字)는 응원(應遠). 퇴계학파 권상익의 문인이다. 을사의병 당시 의병장 이강년의 휘하에서 종사관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다.[7] 부문은 국어와 국사.[8]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의 전신. 본래 1948년 설립된 동양대학관(東洋大學館)의 후신으로 부산 피난 시절에 서울한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1955년에는 동양의약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다. 1965년 경희대학교에 인수되었다. 참고자료[9] 임창순, 「나의 성균관대학 시절」, 『사림』12·13, 수선사학회, 1997, 808~809쪽.[10] 임창순, 「나의 성균관대학 시절」, 『사림』12·13, 수선사학회, 1997, 808~809쪽.[11] 구호는 국문학자로 당시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 중이었던 조윤제가 제시하였다.[12] 이러한 활동은 민자통에서 활동하던 성대의 동료 교수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이종률과의 인연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종률과는 일제강점기부터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나의 학문 나의 인생 : 4·25 교수데모에 앞장선 한학·금석문의 대가 – 임창순」, 『역사비평』1992년 8월호, 역사비평사, 1992, 188쪽.)[13] 임창순의 회고에 의하면 권고사직이라고 한다.(임창순, 「나의 성균관대학 시절」, 『사림』12·13, 수선사학회, 1997, 813쪽.)[14] 보물 제516호. 신라시대의 비석으로 저수지 축조 과정을 밝힌 내용이다.[15] 사실 이때 규원사화의 서지를 감정한 인물 가운데에는 손보기, 이가원도 포함되어 있다.[16] 서예가 김용진, 김응현 등이 창설한 서예 단체.[17] 태동고전연구소의 ‘시험’이라 할 수 있는 ‘암송’은 현재도 시행되고 있는데, 지금은 사서만을 외운다. 이 외의 과목은 따로 시험을 본다.[18] 이때 들어갈 돈을 마련하기 위해 글씨를 써서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정일균 증언)[19] 1909년 일본에서 발간된 총서로 1973년 증보되었다.[20] 일반적으로 다른 한문 연수기관에서는 내각본(內閣本)으로 불리는 사서대전 판본을 쓴다. 현재는 학민문화사에서 영인해 팔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판본. 하지만 한문대계 판본은 오탈자가 많기고 악명이 높다. 반면 내각본의 경우 오탈자가 적은 편이다.[21] 「나의 학문 나의 인생 : 4·25 교수데모에 앞장선 한학·금석문의 대가 – 임창순」, 『역사비평』1992년 8월호, 역사비평사, 1992, 201쪽.[22] 임창순은 민자통 활동이나 이종률과의 관계에서도 드러나듯 오래전부터 통일운동에도 관여한 바 있다. 때문에 1979년 지곡서당 상량문에서 “나는 앞으로 이 건물이 남북의 학도가 한자리에 모여 조국의 장래를 의논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라는 언급도 한 바 있다.[23]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091600289101014&edtNo=6&printCount=1&publishDate=1999-09-16&officeId=00028&pageNo=1&printNo=3609&publishType=00010.[24] 정확히는 류희강이 임창순에게 발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고, 임창순이 지어준 발문을 미처 다 글씨로 옮기지 못하고 죽었는데, 임창순이 그 나머지를 이어 쓴 것이다.[25] 한학자 가운데 바둑을 좋아했던 인물로는 실제 단까지 취득했던 신호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