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원사화

 

揆園史話
1. 개요
2. 문제점
3. 같이 보기


1. 개요


규원사화(揆園史話) 원문
조선 후기에 기록한 역사서. 진서와 위서로 의견이 갈린다. 북한 학자들은 부분적으로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본다.[1] 작가는 북애자(北崖子)라는 사람으로, 일반적으론 조선 숙종 원년에 저술했다고 본다.[2] 현재 원본은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 중이다.

2. 문제점


20세기 사이비 고대사 위서들의 특징들이 나타나고 있어 신빙성이 낮다. 그러나 정작 환단고기를 공개한 (혹은 제작한) 이유립은 규원사화가 위서라며 비난했다. 환단고기의 내용과는 단군의 계보가 완전히 다른 등 명백하게 어긋나는 부분이 많아서 양쪽 다 인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북한이나 일부 사학계에서는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으나, 환단고기를 연상케 하는 내용들이 넘쳐나며 텍스트 비평도 통과하지 못하는 등 많은 문제가 있어서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규원사화의 내용도 인정하지 않으며 책 자체에 대해서도 위서라고 본다. 일단 전문가 라인에서 심의한 사례를 보자면 1972년에는 고서심의위원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의 3인이 심의하여 조선 왕조 숙종 1년(1675)에 작성된 진본이라 판정했지만, 2003년 3월에는 서지 전문가들이 비공식적이기는 하나 재감정하였더니 대체로 진본이 아니고 일제 때 필사되어 제본된 책이라고 판단했다.
아래에서 설명하듯 현재는 애초에 조선시대 저작이 아니란 주장이 정설이다. 일단 다른 건 몰라도 1889년 일제 육참본부에서 나온 만주지지(滿洲地誌)의 내용이 고대로 실려 있는 식이다. 설령 진서라 할지라도 내용이 고고학적 성과나 교차검증에서 죄다 걸리는 등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사료적인 가치가 없다. 다만 일부에서는 민족주의적으로 보면 평가할 가치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 쉽게 말해 조선시대 원조 환빠 기질이 있던 어느 인물이 병자호란 이후 분해서 쓴 찌라시 비슷하게 볼 수도 있다는 것.
내용만 놓고 보더라도 규원사화가 정말로 1675년에 집필되었다고 한다면 이상한 부분이 있다. 서문에서 "우리 선조들의 옛 강역이 적국의 손에 들어간 지 이미 천여 년(我先祖舊疆, 入于敵國者已千年)"이라고 하는데,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에서부터 계산한다면 천여 년이 되겠지만 규원사화에서는 발해를 명백하게 우리 민족의 나라로 간주하므로 발해가 멸망한 926년에서부터 따지면 비교적 짧은 749년에 불과하다. 여기서 '천 년'이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그저 오랜 세월의 관용적 표현이라고 하거나, 모르는 사람이면 대충 천 년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개탄하면서 역사책을 썼다는 서문에 나온 말이라 설득력이 떨어진다. 아무리 문학적 표현이라 해도 역사책에 그런 구절을 씀은 자승자박이 아닌가? 사족으로 발해 멸망에서 천년 후는 1920년대이다.[3] 게다가 단순히 문학적인 표현으로 보기도 어렵다. 선덕여왕대(632년~647년)에 건립된 첨성대를 천수백 년이 지나도록 서 있다고 서술했기 때문이다.
또한 1675년은 강희제의 재위기간으로 청나라가 강성한 시기인데도 여진족을 쇠미한 일족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청나라가 망한 이후에 더 강한 이웃이 나타나면 조선을 정복하고 백성을 노예로 부릴 것이라고 말하며 애통해하기까지 하는 등 일제강점기가 아닌 숙종 연간에 작성된 사료라면 지나치게 예언적인 구절이 많다. 더구나 규원사화에서는 초기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관념대로 여진족을 우리와 같은 민족으로 보는 관점을 그대로 취하기 때문에, 압록강 북쪽의 우리의 강역을 잃었다고 슬퍼하면서 그와 동시에 여진족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고 강변한다. 심지어 우리가 여진족과 연합해서 중국을 무찔러야 비로소 중국의 오만함을 꺾을 수 있으리란 말까지 나온다. 효종의 북벌 계획이 실현되지 못함을 한탄한 구절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자가당착. 청나라가 만주와 중국 본토를 석권한 1675년에 쓰여진 글이라면 좀처럼 납득이 안 회는 모순적인 부분으로, 이는 규원사화가 실제로는 이미 청나라가 멸망한 시점에 작성되었음을 시사한다.
사실 연도 표기만 봐도 문제가 있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셈법을 따른다면 상지2년과 을묘년이 같을 수가 없다. 유교적 가치에 따라 반정 등으로 선왕을 축출하고 즉위한 경우가 아닌 한, 선왕이 통치한 마지막 해 또한 선왕의 통치기간으로 본다. 이론적으로 1월까지만 선왕이 통치하고 2월에 새 왕이 즉위했다고 해도 그 해는 선왕의 통치기간으로 잡는다.
숙종은 1674년(갑인)에 즉위했다. 하지만 이해는 선왕 현종의 통치기간으로 여겨 현종 15년으로 간주하고, 1675년(을묘)이 숙종 1년이 된다. 만약 숙종 때 선비가 1675년을 의도하고 글을 썼다면 '상지원년을묘(上之元年乙卯)'라고 썼을 것이다.
시대적 차이가 좀 있으나, 19세기 사람인 최익현이 유한라산기를 쓰면서 첫머리를 상지십년계유동上之十年癸酉冬(임금이 즉위하고 10년인 계유년 겨울)이라는 말로 시작하였다. 고종이 1863년에 즉위했으나, 이듬해부터 고종 1년으로 쳤기 때문에 최익현이 말한 '상지십년계유'는 1873년이다. 실제로도 1873년은 계유년이기도 하고.
그런데 규원사화에서는 숙종이 즉위한 해를 1년으로 보고 그 다음해를 2년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연도표기방법은 결코 조선시대 선비들의 방식이 아니다. 혹시 '상지2년을묘'란 구절의 '상'이 숙종이 아닌 다른 임금을 가리킬까? 그런데 조선시대 전체를 통털어 즉위 후 2년째가 을묘년인 임금은 없다.[4] 이는 규원사화가 위서라는 또다른 근거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유형의 글은 사실 진서라고 한들 가치가 없다는 것. 교차검증을 해보면 다른 사실과는 죄다 틀려먹고 또 고고학적 발굴 성과와도 엇나가는데, 그렇다면 무엇을 취해야 맞는지 알 수가 없다.[5] 진위 논란을 떠나 규원사화가 그렇게 까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규원사화에 대한 위서론과 진서론의 비교. 한국어 위키백과 링크. 참고할 사람은 참고하자.

3. 같이 보기


[1] 여기서 이상한 오해가 생겨 북한에서는 규원사화뿐 아니라 환단고기도 정서로 본다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는데, 환단고기는 북한에서도 위서로 본다. 해당 항목 참조.[2] 서문에서 만주족을 언급하면서 효종의 북벌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원통해하는 듯한 표현이 있고 상지이년을묘삼월상순(上之二年乙卯三月上澣)에 썼다고 기술하는데, 효종 이후 즉위 후 1~2년째가 을묘년인 임금은 숙종밖에 없으므로, 해당 표현이 숙종 즉위 다음해인 1675년을 의미한다는 점에는 이론이 없다.[3] 이 때문에 '상지2년을묘'가 1675년이 아닌 1915년이며 '상'은 조선의 왕이 아닌, 1913년 3월에 취임한 미국의 우드로 윌슨을 의미한다는 말도 있다. 혹은 1914년에 즉위한 교황 베네틱토 15세나. 물론 농담이겠지만, 은근히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4] 그나마 연산군과 숙종만이 즉위 후 1년째가 을묘년이다.[5] 물론 규원사화에 깔린 17세기 사대부들의 생각이나 분위기를 추측하는 자료로 기능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을 넘어 기재 내용 자체의 신뢰도는 설사 진서라 해도 역사에 적용할 가치가 없다. 역사학에서 사서의 내용과 동급으로 중요한 것이 교차 검증과 유물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