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신라 적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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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대한민국 국보 제198호'''
'''단양 신라 적성비'''
丹陽 新羅 赤城碑


'''소재지'''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3-1번지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수량/면적'''
1기
'''지정연도'''
1979년 5월 22일
'''제작시기'''
신라 진흥왕
1. 개요
2. 상세
3. 위치
4. 바깥고리
5. 국보 제198호


1. 개요


丹陽 新羅 赤城碑. 단양 신라 적성비는 충청북도 단양군에 있는 신라 시대의 비석으로, 국보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다.

2. 상세


원래 장수왕 이후로 백여년간 고구려 영토였던 충북 단양 지역을 신라정복군주 진흥왕 시대 550년경에 공격해 차지한 뒤 현지 주민들을 신라의 백성으로 포섭하기 위해 만든 비석이다. 비석에는 440자 정도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사부, 탐지, 비차부, 김무력삼국사기에서도 이름이 나오는 공신들의 이름이 나오고[1] 이들에게 교시를 내려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할 때 큰 도움이 됐다가 사망한 현지인 야이차(也尔次)와 그의 가족에게 상을 내리고, 다른 단양 현지 주민들도 야이차처럼 신라에 충성하면 상을 받을 것이라거나 하는 내용이 있다. 신라는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를 전후해 한반도 중부 지역을 차지해 경상도에 국한된 지역 패권국가에서 삼국시대의 주역으로 성장한다. 더 이전의 신라 금석문포항 냉수리 신라비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는 신라왕이 귀족들과 국정을 협의했지만 여기서는 왕이 명령하고 귀족들끼리 협의하고 있어서, 지증왕 - 법흥왕 이후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왕권이 상당히 강해진 것도 알 수 있다.
적성비가 세워진 시기는 대략 550년으로 파악하는데, 삼국사기를 보면 550년 3월에 이사부가 진흥왕의 명을 받아 이곳 근처의 도살성과 금현성을 빼앗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기록된 공신들의 관등도 연대를 파악하는 근거 중 하나다. 때문에 단양 적성비와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단양 적성의 초축 연대도 대략 그 시점으로 추정하고 있다.
진흥왕 시대에 세운 여러 비석 중 하나지만 다른 비석들과 달리 단양 적성비는 진흥왕 순수비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단양 적성비는 4개의 순수비들(북한산, 창녕, 황초령, 마운령비)보다 먼저 세워진 것으로, 이사부와 그 휘하의 신라장군들이 고구려 영토였던 적성(赤城)을 공략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비에는 당시 이들을 도왔던 적성의 토착민 '야이차'를 포상하였다는 내용도 적혀있다. 반면 순수비는 신라가 한강의 하류까지 차지하는 등 영토를 최대로 확장한 뒤, 진흥왕이 직접 손에 얻은 영토를 돌아다니며 세운 것으로, '순수'(巡狩)란 '왕이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살피다'라는 의미다. 본 비석과 기타 순수비들은 그렇게 진흥왕의 활발한 정복 활동을 보여준다.
비석은 1978년 1월 6일 단국대 정영호 교수가 온달의 유적을 찾고 죽령을 중심으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밝히는 학술조사를 벌이기 위해 찾아왔다가 한 돌부리에 신발 흙을 털어내려고 고개를 숙였다가 아래 돌에 '대(大)' 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고 흙을 야전삽으로 허겁지겁 걷어내보니 비문이 드러났다고 한다. 비석의 아래쪽은 상당히 깨끗한데 비해 위쪽은 여러군데 깨져있는 게 보이는데, 발견 당시 비석이 땅에 묻혀있고 윗부분만 하필이면 등산로에 드러난 상태였어서 풍화도 될 대로 됐지만 등산객들한테 많이 밟히고 등산 장비에 쪼여져서 조각났다고 한다.

3. 위치


이름대로 단양 단성면에 위치해있으며 단성면사무소 근처 뒷산 정상에 위치해있다. 지형이 산꼭대기에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쌓여있어 왜 단양 적성비를 여기 박았는지 짐작 될 정도로 풍경이 걸작이다.
중앙고속도로 단양 휴게소(춘천 방향)에 단양 적성비로 통하는 길이 있어서 쉽게 갈 수 있으며 친절하게 이정표까지 별도로 깔아놨다.[2] 단 부산 방향에서는 휴게소로 진입하는 길이 없기 때문에 굳이 가겠다면 단양IC에서 회차해야 한다. 단양 휴게소 상, 하행이 강 건너 7km나 떨어져 따로 놀기 때문.
면사무소 근처 농협 단성 지점에서 산으로 가는 길이 있지만 외부에서 단성면으로 들어오는 가장 빠른 방법이 중앙고속도로 단양IC에서 빠지는 것이기 때문에 단양 현지인이 아니라면 휴게소를 통해 가는게 가장 편리하다.

4. 바깥고리



5. 국보 제198호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비(碑)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고관 10인의 관등과『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巡狩碑: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拓境碑: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1] 삼국사기의 기록과 한자는 다르다. 예를 들면 이사부 장군은 적성비에서는 伊史夫, 삼국사기에서는 異斯夫로 나온다. 삼국시대는 이름이나 지명을 쓸 때 한자가 고정된 게 아니라 순우리말 이름을 발음이 비슷한 한자를 빌려 쓴 것이라, 같은 대상도 한자가 기록마다 달라지기도 한다.[2] 1박2일에서도 이 루트를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