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고구려비

 


[image] '''대한민국 국보 제205호'''
'''충주 고구려비'''
忠州 高句麗碑 | Chungju Monument


'''소재지'''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감노로 2319
(용전리 280-11)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수량'''
1기
'''지정연도'''
1981년 3월 18일
'''제작시기'''
삼국시대, 397년? 449년?
[image]
1. 개요
2. 내역
2.1. 397년설 제기
3. 빨래판으로 쓰였다는 루머
4. 전문
5. 참고 문헌


1. 개요


한반도에 있는 유일한 고구려의 비석. 고구려가 주로 북방을 공략한 광개토대왕 시대 이후 장수왕 시대에는 남진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면서 한반도 중부까지 영토를 확장한 뒤 현재의 충주 지역에 세웠다.
1979년에 발견되어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본래는 입석마을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보호각 안에 있었지만, 가까이에 고구려비 전시관을 건축한 뒤 전시관 안으로 원본을 옮겼다.
예전엔 '중원 고구려비'라고 불렀는데 명명 당시 비가 있는 장소가 중원군[1]이었기 때문. 현재는 중원군과 충주시가 1995년 도농복합시가 되어 합쳐졌으므로 '충주 고구려비'라고 부른다. 아직까지는 교과서 등에서 '중원 고구려비'라는 말을 더 많이 써왔기에 '중원 고구려비'로 많이 알려져 있다.
충주 고구려비의 가까운 인근에는 국보 제6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 위치하고 있다.

2. 내역


크기는 높이 203cm, 전면 폭 55cm, 좌측면 폭 33cm이며 1행 23자꼴로 528자가 새겨졌다. 상당히 마모가 심해 해석이 아주 어려웠다.
확실한 건립연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래 전문에서 보듯 비문이 대뜸 '5월'부터 시작하기 때문. 12월 23일이 갑인인 것과 좌측면에 신유년이라고[2] 나온 것을 보고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좌우간에 480[3]~481[4]년경으로 추정된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중원고구려비 개관

2.1. 397년설 제기


기사
2019년 동북아역사재단과 고대사학회가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하여 최첨단 기술인 3D 스캐닝 데이터와 RTI 촬영으로 판독하여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라는 글자를 발견했다. 영락 7년 정유는 서기 397년. 그동안 학계의 정설은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이 된 계기가 399년 백제-왜-가야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가 고구려에 원군을 청하고 이에 광개토대왕이 친정하여 연합군을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한 것으로 생각해 왔는데, 이 비석이 397년에 세워진 것이 맞다면 이미 그 이전부터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 된다.[5] 발견의 내용이 사실로 인정 받으면, 고구려의 모든 對남방관계사를 다시 써야 할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지도와 고려라는 국호를 장수왕 때 바꾸었다는 통념까지 모조리 바꿔야 할 역사적 발견이다. 그야말로 고구려사와 삼국시대를 다시 써야 할 금석학적 사건이다. 광개토대왕 때 고려로 국호를 변경했다고 주장한 조경철 선생의 페이스북
다만, 학계에서는 제액 글자배열이 뜬금없이 가로로 작성된점과 마멸도가 심한점 등으로 ‘7년’ 두 글자만 인정되었고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었다.

3. 빨래판으로 쓰였다는 루머


많이 훼손되기도 해서 이 비석을 빨래판으로 썼었다는 말이 있으나 거짓이다. 한때 대장간 기둥으로 쓰인 적은 있었다고 한다. 그 뒤로는 마을 사람들이 '마을을 지켜주는 신령한 돌'이라고 믿고 꾸준히 세우며 보존했다고 한다. 중원 고구려비가 출토된 중앙탑면 부근을 입석마을이라 부른다. 처음 발견 당시 마을 입구에 수호비처럼 세워져 있었고 동네 대장간이나 빨래터에 있었다는 얘기는 그냥 구전으로 내려온 이야기라고 한다. 굳이 빨래판으로 쓰지 않아도 1500년 이상의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겪었다면 충분히 훼손될 수 있다.
진짜로 빨래판으로 쓰였다고 하는 건 국내성 인근의 지안고구려비가 그러하다고 전해지는데, 이 역시도 일종의 왜곡일 수 있다. 현대에 발견된 고대 비석을 두고 으레 빨래판으로 쓰였다는 설명이 붙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귀중한 비석의 가치도 모르고 무식한 민중들이 빨래판 따위로 쓰면서 비문을 훼손했다는 식의 자극적인 시선 끌기를 위한 목적일 가능성이 높다. 충주 고구려비 이외에도 빨래판으로 사용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던 경주 문무왕릉비 역시 그 내막은 전혀 다르다.

4. 전문


'''우측면(제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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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衆殘□□□□□□□□□不□□使□□
□壬子□□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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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제3면)'''
五月中高麗太王[6][7]相王公□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
上下相和守天東來之寐錦忌太子共前部大使者多亐桓
奴主簿道德□□□安□□去□□到至跪營□太子共□
尙□上共看節賜太翟𨛃□食□□賜寐錦之衣服建立處
用者賜之隨者節□□奴客人□敎諸位賜上下衣服敎東
夷寐錦遝還來節敎賜寐錦土內諸衆人□□□□王國土
大位諸位上下衣服兼受敎跪營之十二月廿三日甲寅東
夷寐錦上下至于伐城敎來前部大使者多亐桓奴主簿□
□□□境□募人三百新羅土內幢主下部拔位使者補奴
□□奴□□□□盖盧共□募人新羅土內衆人拜動□□
5월에 고려태왕(高麗太王)의 상왕공(相王公)과 …… 신라 매금(寐錦)[8]은 세세(世世)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화목하고 천도를 지키기(守天) 위해 동으로 (왔다). 매금(寐錦) 기(忌)[9], 태자(太子) 공(共)[10], 전부(前部)의 대사자(大使者) 다혜환노(多兮桓奴)
주부(主簿) 도덕(道德) 등이 ……로 가서 궤영(跪營)에 이르렀다. 태자 공(太子 共)……
尙 …… 上共看 명령하여 태적추(太翟鄒)를 내리고 …… 매금(寐錦)의 의복(衣服)을 내리고 건립처(建立處)
용자사지(用者賜之) 수자(隨者) …… . 노객인(奴客人) …… 제위(諸位)에게 교(敎)를 내리고 여러 사람에게 의복을 주는 교(敎)를 내렸다. 동이매금이
늦게 돌아와 매금(이 다스리는) 땅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절교사(節敎賜)를 내렸다. (태자 共이) 고구려 국토 내의
대위(大位), 제위(諸位) 상,하에게 의복과 수교(受敎)를 궤영에서 내렸다. 12월 23일 갑인에
동이 매금의 사람들이 우벌성(于伐城)에 와서 교(敎)를 내렸다. 전부(前部)의 대사자 다혜환노와 주부 도덕이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 신라토내당주 하부(下部) 발위사자(拔位使者) 귀도(貴道)
…… 와 개로(盖盧)[11]가 함께 신라 영토 내의 여러 사람을 모아서 움직였다. 해독
'''좌측면(제4면)'''
□□□中□□□□城不□□村舍□□□□□□□沙□
□□□□□□□□班功□□□□□□□□節人□□□
□□□□□□辛酉年□□□十□□□□□太王國土□
□□□□□□□□□□□□□□□□□□□□□□□
□□□□□□□□□上有□□酉□□□□東夷寐錦土
□□□□□□方□桓□沙□斯色□□古𨛃加共軍至于
伐城□□□古牟婁城守事下部大兄耶□
…… 中 …… 城不 …… 村舍 …… 沙
…… 班功 …… 節人 ……
신유년(辛酉年) …… 十 …… 태왕국토(太王國土) ……
(행 전체 마모)
上有 …… 酉 …… 동이 매금의 영토
…… 方 …… 桓□沙□斯色 …… 고추가(古鄒加) 공(共)의 군대가 우벌성(于伐城)
에 이르렀다. ……고모루성수사(古牟婁城守事) 하부(下部) 대형(大兄) 야□(耶□)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판독자에 따라서 각 글자에 대한 견해가 분분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이트로 들어가면 각 글자마다 주석을 확인할 수 있다. 뒷면(제1면)에는 글자가 없는데, 글자가 있었다가 없어졌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없었는지도 의견이 나뉜다. 일단은 뒷면에도 글자가 있는 4면비였다는 주장이 더 우세한 듯하다.
당대에 이미 고구려는 자국을 '고려(高麗)'라고 불렀는데,[12],이 비문에 나오는 고려태왕이라는 표현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해당 비석에서는 신라의 정치 지도자인 눌지 마립간을 동이 매금이라고 칭한 것을 일방적인 비하나 이민족 취급으로 해석하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무리한 해석이다. 물론 동이라는 명칭이 사전적으로는 오랑캐에 가까운 표현이긴 하다.[13] 당시 고구려 세계관에서 고구려를 중화로 보고 신라를 중화 주변인인 동이의 위치로 보는 것은 맞다. 그러나 매금은 마립간을 일컫는 단어인데 비하어가 된다는 건 대단히 무리한 독법이다.[14] 게다가 광개토대왕비에서 고구려왕에게 평양까지 가서 조공하는 고구려왕의 신하 신라 마립간이, 여기서는 제3의 장소에서 만나 친목을 다지는 형제로 설정되어 있다. 때문에 해당 단어가 일방적인 비하 표현이라고 보긴 매우 어렵다.
가까운 시대의 또다른 고구려비인 광개토대왕릉비와 비교하면, 그 때는 신라를 '속민'이라 주장한 반면 여기서는 형제관계로 설정했다. 또한 신라토, 신라매금토라는, 신라 마립간의 독자적 위상과 신라의 영토권을 인정하는 쪽으로 관계 변화가 나타난다. 이 단계의 신라는 꽤 국력이 성장한 단계로, 물론 고구려와 대등한 수준까지는 아니고 우위에 있었다고는 하나 가야 소국들마냥 완전히 무시할만한 약소국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아직 백제를 완전히 꺾지 못한 상황이었고 캐스팅보트인 신라의 위상을 부분적으로라도 인정하고 어떻게든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신라를 자기네들의 천하에 묶어두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라토'를 강조한 건, 엄연히 신라 땅인 봉화-영주 일대가 거의 반세기가 되어가는 오랜 고구려군의 주둔기간 동안 신라의 주권 행사가 상당히 제약되어 이에 고조되어 가던 신라의 불만을 반영해 다독인 것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한편 정통 중국식 한문체에 가까운 광개토대왕릉비에 비해, 이 비석에서는 신라 지역에서 더 활발히 쓰인 이두가 많이 쓰여서 이 비석이 신라인을 주 독자로 감안하고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5. 참고 문헌




[1] 옛 충주군으로, 신라 때 '중원경'에서 유래한 지명이다.[2] 이쪽은 오독의 가능성도 있다는 듯.[3] 12월 23일의 일간지가 갑인일임.[4] 신유년임.[5] 사실 삼국사기 391년에 이미 신라의 왕족인 실성 이사금을 고구려에게 볼모로 보냈으므로 그 이전부터 종속관계에 놓였음은 알수 있다.[6] 원래는 대왕, 태왕 판독이 엇갈렸다. 2000년 2월에 있었던 중원 고구려비 신석문 국제 워크샵에서는 정밀조사를 통해 태왕으로 판독하였고,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에도 태왕으로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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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019년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대사학회의 공동판독안에서는 여호규 교수가 ‘丶’획 부분이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으니 크랙으로 보아야 한다며 大 판독을 제시하기도 했다.[8] 장수왕 이후, 5세기 건립이 맞다는 가정 하에 이 시기 신라의 국왕을 보면 눌지 마립간(417년~458년), 자비 마립간(458년~479년), 소지 마립간(479년~500년) 중 한 명으로 압축할 수 있다.[9] 이 부분은 해석이 분분한데, 동사로 볼경우 매금이 고려와의 회맹을 "꺼리다."로 해석할 수 있으며, 명사로 볼 경우 매금의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학계에서도 분분하기에 정확히 어떤 의미로 기록된 것인지는 정확히 집어내기 힘들다.[10] 일반적으로 당시 장수왕의 태자인 고조다로 본다.[11] 이를 개로왕으로 해석하는 관점도 있다. 그러나 광개토왕비에서 백제왕을 잔주(殘主)로 비하시켜 표현하거나 중원고구려비 내에서 ‘동이매금토(東夷寐錦土)’ 등 신라를 낮추려는 서술태도를 감안할 때 백제왕명을 그대로 썼을 지의문이다. 게다가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원고구려비에서 백제 개로왕의 출현은 어색하며, 개로왕 재위기 고구려와 신라가 비문에서처럼 형제관계를 천명할만큼 우호적이지 못하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김창호는 개로 앞 부분의 생략된 ▨▨▨▨ 부분이 부명, 관등명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개로는 개로왕이 아닌 고구려 관리로서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의 인명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여겨진다. 무엇보다 개로 자체가 꽤 흔한 이름이다.[12] 장수왕 때(413~491) 국호를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꿨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중국 사서에서도 장수왕 재위 시기를 기점으로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뀐다.[13] 사실 이 단어는 같은 민족끼리 쓰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일본의 간사이 지방이 간토 지방을 부를 때 동이라고 한자를 쓰고 아즈마에비스로 읽었던 사례가 있다.[14] 신라의 유적에서 신라 자신이 스스로를 매금으로 칭하는 모습이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