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치정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임치정은 1880년 9월 26일 평안남도 용강군 신남면 홍문동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임국로(林國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스무 살이 되던 1900년까지 약 7~8년간 한학을 수학했고, 1903년 하와이 노동 이민에 자원해 아내를 한국에 남겨두고 혼자 미국으로 갔다. 그는 하와이 호놀룰루 사탕농장의 노동자로서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1903년 8월 7일, 임치정은 홍승하, 윤병구, 안정수, 이교담, 박윤섭, 문홍석, 임형주, 김정국 등 기독교 감리회 출신 인사와 유학생들과 함께 신민회를 창설했다. 그는 신민회를 창설한 뒤 동족 단결, 국정 쇄신을 강령으로 삼고 홍승하를 회장으로 선임했다. 그리고 1903년 12ㅈ월 2일에는 하와이 카우아이와 카파 지방에 지회를 설치했다. 그러나 하와이 성공회 계열의 김익성, 최윤백 등이 '신민'이란 명칭과 '국정쇄신'이란 강령은 대한제국 정부를 전복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며 신민회를 반역자들의 소굴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신민회는 정파간 갈등에 휩싸인 끝에 1904년 4월 20일에 해체되었다.
2.2. 미국에서의 민족운동
임치정은 1904년 미국 본토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소학교를 재학했고, 안창호 등이 결성한 친목회에 가입했으며, 샌프란시스코에 노동주선소와 야학을 설치해 하와이에서 건너오는 한인들의 취업을 돕고 의식개혁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한인 사화의 생활 개선 운동과 한인 지역사회 구현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1905년 4월, 일제는 한인의 하와이 이민을 금지시켰다. 이에 임치정은 안창호 등과 함께 재미한인들을 통제하려 드는 일제에 대응하기 위한 조직 설립을 논의했다. 1905년 4월 5일, 임치정은 안창호, 송석준, 임준기, 이강, 방화중 등 49인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항일운동과 동족 지원을 목적으로 공립협회를 설립했다.
임치정은 이후에도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서기와 학회 제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학생들의 계몽 및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1905년 11월 고종의 특사 호머 헐버트트가 공립협회를 방문해 을사조약 강제체결을 막는 데 도와줄 것을 부탁하자, 임치정과 안창호 등은 공립협회의 노선을 민족운동으로 전환하고 대한제국의 영사관을 대신할 자치기관 서립과 국권회복 방안을 궁리했다. 그들은 공립협회 총본부인 공립관을 설치하고 기관지 <공립신보>를 창간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으며, 샌프란시스코, 리버사이드, 래드랜드, 로스엔젤레스 등 미국 태평양 연안 일대에 지회를 세웠다.
임치정은 <공립신보> 간행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한편 <공립신보>사 회계로 근무하면서 열악한 재정을 충단했다. 또한 1906년에 공립협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산하 학생회 특별찬성원으로 선임되어 학생들의 민족정신을 고양시켰고, 프란시스코지방회 부회장 겸 임시사법, 공립협회 본부인 공립관 사무는 물론 <공립신보>사 사무까지 맡는 등 여러 직임을 역임하면서 공립협회가 자리를 잡는데 기여했다.
1906년 6월 고종이 샌프란시스코 지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샌프란시스코에게 구휼금을 보냈을 때, 일본 영사는 이 구휼금을 분급하는 것에 대해 간섭했다. 이에 임치정 등 공립협회 임원진은 일본영사의 간섭행위에 대해 통고문을 발표했고, 일본 영사는 구휼금을 중도에서 가로막는 것에 분개한 시민들의 여론을 읽고 한인 사회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이 사건으로 공립협회는 미국의 묵인 하에 미국 내 한인 자치기관과 대표적 외교기관으로 자리잡았다.
2.3. 대한신민회
1907년 1월, 안창호, 이강, 임준기, 신달윤, 박영순, 이재수 등은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신민회'를 설립했다. 대한신민회는 캘리포니아주 감독장에 안창호를 선정했고, 한국 감독장에 양기탁, 임치정, 이동휘, 이갑 등을 선정했다. 대한신민회는 국내와 해외에 산재한 한인 단체들을 공립협회를 중심으로 통합시켜 국내외 각 지역에 연합기관을 설치하고 이를 통해 국권 회복과 '공화정체의 독립국'을 건설하려 했다.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 직후 고종이 강제 퇴위당했고, 이어 정미 7조약 강제 체결로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당하자 조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에 임치정 등 공립협회 임원들은 이를 호기로 여기고 공립협회의 중진들을 잇따라 파견해 신민회 결성과 매국노 처단 임무를 맡겼다. 이후 임치정은 1907년 겨울 조선으로 들어와 대한매일신보사 부총무 겸 회계주임을 맡았다. 이후 그는 전덕기, 양기탁, 이동녕, 조성환,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를 창립했고, 1908년 1월 서우학회에 가입했으며, 그해 3월에는 서북학회에 가입했다.
임치정은 독립전쟁을 벌이기에는 힘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고 해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는 문제를 여러 인사들과 논의했다. 그리고 1909년 여름부터는 안창호, 이승훈, 안태국 등과 함께 일제에 빌붙은 인사들을 처단하는 일을 후원했다. 그러던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1909년 11월 동아찬영회와 대한상무조합 등에서 이토 히로부미 추모회 및 송덕비 건립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임치정은 양기탁과 함께 이를 비판했고, 공립협회 시절부터 익히 알고 지낸 이재명에게 이완용 등을 처단하게 했다. 이재명은 1909년 12월 23일 벨기에 국왕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명동 천주교당에서 나오던 이완용을 암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이 사건으로 이재명은 사형에 처해졌지만, 임치정은 이교담, 안태국, 송종원 등 신민회원 13명과 함께 불기소되었다.
2.4. 105인 사건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임치정은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안태국, 옥관빈 등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해외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 양성에 필요한 독립군 창설을 위해 서간도로 근거지를 옮기는 문제를 논의했다. 신민회 간부회의는 4차에 걸쳐 열렸는데, 그는 이 네 차례 회의 모두 전국 간부로서 참여했으며, 이 중 3차례 회의는 그의 집에서 열렸다. 그러나 일제는 이 움직임을 눈치채고 그와 양기탁 등을 체포했고, 임치정은 1911년 7월 22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가 1년 후인 1912년 9월 27일 대사령(大赦令)으로 출감했다.
그러나 출감 다음날인 1912년 9월 28일, 임치정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재수감되었고, 재판에 다시 회부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유동열 등 6명과 함께 보안법위반과 데라우치 총독 모살 미수죄로 최고형은 징역 10년을 언도받았다. 이에 그를 비롯한 신민회원들이 불복하여 항소했고, 공판은 총 51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 결과 일제는 1913년 3월 20일 재판에 회부된 105명 중 99명에 대해 무죄를 언도하면서도 임치정 등 신민회 최고 간부 6명에게는 징역 6년을 언도했다.
임치정 등 6인은 이에 불복하여 고등법원에 상고했고, 1913년 5월 24일 경성고등법원은 상고 최종공판에서 유죄 부분을 파기하고 사건을 대구복심법원으로 이송했다. 다시 대구복심법원으로 호송된 임치정 등 6인은 동년 7월 15일 다시 징역 6년을 언도받고 재차 불복하여 고등법원에 다시 상고했지만 그해 10월 9일 상고가 기각되어 형에 확정되었다. 이후 그는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일본 소헌황태후(昭憲皇太后) 대상(大喪)으로 출감했다.
2.5. 이후의 경력
임치정은 출감 후 1919년 2월 중순 경 이승훈의 지시에 따라 노윤길 등과 함께 거사를 준비했고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점으로 진남포에서 3.1 운동이 벌어지도록 유도했다. 그는 시위 전면에 나서지 않았지만 후방에서 후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그는 1920년 1월 1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평남 독판 이덕환 산하 진남포 참사로 임명되어 진남포 부장 김지간과 함께 활동했지만, 1920년 5월 평북 독판 안병찬이 일제에 체포된 이래 평안도 전 조직이 일제의 검거 선풍으로 인해 붕괴되자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1925년 4월, 이범세 등 10여 명이 <시대일보> 재단을 구성하여 사장에 홍명희, 부사장에 이관용, 편집국장에 한기악을 임명했다. 이때 임치정은 <시대일보>진남포지국을 설치하고 고문으로 추대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시대일보>사가 고질적인 재정난으로 자주 정간되는 등 경영난에 처하며 1926년 8월 중순부터 신문 발행을 중단하자, 그 역시 언론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그는 거듭된 실패에 좌절해 매일 술을 마시며 근근히 살아가다가 1932년 1월 9일 오후 6시 경성부 서대문 자택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 향년 52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임치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