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구(독립운동가)

 


1. 미주 방면 독립운동가, 윤병구
1.1. 초년기
1.2. 미국 정부에게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다
1.4. 미주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1.5. 최후
2. 만주 방면 독립운동가, 윤병구


1. 미주 방면 독립운동가, 윤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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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윤병구(尹炳球)
이명
우병길
생몰
1878년/1880년 ~ 1949년 6월 20일
출생지
서울특별시 또는 경기도 양주시
사망지
서울특별시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1. 초년기


윤병구의 출생지와 출생연도는 확실하지 않다. 출생지는 서울이나 경기도 양주로 알려져 있고, 출생연도는 1877년 또는 1880년으로 알려졌다. 그는 1905년경까지 우병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고, 한성사범학교를 다녔으며, 당시 교사 호머 헐버트와의 만남을 계기로 하와이로 이주했다. 당시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고 하니 이 또한 하와이 이주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윤병구는 하와이에 도착한 직후 호놀룰루 미국 감리교의 피어슨 감리사와 협력하여 하와이 군도에 산재하고 있는 한인 동포를 대상으로 한 전도활동에 전념했다.
1903년 8월 7일, 윤병구는 하와이 최초의 정치단체인 신민회에 가담해 중심 인물로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05년 4월 신민회가 해산되자 정원명, 강영소, 김성권, 이만춘, 김규섭 등과 함께 그해 5월 3일 에와친목회를 결성했다. 설립목적은 항일운동을 위한 일본 화폐 배척과 동족간의 친목과 권익 보호였으며, 1906년 5월 1일부터 <친목회보>를 발간했다.

1.2. 미국 정부에게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다


1905년 8월 포츠머스에서 러일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러일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한 하와이 한인사회는 한인 대표를 파견할 계획을 세우고 윤병구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때마침 미국 국방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영애인 앨리스와 함께 일본으로 가던 중 호놀룰루에 들리자, 윤병구는 한인대표의 자격으로 그와의 만남을 시도했다. 그 결과 미국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소개장을 얻게 된 그는 1905년 7월 12일 '하와이 거주 한인들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드리는 청원서'를 작성했다. 청원서의 내용은 러일강화회의 때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달라는 것이었다.
1905년 7월 15일, 한인사회는 에와 사탕수수 농장에서 임시공동회를 개최하고 윤병구를 하와이 한인대표 공식 총대로 선출해 전권을 위임했다. 한인들은 그의 여행 경비를 위해 500달러를 모금했고, 윤병구는 이를 가지고 가서 당시 조지 워싱턴대학교의 입학을 위해 준비 중이던 이승만에게 타전해 외교활동의 참여를 부탁한 뒤 7월 19일 알라메다호를 타고 하와이를 떠나 미국 동부로 향했다. 7월 31일 워싱턴 D.C에 도착한 그는 이승만을 만났고, 두 사람은 다시 필라델피아에 있는 서재필을 찾아가 청원서의 문장을 다듬고 거사진행의 방안을 상의했다.
8월 4일, 윤병구와 이승만은 뉴욕 롱아일랜드의 오이스터 베이에 있는 새거모어 힐을 찾아가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청원서를 직접 제출했다. 루스벨트는 내용을 읽어본 후 "워싱턴에 있는 한국 공관을 통해 국무성에 제출하라."고 말하고는 청원서를 다시 돌려줬다. 당시 루스벨트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하는 걸 묵인하는 대가로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인정받았다. 이 때문에 그는 한국의 독립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두 사람에게 한 말은 그저 외교적 화술일 뿐 사실상 거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걸 알리 없는 이승만과 윤병구는 주미 한국 공사를 통해 국무성에 청원서를 제출한다면 미국으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을 거라고 오판하고 워싱턴의 주미대리공사 김윤정을 찾아가 청원서를 제출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김윤정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그를 민족반역자로 몰아붙이면서 어떻게든 청원서를 제출하라고 강요하다시피 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1.3. 헤이그 특사


독립 청원이 실패로 돌아간 뒤 실의에 빠져 있던 윤병구는 1907년 6월 고종으로부터 밀명을 받은 이상설, 이위종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에 도착하자, 당시 로아녹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송헌주와 함께 그들에 가담했다. 이후 9월 3일 헤이그에 도착한 윤병구는 국제기자협회를 상대로 일본의 침략 야욕과 한국민을 착취 및 탄압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그는 일본이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국의 독립과 개혁을 보장한다고 약속했으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오히려 한국민을 상대로 무지한 강탈이 시작되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윤병구는 런던에 가서 영국의 주요 사회단체들을 상대로 선전활동을 전개했고, 그의 활동상은 영국의 유력 신문에 보도되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전해졌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하던 <해조신문>은 1908년 3월 19일자와 20일자에 윤병구의 연설 내용과 활동상을 자세히 소개하며 그의 활동을 높이 평가했다. 윤병구는 이상설, 이위종, 송헌주와 함께 장기간의 유럽 순방외교를 마친 뒤 1908년 3월 초 뉴욕에 돌아왔다.

1.4. 미주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1908년 7월 9일, 윤병구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박용만이 북미 대한인애국 동지대표회를 조직하는 것에 호응해 뉴욕에 있던 김헌식과 함께 덴버로가서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회에 참석했다.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회는 7월 11일부터 15일까지 박용만, 이관수, 이승만, 윤병구 등 36명의 한인들이 참석해 개최되었다. 대회 운영은 회장 이승만, 국문서기 박용만, 영문서기에 윤병구가 맡았다. 윤병구는 개회식에서 "동양에 대한 미국"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발표했다. 그 후 윤병구는 덴버를 거쳐 1909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그해 12월부터 상항한인감리교회의 목회를 담당했다.
1912년, 윤병구는 11월 8일부터 20일까지 개최된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 제1회 대표원 의회에 박상하와 함께 하와이지방총회를 대표해 참석해 제2대 중앙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서의 그의 활동은 그리 원활하지 못했다. 당시 중앙총회가 독자적으로 외교사무를 추진할 예산이나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신에 각 지방을 순방하며 한인들에게 독립정신을 일깨우려 노력했다.
1914년 1월 농업상의 손실을 입어 먼 곳으로 이사갈 수밖에 없게 된 윤병구는 그해 3월 중앙총회장을 사임한 뒤 워싱턴주의 섬너와 위니치 등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는 위니치에서 한인교육회를 설립해 한인 청년들의 학업증진을 후원했다. 그렇게 몇년 간 학생들을 가르치던 윤병구는 1919년 3.1 운동 소식을 접하자 다시 대외활동에 나섰다. 그는 안창호로부터 교섭위원으로 선임된 뒤 3월 15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각 도시를 순회하며 한인들을 독립운동에 포섭시키는 역할을 맡았고, 안창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석하기 위해 상하이로 떠난 뒤 공석이 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중앙총회가 뭘 하기에는 예싼이 빠듯했기에, 그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다.
1921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을 사임한 윤병구는 미주 지역에서 목회 활동을 벌였다. 그는 1923년부터 1925년까지 리들리한인교회 목사로 재임했고, 1927년부터 1930년까지 뉴욕한인교회 담임 목사로 재임했다. 그러던 1941년 12월 9일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단행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윤병구는 자신의 아들이 1942년 미국 해군에 입대하고 한인 청년들의 미군 입대가 급속도로 늘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독립운동에 가담하기로 결심하고 1943년 1월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족출정군인친족회를 결성해 미군에 입대한 한인 청년들을 후원하고 그들 가운데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이들과 그 가족들을 후원했다. 또한 그는 영문잡지를 매월 손수 편집, 제작하여 미국의 정치, 종교, 지식계층에 배포해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널리 알렸고 한인 2세 청년들에게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이용했다.
1945년 4월 25일, 전후 처리 문제를 놓고 50여 국가 대표들이 참가한 샌프란시스코회의가 개최되었다. 주미외교위원장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훈련에 따라 7명의 임시정부 대표단을 조직했는데, 윤병구는 그 중 교제부장과 재정검사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마침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스스로 해외한족대표단을 조직했다. 졸지에 한인 대표가 둘로 나뉘게 되자, 두 대표단은 합동을 추진했지만 이승만이 반소, 반공 활동을 노골적으로 벌이는 바람에 임시정부가 소련의 불신을 사는 등의 문제로 결국 실패했고 두 대표단 모두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이렇다할 활동을 하지 못했다. 이때 윤병구는 이승만을 변호하며 한인들끼리 비방하는 것은 민족의 수치이며 향후 우리 민족끼리 통일을 이루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1.5. 최후


1949년 3월 14일, 윤병구는 조국을 떠난 지 46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귀국 후 종군목사로서 조용히 활동하기를 바랬지만, 자신을 옹호해준 그를 고맙게 여기던 이승만은 그를 외무부와 공보부의 고문으로 임명했다. 이승만은 그에게 미국, 멕시코, 쿠바 등지의 해외 한인들을 격려하고 중남미의 각국을 비롯해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한 유엔 소속 48개 우방국들을 방문해 감사 인사를 드리라고 부탁했다. 윤병구는 이를 수행하면서 한, 미 간에 새로운 협약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별도로 한미협약의 초안을 작성했다.
그러나 한미협약 초안 작성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건강을 해친 윤병구는 6월 20일 아침 갑자기 쓰러진 뒤 그 날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는 1949년 6월 24일 새문안교회에서 대한민국정부의 주도로 치러졌고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윤병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 만주 방면 독립운동가, 윤병구



성명
윤병구(尹炳球)
생몰
1889년 12월 10일 ~ 1929년 12월 23일
출생지
충청남도 청양군
사망지
서대문 형무소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윤병구는 1889년 12월 10일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일병합 후 중국으로 건너갔고 의열단에 가입한 뒤 1922년 총독 및 일제 고관을 처단하고 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경찰서 등을 폭파하기 윟나 군자금 모집을 유석현, 김지섭 등과 협의했다. 1922년 12월 23일, 그는 김지섭, 유석현과 함께 서울 무교동에 사는 총독부 판사 백윤화(白允和)를 방문하여 군자금 5만원을 요구하였다가 2천원의 자금을 약속받았다.
그 후 12월 25일 유석현과 같이 약속된 군자금 수령을 위해 백윤화의 집을 찾아갔다가 백윤화의 신고로 미리 잠복해 있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 후 그는 중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9년 12월 23일에 옥사했다. 향년 40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윤병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