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헌정우회

 

'''立憲政友会(りっけんせいゆうかい)'''
Rikken Seiyūkai, Constitutional Association of Political Friendship
일본 제국자유보수주의 포지션을 담당했던 정당.
당대 기준으로 중도우파~우익성향을 띄었다. 제국의회가 기능한 이후 본격적으로 역할을 수행했던 주요 정당으로, 후일에는 리버럴 성향의 입헌민정당과 함께 경쟁하였다.
1900년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창당되었고, 다수의 총리를 배출하여 제국주의 일본의 근대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정당이지만, '당'이 아닌 정우회라는 명칭으로 조직된 점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메이지 유신 당시 우두머리들의 번벌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1].
이후 하라 타카시 등의 지도 하에 메이지 시대 말기의 헌정운동을 주도하며 급속도로 세력을 얻었으며 11대 총선에서 다수당의 지위를 차지하면서 원로들의 아성을 위협하는 권력을 얻었다. 강력한 반원로 운동을 전개하며 정당에 호의적인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와 연합하였고, 다이쇼 정변으로 2차 사이온지 내각을 무너뜨린 야마가타 아리토모에 맞서 3차 가쓰라 다로 내각을 무너뜨렸다.[2] 이후 출범한 1차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과 연합하여 반원로 정책을 전개했으나 지멘스 사건으로 야마모토 내각이 궁지에 몰리자, 다수당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당내각을 조직할 수 있다고 여겨 야마모토 내각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하지만 정우회에게 권력을 넘겨줄 수 없다고 여긴 원로들은 오쿠마 시게노부와 입헌동지회에게 권력을 맡김으로 2차 오쿠마 내각이 조직되었다. 대중적인 인기가 높았던 오쿠마는 1915년 12대 총선에서 정우회를 완패시키고 다수당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성공하고 정우회의 세력은 크게 축소된다.
하지만 오쿠마 내각과 야마가타의 관계가 크게 악화되면서 야마가타와 하라 다카시의 연합이 이루어졌고, 하라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을 지지하였다. 1918년 쌀폭동으로 데라우치 내각이 붕괴되자 야마가타는 정당내각의 조직에 동의하였고, 하라가 최초로 평민 출신으로 총리가 되어 정우회가 마침내 정당내각을 조직한다. 하라는 혼란한 정국을 잘 수습하였으며, 과격한 노동운동도 단호히 진압하여 야마가타로부터 '하라는 정말 대단하다'라는 찬탄을 듣기도 하였으나 1921년에 암살당한다. 그 뒤를 이어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정우회 내각을 이어나갔으나 그도 곧 사퇴한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엔 리버럴, 금본위 성향의 입헌민정당과 정권을 여러 차례 교대하였으나 의석이 비슷한 경우가 많아 내각이 매우 불안정했다. 특히 1928년 16대 총선에서 정우회가 218석, 민정당이 216석, 기타 32석인 경우 특히 정국의 혼란이 가속화되기도 했다. 육군에게 살해당한 이누카이 츠요시 역시 정우회 출신이다. 1930년 17대 총선에서 174:273으로 처음으로 민정당에게 1당을 크게 내주었으나, 1932년 18대 총선에서는 301:146으로 더 크게 설욕했다. 다시 4년 뒤인 1936년에는 175:205로 다시 민정당에 1당을 내주며 부진했으나, 불과 1년만인 1937년 20대에 175:179로 2당이었으나 민정당을 크게 따라 잡았다. 다만 이미 이누카이 츠요시 살해 이후로는 정국이 정당 의석수에 따라 돌아가지도 않아서...
1940년 7월 16일과 30일을 기해 당내 양대 파벌이 해체되고, 다른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해산과 함께 대정익찬회로 흡수되면서[3] 그 생명력을 다하지만 내부 인사들은 전후에도 꾸준히 활동하면서 계보로는 현 자유민주당까지 이어진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1]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재야 정치단체들은 오히려 헌정당(憲政党), 제국당(帝国党), 진보당, 헌정본당 등 조직명을 정당으로 명기하고 있었다. 실제로 1890년대 일본 주요 정당들의 명칭도 입헌자유당, 입헌개진당 등이었다.[2] 가쓰라는 정우회와 협상하려 했지만, 여의치않자 독자 정당인 입헌동지회를 조직한다. 입헌동지회는 독자정당치고는 1920년대 초까지 오랫동안 정우회를 상호 적극 견제하며 1,2당을 나눠먹었다.[3] 물론 주도권은 일본군부가 쥐었고 거의 흡수되어 짜지다시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