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하시 고레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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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일본 내각총리대신 및 재무 관료. 과거 50엔권에도 등장했었다.
'''인생의 고락이 극명하게 갈렸던 사람'''으로, 2.26 사건에서 피습을 당해 사망했다.
2. 생애
도쿄도 출생. 1854년 에도 막부에 고용된 어용 화가 가와무라 쇼에몬이 유모 기타하라 긴 사이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부가 평소 알고 지내던 센다이의 하급무사 다카하시에게 양자로 보내져 그곳에서 자랐다. 두 살 때 자칫하면 과자가게의 양자로 다시 보내질 뻔 하였다가, 조모가 무사 집안에서 키워야 한다고 반대하여 다카하시 가에서 계속 길러졌다.
나이를 먹은 후 수창사라는 절에서 일을 했으며 영특함을 인정받아 요코하마에서 영어를 공부하게 되었다. 열세 살때, 센다이번 청년들과 함께 포경선 선원이 되기 위해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떠났으나 가혹한 대우와 노동 강요에 반발하여 충돌을 빚게 되었다. 이에 다카하시를 맡아주었던 무기상 밴리드는 다카하시를 '''오클랜드의 부잣집에 3년 계약직 노예로 팔아버렸다.''' 부잣집에서 영어를 배울 거란 말만 듣고 오클랜드로 간 다카하시는 그곳에서도 노동을 강요당하는 수모에 자신이 노예로 팔려왔다는 걸 알게 되고 1868년 12월, 일본 영사관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일본에 귀국했다.
귀국 후 모리 아리노리 초대 문부대신의 식객이 되었으며 대학남교 학생들에게 250냥을 빌려주었다가 그 보답으로 기생집에서 접대받은 일을 계기로 방탕한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이후 영어교사로 일했으나 폐번치현으로 영어학교 경영이 어려워져 도쿄로 상경, 1872년 대장성(大藏省)의 임시직으로 채용되었다. 이때부터 대장성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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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성 시절.
그러나 대장성 임시직 이후에도 영어학교 교사, 우유사업, 상표등록소 소장, 광산 투자가 등 여러가지 일에 손을 댔으나, 금방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그만두기 일쑤였다. 이처럼 그는 젊은 시절 여러가지 실수와 오판으로 암담한 인생을 살았다. 대장성 외에 문부성과 농상무성에서도 잠시 일을 했었다.
그러다 1893년, 아는 지인의 도움으로 일본은행 서부지점장으로 발탁되면서 인생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고, 1895년 요코하마 정금은행[2] 지점장을 거쳐 1899년에는 일본은행의 부총재까지 승진했고, 1911년에는 일본은행 총재가 되면서 금융인으로써 명성을 쌓았다.
1913년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의 대장대신(한국의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처음 입각했고, 이후 죽을때 까지 하라 다카시, 다나카 기이치, 이누카이 쓰요시, 사이토 마코토, 오카다 게이스케 내각에 '''모두 대장대신으로 입각했다.''' 하라 총리 암살 이후 급거 조직된 자신의 내각에서도 '''총리에 대장대신 겸직'''이었으니, 그는 '''대장대신을 무려 23년간 일곱 번 지낸 셈이 된다.'''
그는 대장대신을 지내면서 (군부 견제 의도도 어느 정도 두고) 군부에 들어가는 국방 예산을 줄이고자 노력했는데, 당시 일본이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 시베리아 출병 등으로 군대에 들어가는 예산이 많아져 부담이 가중되자 다카하시는 이 부분에서 예산을 줄이고 부담을 낮추려고 고생 아닌 고생을 했다. 이 과정에서 군의 지속적인 정책간섭과 내각결정개입에 불만을 품고, 하라 총리에게 참모본부 폐지 등 일련의 군 개혁을 건의했으나, 다나카 기이치 당시 육군대신과 원로로서 정치에 깊숙히 관여하던 동시에 육군의 아버지로 존경받던 야마가타 아리토모 전 총리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19년, 금해금 조치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자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 시절부터 논의되고 있던 중일경제대동맹 구상을 위한 자금이 필요하단 이유로 반대했다.
1921년, 하라 다카시 총리가 도쿄역에서 암살당하자, 정우회 내의 추대와 원로 귀족들의 추천으로 다카하시가 후임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7개월의 짧은 임기를 수행했고, 군부의 세력 확대를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다나카 기이치의 후임이었던 야마나시 한조 전 조선총독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당내 분열로 물러난 그는 이후 발상을 바꿔서, 요코다 센노스케와 함께 다나카를 정우회의 총재로 초빙하는 공작을 펼쳐서 결국 이를 성사시키고, 다나카가 총리가 되자 다카하시는 자연스럽게 다시 대장상이 되어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에서 발생한 이른바 쇼와 금융공황을 멈추는 데 성공했으며, 만주사변 이후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에서 재차 대장대신이 되어 팽창재정을 펼쳐 일본을 대공황에서 제일 먼저 탈출시켰다. 그러나 대공황도 막아낸 다카하시는 군부의 폭주를 막을 수는 없었고, 결국 최악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비상시국이 된 내각에서 대장대신으로서 잠시 총리 권한대행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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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말년의 모습.
1936년, 2.26 사건 당시 여전히 대장대신이었던 그를 기습한 육군 황도파에 의해 자신의 집에서 암살당했다. 잠을 자고 있던 도중 그의 집에 침입한 황도파 장교가 "천벌을 받아라" 라고 소리치며 리볼버 권총을 겨누자 그도 "바보 같은 놈"이라고 일갈했고, 당당히 자신에 맞서는 다카하시를 보고 기가 질린 장교가 주저하자 다른 장교가 군도를 들고 덤벼들어 다카하시의 한쪽팔을 자르고 배를 찔러 장기를 헤집어놓는 통에 총에 맞는 것보다 더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사이토 마코토 전 총리도 총을 47발이나 맞고 끔살당했다.
이후 일본은 군부를 압박할 '''재정 전문가'''를 잃어버려 군부의 폭주를 전혀 제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고, 군부의 무차별적인 폭주는 결국 일본을 패전으로 이끌었다.
3. 역사적 위상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세계 경제사적, 일본 정치사적으로 상당히 의미가 큰 인물이다.
먼저 경제사적으로는, 현대까지 정부의 경기부양 대책으로서 양적완화의 다음 단계로 언급되는 헬리콥터 머니를 주요 경제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행했던 사례로서 중요하게 분석된다. 일본은 당시 정부 국채를 중앙은행이 직접 매입하게 함으로서, 이론상 정부 재정을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게 하는 헬리콥터 머니 정책의 거의 유일한 본격적이고 제대로 된 실행사례이다. 실제로 일본은 이 정책을 바탕으로 쇼와 공황을 상당히 안정적으로 넘긴 편이었으며, 나중에 적극적인 통화정책으로 '헬리콥터 벤'이라는 이름까지 얻게 된 연방준비제도 이사장인 벤 버냉키의 칼럼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벤 버냉키는 연준 의장이 되기도 전부터 자신의 칼럼에서 항상 고레키요의 통화정책 사례를 심도있게 다루며 옹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정책의 단점을 극명하게 드러내기도 했는데, 통화량 증가로 급격한 인플레이션(경기부양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이 일어나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런 정책의 최대 난점인 출구전략의 어려움을 드러냈다. 돈을 정부가 맘대로 쓸 수 있게 하는 건 쉽지만, 그 예산을 줄이고자 할 때 정부와 이권 당사자들의 반발을 극복하고 긴축으로 돌아서기는 매우 어렵다. 당시 정부의 예산 확대의 최대 수혜자는 당연히 군이었고, 헬리콥터 머니 출구전략의 어려움은 긴축을 시작하던 다카하시 본인이 암살되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나고 말았다. 이 결과로 인해 일본은행은 경기부양에 알러지적인 반응을 보이게 되었고, 일본은행에서 1982년 발행한 백서에는 다카하시의 국채 직매입을 '100년 역사상 최대의 실수'라고 평가하기도 했다[3] . 일본은행은 이 트라우마 때문에 소극적인 경기부양 및 통화정책으로 일관하다 소위 잃어버린 10년을 자초하기도 했다.
일본사적으로도 의의가 굉장히 크다. 1913년부터 23년간이나 경제 최고 사령탑으로 재직하며 사실상 현대 일본의 경제체제 자체를 디자인한 인물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마지막까지 일본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걸 막는 최후의 브레이크이기도 했다. 항상 민간영역이 무력을 가진 군부에 대해 가지는 가장 큰 무기가 예산인데, 다카하시는 끊임없이 군축을 시도하고 브레이크를 걸고자 노력해서 항상 군부의 눈엣가시 중 하나였다. 아무리 막나가는 일본군이라도 23년이나 대장대신으로 재직하며[4] 현대 일본의 경제성장을 이뤄내고 공황조차 극복해낸 경력을 가진 사람을 군부가 함부로 건드릴 수 는 없었다. 하지만 결국 일본 군부는 그 마지막 브레이크마저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떼어버리고, 최후의 폭주를 저지르고 만다.
4. 기타
별명은 달마 대장대신(...) 별명의 유래는 대머리, 수염이 어우러진 포동포동한 외모가 친근하다는 평이 많았다고 한다. 애주가 라서 그런지 심지어 국회 본회의장에서도 술을 마셨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2.26 당시 나란히 암살당했던 사이토 마코토 전 총리 및 조선총독과 절친이었다.
일본에서 최초로 국채 발행을 시행하였으며, 역대 일본 은행 총재 중에서 유일하게 그가 1951-1958에 사용된 50엔 짜리 지폐에 초상화가 들어간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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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몹시 좋아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