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 다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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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19대 내각총리대신
하라 다카시
原敬 | Hara Takashi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856년 2월 9일
무츠이와테군 모토미야촌
(現 이와테현 모리오카시)
'''사망'''
1921년 11월 4일 (향년 65세)
도쿄부 도쿄시 고지마치구 도쿄역
(現 도쿄도 지요다구 도쿄역)
'''재임기간'''
제19대 내각총리대신
1918년 9월 29일 ~ 1921년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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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학력'''
사법성법학교[3] (중퇴)
'''정당'''

'''지역구'''
이와테 1구
'''의원 선수'''
'''8''' (중)
'''의원 대수'''
7, 8, 9, 10, 11, 12, 13, 14
'''약력'''
우편호치신문 번역기자
주조선국 일본전권공사
중의원 의원
제11·16대 체신대신
제25·27·29대 내무대신
제3대 입헌정우회 총재
제22대 사법대신
제19대 내각총리대신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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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19대 내각총리대신. 일본에서 '''중의원 제1당 대표로서 임명된 최초의 총리이다.''' 전형적인 정치인이자 '''문민''' 총리.
'하라 케이(혹은 게이)', 혹은 '하라 사토시'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실제 국내 일본 지역학 관련 서적을 보면 '하라 케이'로 기재되는 경우가 많다.

2. 생애


난부 번의 하급 무사 가문 출신이었으나, 1875년 20살이 되자 스스로 평민으로 독립했고[1] 죽을 때까지 귀족 작위를 거부해 '''평민 재상'''이라는 별명이 있다. 기자 출신으로, 1896년 주한 공사를 맡기도 했다.
하라 내각은 일본에서 의원내각제가 제대로 기능한 첫 내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의원 내각제에서는 대부분의 각료가 국회 의원이어야 하는데 사실 그 전의 일본은 그렇지 못했다. 그런데 하라 내각에서는 총리인 하라 본인부터 중의원 의원이었고, 그는 법으로 육군 / 해군 인사만이 임명될 수 있는 육군대신, 해군대신과 외무대신을 제외하고 모두 자신의 소속 정당인 입헌정우회 소속 국회 의원을 임명했다.[2]
더불어 전례가 없는 정당 내각으로써 38개월이라는 긴 기간을 총리로 재직했다. 여러 모로 대단하면서도 무서운 양반. 당시 일본은 번벌과 원로들이 차례로 번갈아 총리를 하면서 순번만 바꾸는 정치를 하고 있었는데 그런 사회에서 총리 자리를 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라는 번벌 출신도 아니었고 원로도 아니었으나 야마가타 아리토모사이온지 긴모치 등 내로라하는 원로들을 구워삶으면서 죽을 때까지 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아울러 일제 정치권 최대의 숙제 중 하나였던 문민통제를 일부나마 실현한 최초의 총리였으니, 해군대신이었던 가토 도모사부로가 워싱턴으로 출장을 가면서 임시로 '해군대신 사무관리'라는 직책을 겸임하여 해군성의 사무를 보았다. 이 직책은 후임 총리인 다카하시 고레키요도 물려받아 이런 광경이 나타나기도 했다.
19살 때 처음 쓴 일기를 죽을 때까지 매일 썼다고. 게다가 본인이 '''죽는 순간'''조차 메모 형식으로 일기를 써서 남겼다고 하니, 흠좀무. 그의 일기는 메이지 및 다이쇼 시대의 일본 정계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쓰이고 있다.
식민지 정책에도 이름을 남겼다. 그의 임기 중간에 민족자결주의가 유행하고 조선에서 3.1 운동이 터진 것을 계기로 식민통치 방침을 온건하게 바꾸었는데, 그 일환으로 조선에서 이뤄진 무단통치문화통치로 바꾸고 대만에도 비슷한 정책 전환이 이뤄졌다. 또한 천황 직속이라는 명분으로 식민지에서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조선총독부대만총독부를 내각이 통제하고자 하여, 그때까지 군인만 총독을 할 수 있었던 것을 문민 총독도 가능하게 하고, 대만에는 실제로 문관 총독이 부임했다. 남양장관, 가라후토청장 등 기타 식민지 수장들도 하라 내각에 들어서 정우회 출신들로 대거 물갈이 되었다.
그 밖에, 교통 운수시책의 확충을 내세우며 내각 철도원을 철도성으로 승격하기도 하는 등 철도 부설에 각별히 신경을 쓴 총리이다. 자신의 고향인 이와테현에 철도를 건설하려고 국회에서 논의를 하고 있을 때 한 의원이 "그런 산골에 철도라니, 원숭이라도 태울 셈이요?"라고 하자 하라는 "철도 규칙에는 원숭이를 태워서는 안 된다고 나와 있습니다"라며 위트있게 대처했다고 한다. 그 철도가 현재의 야마다선. 한편 하라는 철도 시설 개선보다 노선 확장을 중시하는 건주개종 원칙을 내세웠기 때문에 고토 신페이 등 개궤론자들의 표준궤 개궤안을 번번히 좌절시키고, 오랜 궤간논쟁의 종지부를 찍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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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대신 시절
총리 재직 중인 1921년 11월 4일에 도쿄역에서 나카오카 곤이치(1903년 ~ 1980년)라는 청년의 칼에 찔려 죽었는데, 정치 스타일에 불만을 품은 군부의 소행이 아니라 극우 범죄 단체의 소행이었다. 조금 황당하게도 '''하찮은 민간인이 천황가의 혼인 문제에 관여했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당시 황태자였던 히로히토결혼 문제를 앞두고,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이 황태자비로 선정된 것에 불만을 가진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배후에서 방해 공작을 펼쳤다. 이것이 발각되어 야마가타가 난처해지자 평소 친분이 있었던 하라가 해명하고 중재를 해준 일이 있었다.
이후 나카오카는 무기 징역을 선고받지만 사건 당시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15년으로 감형되었다가.... 여차저차 해서 1934년에 사면되었다. 이후 이슬람교로 개종했다고. 한편 나가코 여왕은 황태자비로 최종 결정되어 무사히 히로히토 황태자와 결혼했다.
일본 내에서는 다이쇼 시절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이끈 나름대로 일등 공신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군벌들이 판을 치던 서슬퍼런 시절에 나름대로 의회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고 노력했으며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도 찬성하는 등 군부를 억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이 다이쇼 데모크라시도 군벌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버리긴 하지만….
[1] 참고로 독립해서 새로 분가를 만들면 군면제가 되었다. 그래서 군부와 엮일 일이 없었다.[2] 의원 내각제 국가에서도 대부분 국회 의원이 아닌 자를 각료로 임명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 수가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현대 일본에서 각료로 임명할 수 있는 국회 의원이 아닌 자는 총 각료 수의 절반으로 제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