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모 불가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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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볼로냐 FC 역사상 최고의 미드필더'''[2]
'''자코모 불가렐리'''(이탈리아어 : Giacomo Bulgarelli, 1940.10.24~2009.2.12)는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이다. 볼로냐 FC 1909에서 1959년부터 1975년까지 무려 16년 동안 활동했던 원클럽맨이다. 탁월한 위치 선정 능력과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한 볼 배급 능력과 볼 간수 능력이 뛰어난 플레이메이커인 동시에 상대 선수 압박에도 능했던 선수였다. 이탈리아의 명장 파비오 카펠로는 불가렐리를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드필더"라고 묘사한 바 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불가렐리는 1959년에 고향인 볼로냐를 연고로 하는 볼로냐 FC 1909에 입단하면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불가렐리는 1959년부터 1975년까지 무려 16년 동안 이 팀에서 활동했으며 391경기에 출장해 43골을 넣었다. 그가 있는 동안 볼로냐는 중흥기를 맞이하는데 1963-64 시즌에 무려 23년 만의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이 때 불가렐리 역시 우승의 주역 중 하나였다. 선수로서는 황혼기인 35세 때 이탈리아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 코네티컷 바이센테니엘스에 입단했는데 단 2경기만 출장했고 그곳에서 은퇴했다. 사실상 볼로냐 FC 1곳에서 모든 선수 생활을 시작하고 끝낸 진정한 원클럽맨이었다.
2.2. 국가대표팀 경력
하지만 화려한 클럽 경력과 달리 국가대표팀의 경력은 그리 좋지 못했다. 불가렐리가 처음 출전한 대회는 1962년 칠레 월드컵이었는데 당시 이탈리아는 서독, 칠레, 스위스와 함께 2조에 속했다. 이탈리아의 1차전 상대는 서독이었는데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지만 결국 득점을 올리지 못했고 0 : 0 무승부로 경기가 끝났다. 그리고 2차전 상대는 바로 개최국 칠레였는데 이 경기에서 칠레와 이탈리아는 이른바 '''산티아고의 전투'''라고 불리는 집단 난투극을 벌이는 개막장 경기를 펼쳤다. 그리고 그 개막장 추태 경기 끝에 이탈리아는 칠레에 0 : 2로 패배해 금세 탈락 위기에 몰렸다.
3차전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불가렐리도 출전했고 이 경기에서 후반 20분과 22분에 2골을 넣으며 팀의 3 : 0 승리를 이끌었으나 결국 1승 1무 1패(승점 3점)에 그친 이탈리아는 2승 1무(승점 5점)[3] 를 기록한 서독과 2승 1패(승점 4점)를 기록한 칠레에 밀리며 조 3위를 기록하는데 그쳐 결국 또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1950년 조별리그 탈락 - 1954년 조별리그 탈락 - 1958년 지역예선 탈락으로 1950년대 월드컵을 몽땅 망친 이탈리아는 1962년에도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은 것이다.
그리고 4년 후 불가렐리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 출전하게 되었는데 이 때 그는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대회에서 이탈리아는 소련, 칠레, 북한과 함께 4조에 속했다. 이탈리아의 1차전 상대는 지난 대회에서 산티아고의 전투라는 집단 난투극 끝에 0 : 2 패배라는 치욕을 안겨주었던 칠레였다. 이 경기에서 이탈리아는 전반 8분, 산드로 마촐라의 선제골과 후반 43분, 파올로 바리손의 쐐기골에 힘입어 2 : 0 완승을 거두어 4년 전의 치욕을 설욕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2차전 소련과의 경기에서 이탈리아는 무기력한 경기를 벌인 끝에 0 : 1로 패배해 또 다시 탈락 위기에 몰리고 말았다. 3차전 상대는 바로 아시아의 처녀 출전국 북한이었다. 당시 영국은 스포츠 도박이 합법이었는데 이탈리아의 우승 확률은 20%로 50%를 차지한 브라질, 25%를 차지한 잉글랜드에 이어 3번째로 가장 높았다. 반면, 북한의 우승 확률은 단 1%로 16개 출전국 중 16위였다. 한마디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고 모든 이들이 이탈리아의 압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1966년 7월 19일, 영국 미들즈브러의 에이섬 파크에서 북한과 이탈리아의 조별리그 최종전이 열렸다.
이탈리아는 초반부터 공격적으로 나서며 시종일관 북한의 골문을 두드렸지만 좀처럼 북한의 골문을 열지 못하며 고전했다. 그리고 전반 34분, 북한의 역습 찬스에서 불가렐리는 북한의 라이트 하프 박승진을 향해 태클을 걸어 역습을 저지하려 했다. 그런데 박승진의 몸이 공중으로 붕 뜨더니 그만 불가렐리의 다리 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다리로 체중을 그대로 받은 탓에 불가렐리는 큰 부상을 입어 뛸 수 없게 되었고 결국 퇴장하게 되었다.[4] 주장이 빠지며 10명이 뛰게 된 이탈리아는 선장을 잃은 배처럼 표류하기 시작했고 결국 전반 42분, 박두익의 결승골이 터지며 북한에 0 : 1으로 예상치못한 패배를 당하며 최종 성적이 1승 2패에 그쳐 또다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말자 이에 불가렐리는 1년 후 미련없이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고 만다. UEFA 유로 1968에 명단에는 포함되었지만 대회 출전 기록은 없다.
3. 플레이 스타일
불가렐리는 미드필더의 완전체로 불렸던 선수로 탁월한 위치 선정 능력과 우수한 볼 키핑 능력 그리고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한 볼 배급 능력이 일품인 선수였다. 이런 딥라잉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하는 것 외에도 몸 싸움 능력도 탁월해 상대 선수를 압박하는 궂은 일까지 도맡아하는 근면함까지 있었던 선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장점은 기복이 없이 늘 꾸준한 기량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런만큼 리더십도 굉장히 뛰어나서 소속팀인 볼로냐와 국가대표팀에서도 모두 주장 역할을 도맡아 했다.
이탈리아의 명장 파비오 카펠로는 자코모 불가렐리를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드필더"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현재 세리에 A에서도 최고의 활약을 보인 미드필더들에게 그의 이름을 딴 불가렐리 상을 수여해 불가렐리의 위대했던 선수 시절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21세기 이탈리아 최고의 미드필더로 유명한 안드레아 피를로 역시 불가렐리 상을 수여한 바 있다.
4. 은퇴 이후
불가렐리는 은퇴 이후 스포팅 디렉터로 일하며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09년 2월 12일, 지병으로 결국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만 68세로 다소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1] 딥라잉 플레이메이커이다.[2] 1930년대에 활약했던 공격수 안젤로 스키아비오와 역대 최고의 볼로냐 선수 자리를 놓고 경쟁한다.[3] 당시 승리 시의 승점은 2점이었다.[4] 이 대회까지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다. 선발 출전한 11명은 무조건 풀타임을 소화해야 했고 만약 부상을 입어 경기를 뛸 수 없게 될 경우엔 그 선수가 빠진 채로 경기를 계속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