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로 스키아비오
1. 개요
이탈리아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46년에 볼로냐 FC 1909 감독을 맡았다.
선수시절 볼로냐 FC 1909 클럽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였다.
2. 특징
- 루이스 몬티 문서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처음에는 몬티와의 사이가 엄청 좋지 않았었다. 볼로냐의 에이스 공격수였던 스키아비오와 상대팀의 센터 하프였던 몬티는 사사건건 충돌이 있었는데 첫 번째 충돌은 192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몬티가 이탈리아에 가기 전, 스키아비오의 소속팀 볼로냐가 아르헨티나로 투어를 온 적이 있었다. 8월 15일, 볼로냐와의 경기에서 몬티는 평소답게 그를 막았고 이에 짜증이 난 스키아비오와 몇 번 말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1932년, 유벤투스로 건너온 몬티는 5월 1일, 다시 스키아비오와 맞붙었다. 전반 44분, 몬티는 스키아비오를 때렸고, 스키아비오는 기절했다 30분 후에 깨어났다. 이 둘은 나중에 대표팀 감독 포초의 노력으로 화해한다.
- 스키아비오는 우루과이의 엑토르 카스트로와 더불어 월드컵 우승팀의 첫 득점과 마지막 득점을 기록한 유이한 선수이다.
3. 선수 경력[5]
3.1. 클럽
볼로냐에서 태어난 스키아비오는 1921-22 시즌까지 볼로냐 유스에서 활약하였다.
볼로냐 데뷔는 1923년 1월 18일에 했고, 상대는 유벤투스였다. 스키아비오는 데뷔 초 11경기에서 6골을 넣는 활약을 펼치며 체사레 알베르티의 빈자리를 꿰찼고, 주전으로서 북부 지역 리그 결승까지 팀을 이끄는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해 볼로냐는 제노아에 패배하고 말았다.
하지만 스키아비오는 1924-25 시즌, 볼로냐를 이끌고 첫 스쿠데토를 차지하였다. 이 활약으로 이탈리아의 푸른 유니폼도 입게 되었다. 볼로냐에서 그의 활약은 계속되어 1925-26 시즌에는 23게임에 출전해서 26골을, 1928-29 시즌에는 29게임에 출전, 29골을 넣었다. 1931-32 시즌에는 25골로 득점왕, 그 다음 해에는 28골로 펠리체 보렐에 이어 득점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932년과 1934년에는 이탈리아 대표로 미트로파 컵에 나가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6-37 시즌에는 단 2경기 출전에 그쳤고, 1937-38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게 되었다.
3.2. 국가대표
유벤투스 FC의 루이지 알레만디와 함께 1925년 11월 4일, 대표팀에 데뷔하였다. 상대는 유고슬라비아 왕국. 그리고 스키아비오는 2골을 넣으며 2대1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런 그도 초기에는 국가대표팀의 고정 멤버가 되지 못했는데 바로 오리운디 중 한 명인 훌리오 리보나티의 존재 때문이었다. 똑같은 센터 포워드라 같은 경기에 출전할 수 없었고, 리보나티는 중유럽 인터내셔널 컵에, 스키아비오는 올림픽에 나가는 식으로 대회를 나눠서 출전하였다.[6] 올림픽에서는 우루과이의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와의 대결이 꽤 유명하다.
조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는 감독 포초에 의해 스트라이커로 낙점 받았다. 그는 미국과의 경기에서 기록한 해트 트릭을 포함[7] , 총 4골을 기록하여 득점 2위에 올랐고, 결승전에서는 결승골을 기록하여 이탈리아를 세계 챔피언에 올려놓았다.
스키아비오는 월드컵이 끝나고 국가대표팀 생활을 마무리 지었다.
4. 감독 경력
1933-34 시즌에는 볼로냐의 선수 겸 감독이 되어 팀을 이끌기도 했다. 1945-46 시즌에 다시 감독이 되기도 했지만 시즌을 마치지 못하고 감독직에서 잘렸다. 그 이후에는 이탈리아 대표팀 기술 위원회 소속으로 대표팀을 이끌기도 했는데 7년 중 5년 간 기술 위원 자리에 앉아서 팀을 이끌었다.
4.1. 은퇴 이후
스키아비오는 축구계를 떠난 후 의류 회사를 세우고 회사를 키우는데 전념했다. 그는 1990년에 사망하였다.
5.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활약할 당시 센터 포워드로서 이탈리아의 웬만한 다른 선수들보다 한 수 위의 기량을 뽐냈으며 힘과 좋은 드리블을 갖추었다. 볼로냐에서 넣은 골은 통산 242골로 단연 1위. 2위 카를로 레구초니와도 75골 차이가 난다. 그의 커리어 중 반에 가까운 7시즌이 세리에 A 창설 이전이라 세리에 A 기록은 많이 손해를 보았지만, 세리에 A 창설 이전 기록까지 합산하면 그의 기록 위에는 실비오 피올라(290골), 주세페 메아차(267골), 프란체스코 토티(250골) 단 3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경기당 득점에서도 1경기당 0.69골을 기록하여 0.77골의 군나르 노르달에 이어 전체 세리에 A 100골 이상 득점 기록자 중 2위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볼로냐에서의 출장 횟수도 364회로 역대 9위에 위치해있으며 스키아비오가 있을 때 스쿠데토를 4번이나 차지하며 클럽 역사상 전체 우승의 반 이상을 이루었으니 당연히 볼로냐에서 그를 능가할 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비 방어를 뚫음으로서 그의 움직임을 쉽게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스키아비오의 안전한 드리블이다. 그는 걷고 달리는 완급조절을 통해 가볍게 수비진을 흔들었고, 그러면 수비는 그가 어느 방향으로 나갈지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슈팅은 준비되어 있으며 강력했고, 단단하면서도 건조한 그리고 도도한 드리블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슈팅은 슈팅이었다.
(Fu il palleggio sicuro di Schiavio ad agevolare la sua azione di centravanti di sfondamento. Camminava e correva ondeggiando lievemente, sì che l'avversario non sapeva più da che parte prenderlo. Lo scatto pronto, autoritario. L'azione potente e veloce. Aveva un dribbling stretto, secco, imperioso. Il suo tiro era una fucilata.)
Centravanti, di Bruno Roghi, Emilio Violanti e Giuseppe Meazza, Milano, Sperling&Kupfer, 1955, p. 87
6. 수상
6.1. 클럽[8]
- 세리에 A 우승 4회: 1924-25, 1928-29, 1935-36, 1936-37
- 세리에 A 준우승 2회: 1926-27, 1931-32
- 미트로파 컵 우승 2회: 1932, 1934
6.2. 국가대표
6.3. 개인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정확하게는 기술 위원회 소속이다.[3] 출처: 위키백과[4] 스키아비오는 볼로냐 원 클럽 플레이어라 클럽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5] 출처: 위키백과[6] 스키아비오도 1927-30 중유럽 인터내셔날 컵에 참가했지만 2경기를 제외하면 리보나티가 출전했다. 스키아비오가 큰 부상을 입은 정황도 보이지 않으므로 당시에는 리보나티가 1옵션이었다.[7] 이탈리아의 월드컵 역사상 첫 해트 트릭이다.[8] 스키아비오는 볼로냐 원 클럽 플레이어라 클럽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9] 25골로 페드로 페트로네와 함께 공동 득점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