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재

 


1. 경력
2. 개요
3. 생애
4. 관련/참고 자료
5. 수상경력


1. 경력


  • 1963년 한국일보 입사
  • 1968~1969 한국일보 기획실장
  • 1969~1973 한국일보 부사장 겸 기획관리실장
  • 1973~1979/1989~1990 한국일보 사장
  • 1973~1981 한국일보 발행인
  • 1979~1989/1990~1993 한국일보 회장
  • 1991 스위스 로잔 IOC박물관 창립위원

2. 개요


대한민국언론인, 기업인.

3. 생애


1945년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백상 장기영의 아들로 태어나 해방 뒤 월남하여 서울에서 성장했다. 서울고등학교한양대학교 신문학과를 졸업한 뒤 1963년에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자재과장을 시작으로 기획실장, 부사장 겸 기획관리실장 등으로 근무하며 부친의 사업을 도왔다.
1973년 부친 장기영이 민주공화당에 입당해 정치 활동을 하게 되자 발행인 겸 사장직을 이어받아 1977년 한국일보를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고, 같은 해에는 고상돈이 이끄는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엄격하여 취임 이래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새벽마다 지하 윤전실에서 꼭대기까지 순시를 거르지 않았고, 해마다 서울 시내 보급소 순시와 전국 지사 지국의 배달상황을 체크하는 등 사업에 열의를 다해 왔다.
1980년 11월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선친 때부터 일궈왔던 서울경제신문을 빼앗기는 아픔을 겪었지만, 이후에도 권력의 비호와 신문사간 카르텔 형성으로 현상 유지에는 문제가 없었다.[1] 그러나 1987년 6.29 선언 이후 언론자유도가 향상되고 신문사 창간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면서 언론통폐합때 페간된 신문사가 복간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신문사들이 속속 창간되었고, 이로 인해 경쟁이 심화되자 1989년 월요판 발행, 1990년 조석간 동시발행 및 창원 분공장 설립 등 공격적 경영에 나섰으나, 광고 물량이 뒷받침되지 않은 데다 배달 체계의 한계로 모두 실패했다. 거기에 과잉투자로 빚까지 쌓였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불철주야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경영하다가, 1993년 8월 2일 지병인 간암으로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8세. 그는 타계 전인 6월 30일, 그는 휠체어에 앉은 채 이사회 자리에서 "정직하고 약자를 돕는 신문을 만들어라"라는 유훈을 남겼다.
부인으로는 배우 문희가 있고, 자녀로는 장중호 전 일간스포츠 대표이사 사장 등 1남 2녀가 있다.

4. 관련/참고 자료



5. 수상경력


  • 1982년 국민훈장 모란장
  • 1989년 IOC 올림픽훈장
  • 199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 당시에는 신문의 추가창간이 제한되어있었고, 신문지면도 8명에서 12면으로 늘어난데다가 광고수익은 매년 불어났었기 때문에 경영면에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