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영(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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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언론인, 체육인, 금융인, 정치인, 관료. 호는 백상(百想).
2. 일생
1916년 경성부 용산(現 용산구)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1934년에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조선은행에 은행원으로 취직해 1948년에 조사부장, 1950년에는 한국은행 부총재까지 지냈다. 이후 1952년에 조선일보 사장을 지냈다. 1954년 4월에는 김활란으로부터 코리아타임스를 인수했고 같은 달에 임원규로부터 태양신문(1949년 창간)을 인수했다. 1954년 6월 9일부터 태양신문을 한국일보로 바꾸어 창간했다. 그는 한국일보 사장 겸 발행인으로 일했다.
1954년에 한국 언론 사상 최초의 기자 공채를 시행했고, 1958년에는 국내 신문 최초로 과학부를 신설해 한국일보의 기반을 다졌다. 최초의 스포츠 전문지 일간스포츠를 창간하여 사장을 겸했다. 적자에 허덕이던 HLKZ-TV를 인수해서 한국 최초로 신방겸업을 하기도 했다.[1]
그는 사람이나 컨텐츠를 보는 안목이 좋고 추진력도 강했다. 인재 욕심이 많아서 글빨 괜찮은 사람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든 기자로 데려오려고 했고, 당시 무명이었던 황석영을 발굴하여 대하소설 "장길산"을 한국일보에 연재하게 한 것도 장기영이었다. 그리고 고우영을 메이저급 만화가로 만든 일등공신이었으며 1970년대 초반 전반적으로 만화를 하대하는 풍토가 있었음에도 만화사업에 관심이 있었는지 직접 뛰어들기도 했다.[2]
그러나 1964년에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로 입각하면서 신문사 경영에 소홀해졌고 이틈에 중앙일보가 기자와 광고국 직원을 대량으로 빼가버려서 한국일보가 위기를 맞기도 했다.[3] 그의 장관 재임 기간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고[4] 한국은 경제개발 단계에 진입하였다. 이 점에서 장기영은 후임인 김학렬, 남덕우 등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경제건설기를 대표하는 경제관료로 손꼽힌다.
그러나 그에게 시련이 다가왔으니.. 1966년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인해 일어난 국회 오물 투척 사건 때 국회에서 김두한 의원이 뿌린 똥물을 맞는(...) 봉변을 당했고 얼마 안되어 경제부총리 직을 떠나야 했다. 그 뒤 1967년에 한국일보로 복귀했다. 이후 IOC 위원, 아시아경기연맹(AOC) 종신 명예위원장,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민주공화당 국회의원[5] 등으로 활동하다가 1977년 심장마비로 타계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 언론사에 한 획을 그은 가장 혁신적인 인물로 꼽힌다. 한국 최초로 상업 신문 시대를 열고 각종 참신한 시도들을 하며 한국일보의 방향을 잡고 신문 제작을 주도적으로 진두지휘했다. 욕도 잘했다고 한다. 그러나 언론사에 대해서 잘 알고 능력도 뛰어났고 직원들과 소통도 잘했기 때문에 당시 한국일보에서 장기영과 함께 일했던 기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를 매우 높이 평가한다.# # #
한국일보는 1973년부터 첫째 아들인 장강재가 사장직을 물려받아 운영했으나 1993년 8월에 간암으로 일찍 타계하는 바람에 같은 해 11월에 장기영의 둘째 아들이자 장강재 회장의 동생인 장재구 회장이 물려받았다가 경영을 말아먹고 2013년에는 편집국을 폐쇄하는 등의 막장 행각으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그 후 한국일보는 2015년에 동화그룹에 인수돼 장기영 일가는 경영권을 완전히 잃게 됐다. 2010년대부터는 조중동은 물론이고 심지어 한겨레에게도 밀려 안습한 위치가 됐지만 사실 한국일보는 1990년대까지는 메이저급 신문이었다. 메이저급 정도가 아니라 장기영이 타계하기 전 1970년대의 한국일보는 동아일보와 함께 한국의 양대 일간지에 가까웠고, 그 밑에 조선, 중앙, 경향, 서울 등의 메이저가 포진하고 있었다.
장기영은 스스로를 '장 기자'라고 자칭하며 정부의 감투를 쓰고 있던 시절에도 자신의 본업이던 언론에 대하여 애정을 드러냈다고 하는데, 이만섭, 최창봉 등 그 시절 원로 언론인들의 회고에 장기영의 당시 행적이 많이 드러나는 편이다.
3. 기타
- 당시로서는 무명이던 황석영을 발굴하여 대하소설 장길산을 한국일보에 연재하게 하고 엄청나게 밀어줬다. 황석영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1974년에 처음 장길산을 연재할 당시 자료 조사비로 장기영이 거금을 덥석 내줬는데 어쩌다 보니 소문 듣고 몰려든 배고픈 주변 문인들 술 사주고 밥 사주고 하느라 돈을 그만 보름만에 다 써버렸다. 다시 장기영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니 "이번에는 자료비로 꼭 써라. 안 그러면 다음은 없다"면서 처음보다는 적게 자료비를 내주고 자주 가는 술집 명함에 장기영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주면서 "앞으로는 술이 마시고 싶으면 여기서 내 이름 앞으로 달아놓고 마셔라. 단 자료비로는 술 마시지 마라"라고 했다고 한다.[6]
4. 가계도
- 장동후 / 妻 이성녀
- 1남 장기영 전 한국일보 사장 및 경제부총리 (1916 ~ 1977) / 妻 이문자 (1920 ~ 2004)
- 1녀 장일희 전 백상기념관장 (1943 ~ ) / 夫 현순구 전 한길사료 회장 (1941 ~ )
- 1남 현상엽 전 한국일보 기자 (1970 ~ )
- 1남 장강재 전 한국일보 회장 (1945 ~ 1993) / 妻 문희 영화배우 (1947 ~ )
- 1녀 장서정 (1972 ~ )
- 1남 장중호 전 일간스포츠 회장 (1973 ~ )
- 2남 장서호 (1980 ~ )
- 2녀 장서현 (1991 ~ )
- 2남 장재구 전 한국일보 회장 (1947 ~ )
- 3남 장재민 미주한국일보 및 서울경제신문 회장 (1949 ~ )
- 4남 장재국 소년한국일보 회장 (1952 ~ )
- 5남 장재근 전 한국일보 부회장 (1954 ~ )
- 1녀 장일희 전 백상기념관장 (1943 ~ ) / 夫 현순구 전 한길사료 회장 (1941 ~ )
- 1남 장기영 전 한국일보 사장 및 경제부총리 (1916 ~ 1977) / 妻 이문자 (1920 ~ 2004)
5. 관련 자료
6. 대중매체에서
1993년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 배우 백일섭이 장기영 역을 연기하였다.
[1] 하지만 장기영이 인수한 지 2년만에 화재사건으로 폐업하게 되었다.[2] 이런 인연이 있어서인지 고우영은 1990년대 중후반에 한국일보 소속으로 잠깐 시사만화를 그리기도 했다.[3] 1965년 중앙일보 창간 당시 기자와 직원 대부분이 한국일보에서 빼온 인원이었다고 한다.[4] 박정희 정부 초기의 경제건설 5개년 계획은 경공업 중심으로 전임 장면 내각에서 마련한 것을 실천하는 성격에 가까웠다. 박정희 정부가 경제건설에서 본격적으로 독자성을 발휘한 것은 1960년대 후반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건설을 필두로 한 중화학공업 육성부터다.[5] 서울특별시 종로구·중구[6] 출처: 백상재단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