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진(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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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장덕진(張德震)
생몰
? ~ 1924년 8월 27일
출생지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나무리
사망지
상하이 광자병원
매장지
상하이 갑북황가남묘
위패
국립서울현충원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덕진은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나무리에서 부친 장붕도(張鵬道)와 모친 김현묘(金賢妙)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났지만, 생년월일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에겐 이복형 장덕주(張德胄)와 친형 장덕준, 장덕수, 여동생 장덕선(張德善)이 있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하여 오동진, 박태열(朴泰烈) 등과 함께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을 조직했으며, 1920년 2월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이 만주의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을 총망라하여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게 되자 총영장 오동진의 막료로 임명되어 조병준, 윤하진(尹河振), 박태열 등과 함께 무장활동을 지속했다.
1920년 8월, 장덕진은 미국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하는 기회를 틈타 일제의 주요 기관 폭파 및 고관을 암살하는 임무를 받고 국내에 파견되었다. 그는 박태열, 문일민, 우덕선, 김예진(金禮鎭), 안경신 등과 함께 평양으로 진입했고, 1920년 8월 3일 평안남도 경찰부 청사와 평양시청, 평양경찰서 등에 폭탄을 던졌지만 평남경찰부만 일부 폭파하고 일본 경찰 2명을 폭사시켰고 나머지 폭탄들은 불발에 그쳤다. 이후 본대로 귀환한 그는 궐석재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고, 1920년 11월 11일에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세계혁명자단체대표자회의에 김규식, 최창식(崔昌植), 이웅(李雄), 여운형, 김시현(金始顯), 나용균(羅容均) 등과 함께 한국 각 단체 대표 중 1인으로 참가했다.
이후 상하이로 간 그는 임시정부에 혐력했고, 1922년 1월에는 자신과 이탁을 체포하려는 일제의 밀정이 파견되었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윤덕보(尹德甫)와 함께 밀정을 사살하려 했다. 1922년 8월, 그는 강석훈(姜錫勳), 이한호(李漢浩) 등 10명과 함께 국민대표회의주비회(籌備會)의 조속한 개최를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1923년 12월 26일에는 천호(崔天浩)와 함께 상해교민단 의경대원(義警隊員)에 임명되어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의경대 고문 김구의 지시를 수행했다. 1924년 3월 21일에는 상하이의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 발기인 중 한사람으로 참여하여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1924년 8월 16일 한 중국인에게 저격당하고 상하이 광자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사망했으며, 상하이 갑북황가남묘(閘北黃家楠廟)의 기독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장덕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