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현(독립 운동가)
1. 개요
金始顯
1883년 ~ 1966년 1월 3일
대한민국의 전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자는 구화(九和), 호는 하구(何求) 또는 학우(鶴右), 본관은 안동(신)(安東(新)).
2. 생애
1883년 경상도 안동부(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현애리)[1]#에서 태어났으며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3.1 운동 후 만주에서 의열단에 속하면서 독립 운동을 했다. 김원봉과 동지로 활동하였다. 1920년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혁명 단체 대표자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3년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기 위해 국내에 폭탄을 반입하려다 경상북도 대구부(현 대구광역시)에서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이후로도 독립 운동으로 인하여 일제에 의해 몇 차례 투옥되었다. 상하이 고려공산당, 조선공산당의 정치인이었다.
중국 베이징 시에서 투옥 중이던 1945년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이후 귀국하여 고려동지회 회장, 전보통신사 회장을 역임하다. 그리고 민주국민당에 입당하여 고문으로 있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안동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2년 발췌 개헌 등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 정치에 반발하여 유시태와 함께 이승만 암살을 시도했으나, 유시태가 겨눈 권총이 불발하는 바람에 미수에 그치며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 참조. 이후 1960년 4.19 혁명 이후 석방되었다. 같은 해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부인 또한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권애라 지사다. 유관순 열사 등과 함께 서대문 8호 감방에 수감됐었으며, 그 당시 불렀다는 '8호 감방의 노래'의 작사자로 추정된다. 1920년대 애국 강연으로 유명했고, 1922년에는 김규식 등과 함께 러시아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한국여성대표로 참석한 적도 있다. 취조하는 형사의 뺨을 때렸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로 강직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