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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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제8대 군주. 조나라의 제3대 왕이자, 조씨종주(趙氏宗主)로서는 제17대 종주. 이때까지는 조나라의 국력이 꽤나 유지 되었지만, 장평대전에서 패해 조나라의 45만 정병을 잃어 국력이 쇠퇴하였다.[1] 신라의 효성왕과의 구분을 위해 앞에 국호인 조를 붙여 표기한다.
2. 즉위 후에 일어난 사건.
2.1. 재위 초기
조효성왕 원년(기원전 265년), 진(秦)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했다. 그리하여 3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그리하여 제나라에게 구원을 청했는데, 제나라는 장안군을 인질로 요구했다. 그러나 태후가 거절했다. 그러나 좌사 촉룡(觸龍)의 활약으로 장안군을 인질로 보내 제나라가 원병을 보내주었다.[2]
조효성왕 2년(기원전 264년), 태후가 죽었다. 그리고 전단이 조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2.2. 장평대전
기원전 262년 한나라의 상당군수 풍정(馮亭)이 조나라에게 상당을 바쳤는데, 그 이유는 진나라의 공격으로 상당군과 한나라의 연락이 두절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조효성왕은 좋다고 받아들였으나 평양군 조표만이 반대했고,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과 조우는 찬성해 다수결로 풍정의 투항을 받아들여 상당군을 차지했으며, 그곳에 백전노장 염파(廉頗)를 보내 지키게 했다. 염파는 장평에 주둔했다. 진나라에서는 왕흘을 보내 장평을 공격했으나 그는 염파의 적수가 되지 못해 이득을 보지 못했다. 이에 진의 상국인 범저(范雎)가 헛소문을 퍼뜨렸는데 염파는 두렵지 않고, 오직 조사(趙奢)의 아들인 조괄(趙括)만 두려워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조효성왕은 염파가 계속 수비만 하는 것을 답답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 말을 믿고서는 염파의 자리를 조괄에게 맡기려했다. 이에 인상여와 조괄의 어머니가 말렸다. 그러나 조효성왕은 교체를 끝내 강행하여, 7월에 조괄이 백기에게 싸워 패해 죽고, 조나라의 45만 병사는 모두 생매장당했다. 그러나 범저는 백기가 자신의 상국 자리를 대신 차지할 것이 두려워 백기를 회군시켜 멸망은 피할 수 있었다. 조효성왕은 조표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조효성왕 4년(기원전 262년), 조효성왕이 좌우가 다른 색의 옷을 입고 용을 타다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고, 그 땅에는 금으로 된 금산과 옥으로 된 옥산이 있었다. 이에 꿈 해몽을 잘하는 숙부 조숙과 서사 감을 불러 해몽을 하게 했다.
조숙: 좌우가 다른 옷을 입은 것은 둘이 하나가 된다는 뜻이고 땅에 떨어지는 것은 영토를 얻는다는 뜻이며 금산과 옥산은 많은 재물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서사 감: 좌우가 다른 옷을 입은 것은 하나가 둘로 갈라진다는 뜻이고 땅에 떨어지는 것은 일이 중간에 그르치게 된다는 뜻이며 금산과 옥산은 보기는 좋으나 가져갈수 없으니 이는 흉몽입니다.
2.3. 모수의 도움으로 포위가 풀리다.
조효성왕 7년(기원전 259년), 진나라는 다시 왕흘을 보내 한단을 쳤으나 염파의 저항이 완강해 끝내 함락시키기 못했다.
조효성왕 8년(기원전 258년), 평원군은 모수(毛遂)와 함께 초고열왕을 알현해 조나라의 구원 약속을 받아내고,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 또한 구원을 왔다.
조효성왕 9년(기원전 257년), 초나라와 위나라 덕에 포위가 풀렸다.
2.4. 연나라와의 대립
조효성왕 10년(기원전 256년), 연나라가 창정을 쳐서 5월에 점령했다. 조나라는 악승과 경사를 보내 진나라의 신량에서 이겼다.
조효성왕 11년(기원전 255년), 원저에 성을 쌓고 상원현을 설치했다.
조효성왕 12년(기원전 254년), 한단의 창고에 불이 났다.
조효성왕 15년(기원전 251년), 평원군이 죽었다. 이를 조문하러 온 연나라 사신을 푸대접하여 연왕의 분노를 샀다. 연왕 희가 조나라를 쳤으나 조군에게 율복을 잃고 경진이 포로로 잡혔다.
조효성왕 16년(기원전 250년), 조나라가 연나라의 수도 계를 포위했다.
조효성왕 17년(기원전 249년), 악승이 염파와 함께 연나라를 포위하니 연왕희가 강화를 청했고 조나라는 그것을 받아들여 포위를 풀었다.
조효성왕 18년(기원전 248년), 연릉의 균이 군대를 거느리고 상국 신평군과 함께 위나라를 도와 연나라를 치니 이때 진나라가 침입해 조나라의 유차 등 37개 성이 함락되었다.
조효성왕 19년(기원전 247년), 조나라와 연나라 땅을 바꿨는데, 연나라는 용태, 분문, 임락을, 조나라는 갈, 무양, 평시를 얻었다.
조효성왕 20년(기원전 246년), 진시황이 즉위했고 진양을 빼앗겼다.[3]
조효성왕 21년(기원전 245년), 조효성왕이 죽고 그 아들 조언(趙偃)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조도양왕이다. 이때 염파가 위의 번양을 쳐서 차지했을 때 조왕이 악승(樂乘)을 보내 염파를 대신하게 하자 염파는 불복하고 악승을 공격했다. 악승은 싸움에서 져 도망치고 염파는 위나라로 망명했다.
그래도 아들보다는 나은건 바로 자기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염파를 재등용해 전권을 맡긴것이다.
3. 미디어
킹 곤타가 그린 달인전 ~ 9만리를 바람에 타고 ~에선 조괄의 어머니나 인상여가 그리도 반대하던 조괄을 끝내 고집부리며 사령관으로 보내지만 그가 전사하고 45만 조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에 그냥 기절해버린다.
4. 만화 킹덤
작중에서는 도양왕의 선왕으로만 언급된다.
장평대전 당시 대뜸 당시 조왕이 수성전을 펼치던 염파를 해직시키고 삼대천 조사의 아들 조괄을 임명시켜 전쟁을 말아먹게 한 장본인으로 언급된다. 그 영향인지 염파가 위나라로 망명할 당시 '선왕도 대단했지만 이번 왕(도양왕)은 도무지 못 참겠다'고 깠다.
자세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진나라 육대장군과 곧 해체되지만 위나라 화룡칠장이 있던 당시 조나라 삼대천인 염파, 인상여, 조사를 임명한 게 효성왕으로 추정된다.
[1] 중국 특유의 과장법을 감안해도 생매장 사건으로 국력에 엄청난 손실이 있었다는 수사 정도로 해석해도 좋다.[2] 제나라가 인질을 요구한 이유는 조혜문왕 대에 연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친 전적이 있기 때문에, 조나라를 믿을 수 없어서였다.[3] 이것은 큰 사건으로 조나라가 진양 땅에서 일어났는데, 그 땅을 빼앗겼으니 문학적인 관점으로 보면 조나라의 멸망이 기정사실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