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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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3월 10일 ~ 1950년 8월 4일
본명은 김병원. 그래서 김병원으로 쳐도 리다이렉트되어 들어올 수 있다. 흔히 '''마지막 기병대장 장철부'''로 불린다.
1944년 일본에서 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었다가 탈출, 광복군에 투신하였다. 사실 이전에 한번 탈출하다 걸려 체포되어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는 학병에 대한 정책적인 고려로 면죄하여 그가 충실한 황군이 되기를 바랬으나, 장철부는 재차 탈영해 버렸다. 항일 유격대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이름을 장철부로 개명했고, 김구 선생의 추천(!)을 받아 중화민국 군관학교에 입학한다. 군관학교에서 기병과를 졸업한 이력으로 해방 후 한국군에 투신하였을 때 독립기갑연대 휘하의 제2기마수색대대를 지휘했다.
6.25 전쟁 당시 북한의 막강한 기갑 전력에 독립기갑연대의 주력 장비였던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들이 증발하자 장철부 휘하의 기병 부대가 기갑연대의 핵심이 되었다. 후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그는 기병의 기동력과 돌파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지연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였다.
전후 생존한 기병 부대 장병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총탄과 포탄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말에서 내리지 않고 지휘를 하며 병사들의 사기를 고양시켰으며 말로 운반한 기관총박격포로 적절히 적군에 타격을 가하면서 병력과 적의 화력, 위치를 알아냈다고 한다.[1]
단순히 드라군식으로 싸우기만 한 게 아니라 과감한 기병 돌격(!)[2]도 종종 감행했는데, 6월 29일 인민군 소대가 거룻배로 몰래 도하해오자 돌격해서 섬멸하기도 했고, 공주에서 정찰 경계 임무를 맡을 때는 적 1개 대대와 마주치자, 기습 돌격으로 섬멸시키고 적 대대장의 차량을 노획했다고 한다.
7월 금강 방어 작전 당시에는 미군 63포병 대대 휘하의 중대가 수백의 적에게 포위되어 전멸당할 위기에 놓이자, 직접 선두에서 기병 부대를 지휘 돌격하여 적의 배후를 타격, 미군을 안전하게 탈출시켰다고 한다. 이 전공은 미군의 기록[3]에도 분명히 남겨져 있다. 7월 15일에는 미 제24사단 제34연대 제3대대가 적에게 포위되어 있자 심야의 폭우를 무릅쓰고 후방을 기습, 이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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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고문단의 검열을 받는 육군 기병 부대
하지만 기병 부대는 고급 병과였기 때문에 신병 충원[4]이나 보급[5]이 어려웠기에 전투를 계속하면서 전력이 계속 감소했고, 낙동강 전선에 이르러서는 말을 타보기는 커녕 전투 경험도 제대로 없는 전투 경찰들로 충원되었다. 기존의 기병대 장병들도 대부분 말을 잃어 보병이나 마찬가지였다.
8월 청송에서 오진우가 이끄는 12사단 766여단[6]과 마주쳤는데 이때 장철부 대대장이 직접 야간 정찰을 나갔다 오곤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부대원들을 이끌고 신출귀몰 적진을 쑤시고 다니는 한편, 적의 사단 사령부를 야습(!)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결국 청송 전투 중 독이 바싹 오른 인민군 3000여 명의 대규모 공세를 힘겹게 막아내다[7] 야간에 기습한 적을 뿌리치고 포위망을 탈출하려 했지만 전투 중에 중상을 입은 장철부 대대장은 적에게 포로로 잡히지 않기 위해 권총으로 자결, 굵고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이때가 향년 29세. 또한 자결 직전에 남긴 유언은 '''포로가 되는 수치와 불명예 대신에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겠다.''' 였다고 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때 장철부 소령의 부대와 교전했던 조선인민군 12사단 766여단은 끊임없이 장철부 소령에게 투항 권유를 했고, 최후에 포위를 한 상태에서도 중국어 무전을 보냈는데, 왜 중국어였냐면 위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766여단은 장철부 소령과 함께 중국에서 조선의용군 소속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운동 동지들'''이었다. 장철부 소령은 이들의 유혹을 끝내 뿌리쳤으나, 한때의 동지들과 싸워야 했던 비극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전 서울국제교류센터 이사장 방자명(1924년 ~ 1999년)[8]이 증언하기로 당시 인민군의 대공세가 시작되던 8월 1일 전야에 체념하고 있다가 장철부 대대장에게 "우리는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요? 우리는 저승에서 다시 전우들과 만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장철부 대대장은 눈을 감은 채 한참 있다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나는 특별한 종교도 없고 철학적 해석도 잘 모르나 저 질서 정연한 천체의 운행과 인간 정신의 오묘함과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러 특성으로 봐서 절대자의 존재와 무한한 생명력과 영혼의 불멸을 믿는다."'''

이 말에 방자명은 "우리는 죽어서 다시 만나게 되겠군요. 저승에서 대대장님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저는 안심하고 죽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8월 5일 그는 장철부 대대장이 전사했다는 비보를 접하고 몹시 애석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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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투입 직전 대구역에 집결해 있는 육군 기병 부대
장철부 대대장의 전사 이후 일부 잔여 기병들이 북진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1.4 후퇴 이후 미군의 지원으로 기계화가 되면서 남은 말들은 경찰로 인계되었고 기병 부대는 해산되었다. 그러나 장철부 대대장과 기병 부대원들의 영웅적인 분전과 용맹은 전쟁 초기 연패하던 국군과 미군 장병들에게 감동과 투지를 심어주었다.
전사 후에는 육군 중령으로 1계급 특진되었고 화랑무공훈장을 받았으며 독립운동가로서의 행적이 인정되어서 1977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002년에는 태극 무공훈장이 추서됬다. 또한 2002년에는 6월의 호국 인물로 선정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묘는 2002년 8월 12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017년 3월 17일에는 그의 일대기를 담은 평전인 '''마지막 기병대장 장철부(도서출판 다물 아사달, 김선덕 저)'''가 출간되었다. # 2020년 6월 호국인물로 다시한번 선정되었다.

[1] 한강을 건너 후퇴했을 당시 강 건너 기병 막사가 인민군 손에 들어간 것을 분노하여 치밀한 작전을 짜서 야음을 틈타 말로 박격포 6문을 이동, 적이 점거한 막사로 기습 포격을 날리기도 했다.[2] 북한군에도 기병 부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은 마상 돌격을 위해 샤쉬카를 소지했다고 한다. 한국군 역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사진 자료에는 기병도로 보이는 무기는 보이지 않는다. 착검한 카빈을 기병창으로 대용한 사례가 외국에 있으니 이와 비슷했거나 미 기병대처럼 권총을 사용했거나 둘 중 하나일지도?[3] 페렌바크의 this kind of war 한국 전쟁 p119[4] 당시에도 말을 다룰 줄 아는 병사가 잘 없어서 대학 마술과를 다니는 학생들을 올림픽 대표 선발에 유리하다고 꼬드겨 입대시켰다.[5] 기병대의 말은 병사와 일체와 마찬가지였기에 말을 잃은 병사는 새로운 말에 바로 적응하기 힘들었다. 또 기병 부대의 말은 아무런 먹이나 줄 수도 없었고, 편자 교환도 힘들어 눈물을 머금고 말을 놓고 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6]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장철부처럼 항일 유격 활동을 하던 조선의용군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7] 이 과정에서 부관인 윤시병 중위가 전사하고, 장철부 대대장도 집중 사격을 받았다. 팔과 복부에 총상을 입었음에도 끝까지 사격하며 분전을 이끌었다고.[8] 5.16 쿠데타 당시 이희영 대령과 함께 군 방첩대를 맡고 있었다. 박정희는 그를 신뢰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고 노골적으로 동참을 권유하는 통에 쿠데타 모의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방자명은 속으로 '무슨 배짱으로 저러나' 싶었고, 장도영 총장에게 이를 보고하기도 했다.